글: 사종의(史宗義)
우리는 알고 있다. 징기스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주치, 차남 차카타이, 삼남 오고타이, 사남 톨루이. 징기스칸이 가장 좋아한 아들은 넷째 톨루이였고, 가장 싫어한 아들은 첫째 주치였다. 그런데, 주치는 징기스칸이 사망하기 전에 먼저 병사한다. 징기스칸이 죽은 후, 먼저 톨루이가 2년간 감국(監國)을 한다. 그러나 톨루이는 합법적인 후계자가 아니었다. 나중에 오고타이가 정식으로 칸의 지위를 승계하니, 중국에서 말하는 원태종(元太宗)이다. 1232년, 즉 오코타이가 칸의 지위를 승계한 4년째 되는 해, 톨루이는 돌연 군내에서 급사한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죽은 것일까? 사학계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정론은 없다. 어떤 사람은 톨루이가 그의 셋째형 오고타이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무당에게 속아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확실히 급병으로 죽은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떤 주장이 정확한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그렇가면,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자, 역사의 안개 속에서 답을 찾아보자.
일대천교(一代天驕)인 징기스칸은 후계자를 선택하는 문제에서 중대한 잘못을 범한다. 봉건종법제도원칙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적장자계승제를 실행하여야 한다. 즉, 적장자인 주치가 징기스칸의 합법적인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다만, 징기스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셋째아들인 오고타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했다. 징기스칸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징기스칸은 마음 속으로 장남인 주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주치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얘기하자면, 그때의 하가지 사건부터 시작해야 한다.
징기스칸의 모친은 후엘룬이다. 원래 메르키트부족의 두령인 토리토아의 동생인 칠레두의 미혼처였다. 혼인하러 가는 도중에 징기스칸의 부친인 예수가이에게 약탈당하고 예수가이의 처가 된다. 즉 그녀는 징기스칸의 모친이다. 이 사건으로 토리토아와 징기스칸의 부친 예수가이는 원한을 맺는다. 나중에, 징기스칸의 부친 예수가이가 타타르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지만, 토리토아는 이 원한을 잊지 않았고 반드시 후엘룬을 빼앗긴 복수를 하고자 했다.
징기스칸의 첫째 부인은 보르테이다. 주치, 차카타이, 오고타이, 톨루이가 모두 보르테가 낳은 자식들이다. 당시, 징기스칸과 보르테가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메르키트부족인들의 급습을 받는다. 토리토아는 이에는 이로 징기스칸의 처 보르테를 빼앗아간다. 나중에 징기스칸은 다른 두 부락의 도움을 받아, 메리키트부를 격파하고, 보르테를 다시 찾아온다. 얼마후에 주치를 낳는다. 다만, 징기스칸은 주치가 자신의 친아들인지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는 그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음영이 된다. 이것은 그가 주치를 좋아하지 않은 중요한 원인이다.
그렇다면, 주치는 도대체 징기스칸의 친아들인가 아닌가? 세계통사저작인 <집사>의 기록에 따르면, 보르테는 메리키트인들에게 붙잡혀가기 전에 이미 임신을 했다. 징기스칸이 그녀를 구해내서 돌아오는 길에 주치를 낳는다. 확실히 주치는 징기스칸의 친아들이다. 이건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과학지식이 부족했던 당시에 징기스칸은 자신의 아들에게 의심을 품었을 수 있고, 그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집사>는 페르시아인이 편찬한 세계통사저작이고, 페르시아어로 쓰여져 있다. 이 책은 현재 고문헌중 몽골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서적중 하나이다. 사료가치가 아주 높다. 그러므로, 이 책의 주치 출생문제에 대한 기술은 믿을 만하다.
둘째, 차카타이는 주치가 합법적으로 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차카타이는 징기스칸의 적자중에서 셋째이다. 성격이 강인하고, 일처리가 시원스럽다. 형인 주치와는 전혀 달랐다. 주치는 아주 돈후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성격등의 원인으로, 형제 두 사람은 어른이 된 후 계속 불화했다. 게다가 모두 주치의 출생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차카타이는 형인 주치를 멸시해왔다. 그리고 주치가 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징기스칸 14년(1219년), 징기스칸은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을 정벌하러 간다. 출정하기 전에, 징기스칸의 또 다른 황후인 예수는 징기스칸에게 후계자문제를 고려하도록 얘기한다. 징기스칸은 일찌감치 이 문제를 고려했어야 했다. 연령으로도 그는 이미 육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1162년생). 장남 주치는 1179년생이다. 이때 그도 이미 마흔이었다. 징기스칸은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것을 계속하여 늦추어왔다. 한편으로는 매년 전쟁을 벌여서 후계자문제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 주치에 대하여 그다지 만족하지 않아서 계속 미루고 결정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예수황후의 얘기를 듣고, 징기스칸은 이 문제를 고려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4명의 아들을 자신의 장막으로 불러, 후계자문제를 논의한다.
징기스칸은 먼저 주치의 의견을 물어본다. 주치는 첫째아들이니 첫째가 먼저 얘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치는 이때 마음 속으로 매우 우울해 있었다. 통상적이라면 첫째가 당연히 합법적인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더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바로 의견을 얘기하지 못한다. 그가 막 입을 열어 말하려 할 때, 차카타이가 먼저 나서서 발언한다. 차카타이는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고 징기스칸에게 직설적으로 말한다: "만일 칸께서 메르키트종자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는다면 나는 절대로 그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속담에 이런 말도 있다: 사람을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사람을 들추더라고 약점을 들추지는 말라. 그러나, 차카타이는 말하면서 전혀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입을 열자마자 모욕적인 언사를 썼고, 그 창끝은 직접 주치의 아픈 점을 찔렀다. 주치의 자존심은 극도로 상처입는다. 차카타이와 그 자리에서 말다툼을 벌인다. 결국은 검을 꺼내서 결투를 하려고까지 한다.
징기스칸은 두 아들을 말리고, 차카타이를 한차례 욕한다. 그리고 주치는 나의 친아들이라고 선언한다. 차카타이에게 함부로 까불지 말라고 한다. 차카타이가 함부로 날뛰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가 칸위를 노리는 야심까지 배제할 수는 없었다. 왜 그런가? 그는 4명의 아들중 둘째이다. 만일 첫째를 제거하면, 둘째인 자기가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경우 차카타이가 자신의 속셈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위선적으로 자신의 동생인 셋째 오고타이를 추천한다.
기실, 징기스칸은 네 아들에 대하여 일찌감치 분석을 마쳤다. 장남인 주치는 비록 돈후하고 선량하지만 시원시원하게 일처리하는 강인한 성격이 결핍되어 있어 대사를 이루기 어려웠다. 차남 차카타이는 비룍 용맹하고 강인하지만 허회약곡(虛懷若谷)의 흉금이 없어서 군림천하할 수 없었다. 삼남 오고타이는 열정적이고 호방하며 처세에 지혜가 있었다. 그리고 속이 깊었고, 결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넷째 톨루이는 비록 다른 사람보다 총명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여러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셋째인 오고타이가 비교적 적합한 선택이다.
징기스칸은 차카타이가 오고타이를 극력 추천하자, 주치와 톨루이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주치는 마음 속으로는 원하지 않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부친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다. 넷째인 톨루이는 알았다. 자신의 앞에 형이 세 명이나 있는데, 어찌 자신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올 것인가? 그래서 그도 동의한다.
후계자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었다. 당연히 이때의 차카타이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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