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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징기스칸)

징기스칸의 후계자 선정과정

by 중은우시 2008. 5. 27.

 

<<몽골비사>>는 몽골족이 문자없던 시대를 벗어나 문자시대로 전환하는 시기에 탄생하였고, 주로 징기스칸의 일생동안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저작에는 징기스칸이 후계자를 선정하는 과정을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몽골인들의 사회윤리관념, 정치참여방식이 당시 중원의 한족들과는 많이 달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징기스칸의 사신 100명이 회회국(Sarta-ul)에 보낸 사신들이 억류되어 살해당한 사건은 강인하고, 애증이 분명한 징키스칸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는 절대 이를 참고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복수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정벌과정에서 만일 불측의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후계자로써 제국을 이끌어 갈 것인가? 징기스칸도 이제는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원사(元史)>>의 기록에 의하면, 1227년, 징기스칸은 병에 걸려 치료가 어려워지자, 칸의 지위를 셋째아들에게 물려주었다고 되어 있다. 징기스칸은 왜 장남에게 물려주지 않았을까? 혹시 장남이 무능력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몽골족은 장남을 칸으로 옹립하는 전통이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는 <<몽골비사>>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전투에 나서기 전에 후계자를 확정하자는 것은 에수라는 여인이 제안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바로 징기스칸의 측비(側妃)였다. 그녀는 전투에 나서는 징기스칸에게 친아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 둠으로써 참새무리와 같은 백성들이 믿고 의지할 곳을 마련해달라고 권했다. 이러한 점은 당시 몽골족사회에서 부녀자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준다. 한족의 '후궁'들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는 법도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징기스칸은 에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후계자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징기스칸을 골치아프게 한 것은 그의 세 아들 중 도대체 누구를 후계자로 삼아야 할지, 어떻게 출신, 재능, 지혜, 성격등을 비교해서 가장 적합한 아들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하여 징기스칸은 아주 신중했다.

 

징기스칸의 장남은 주치라고 하는데, 영웅스럽고 재주가 뛰어났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그는 징기스칸의 친아들이 아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왜 징기스칸이 그를 길렀는가? 이는 당시 몽고족의 약탈혼 습속에서부터 얘기해야 한다. 징기스칸의 모친인 후엘룬도 징기스칸의 부친이 약탈해왔던 것이다. 이 여인은 원레 메르키트부락의 에케 칠레두의 신혼부인이었는데,  후엘룬을 맞이하여 돌아가는 도중에 징기스칸의 부친인 에수가이가 마침 매를 초원에서 데리고 놀다가 지나가는 후엘룬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빼앗아 부인으로 삼는다.

 

나중에 메르키트부는 이에 대하여 보복을 하게 된다. 테무진부락을 습격했을 때, 테무진이 도망치면서 그의 신부인 보르테는 전마를 찾지 못하여 납치당하게 된다. 오래지않아, 테무진은 복수전을 벌이고, 보르테를 다시 찾아온다. 이후에 장남 주치를 낳았다. 그의 친부(親父)가 징기스칸인지 여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어,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몽골비사>>의 기록에 의하면 징기스칸은 한번도 이 아들이 자기의 장남이 아니라고 말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아들인 차카타이가 징기스칸이 장남을 후계자로 정하려고 할 때, 자신의 입으로 "우리가 어찌 메르키트의 씨를 받은 자에게 통치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바 있다. 이는 주치가 징기스칸의 적자가 아니라는 것인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차카타이와 같은 자손이 자기의 친아버지 앞에서 이처럼 대담하게 말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그러한 사실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몽고족에게는 유목문화전통이 흐르고 있다. 즉, 고아를 입양하면 절대 아이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주치가 친생이든 아니든, 징기스칸은 그다지 따지지 않았고, 그저 전통에 따라 잘 보살피고 길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재로 성장하게 하였다. 집안 사람들과 대신들과 함께 후계자를 논할 때, 징기스칸은 민주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그는 의안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큰아들은 주치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남인 주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둘째아들인 차카타이가 주치는 친아들이 아니라는 말을 꺼낸다. 이에 주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바로 차카타이의 옷깃을 움켜잡고, 둘째에게 묻는다: "부친께서는 나를 주워왔다고 말한 적이 없다. 네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느냐? 너는 잘난체 하는 것말고 뭐 할 줄 아는게 있는가? 무공으로 말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없지 않느냐?" 이들이 서로 싸우자, 징기스칸 수하의 두 유명한 대신들이 한 사람씩을 끌어당겨 말렸다. 징기스칸은 한켠에서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이 장면을 보면, 몽고족사회는 후계자를 정할 때, 한족사회처럼 신비막측하게 처리하거나 암중조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가족, 대신, 아들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이고 투명하며 공정하게 진행되었다.

 

차카타이를 잘 아는 것은 부친인 징기스칸이었다. 사실, 징기스칸은 일찌기 그가 '성격이 강경하고, 흉금이 좁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대신인 코코쇼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따라다니면서, 생각나는 것을 그에게 말하도록 하였다" 이는 둘째에 대한 교육과 관리를 강화한 것이다. 징기스칸의 마음 속에 두뇌가 단순하고 사지가 발달한 속좁은 아들은 장군을 될 수 있어도 장수는 될 수 없고, 더구나 군주가 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차카타이의 언사가 격렬하고, 절박하든, 혈맥이 아무리 정통이더라도, 후계자문제에서 징기스칸은 기본적으로 둘째인 차카타이를 계산에 넣고 있지 않았다.

 

코코쇼스는 징기스칸의 부하들 중에서 아주 정치공작능력이 뛰어난 자였다. 그는 먼저 차카타이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그가 태자가 되고싶은 마음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아주 간곡하게 이치를 설명한다: 모친의 젖같은 마음은 이미 너의 그 말 때문에 냉각되었다. 모친은 똥,오줌을 치우면서 너를 어른으로 키웠다. 너의 두명의 꼭같은 따뜻한 뱃속에서 낳은 자식들이 서로 칼을 맞대고, 서로 죽이려고 할 줄은 물랐을 것이다. 코코쇼스의 이 말은 그에게 한 마디도 혈연관계에서 누가 가깝고 멀고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모친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주치와 차카타이는 모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서로 욕을 하며, 대결하여 모친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에 대하여 후회했다.

 

분노는 잠시 가라앉았다. 차카타이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리하여 징기스칸이 후계자를 결정하는데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징기스칸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차카타이에게 주치가 장남이 아니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고 질책했을 뿐이다. 차카타이는 부친이 화가 난 것을 보고는 할 수 없이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소가죽이 허풍떤다고 만들어지지도 않고, 진정한 재주는 말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주치와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 우리는 부친을 위하여 힘을 다하겠다. 셋째인 오고타이가 사람됨이 충후하니, 모두 그에 대하여 얘기하도록 하자. 셋째가 부친을 따라다니고,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훈계를 받도록 하자" 이때 징기스칸은 다시 주치의 의견을 듣는다. 주치도 그에 동의한다.

 

이렇게 되자, 후계자를 정하는 일은 드디어 분명해졌다. 다만 이때도 징기스칸은 한 마디도 셋째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맹세를 지키지 않은 두 친족의 일을 얘기한다. 이들은 징기스칸이 칸으로 추대될 때, 맹서를 했으나, 나중에 신의를 어겼다. 징기스칸이 두 사람을 추적하자 둘은 자결한다. 징기스칸은 주치와 차카타이에게 한 말에는 책임을 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이빨이 빠지게 웃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맹세를 어겼던 두 친족의 후손들을 주치와 차카타이에게 분배해주고, 이들을 볼 때마다 맹세를 어긴 자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징기스칸의 후계자선정방법은 절묘하여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첫째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주치는 자기의 친아들인지 아닌지 징기스칸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한번도 이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여러 아들과 가족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를 토론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치에 대한 일이 언급되는데,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 후계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는 암도진창의 방식으로 적자를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다. <<몽골비사>>에는 여러 기록에서 몽골족이 혈통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치는 징기스칸의 마음 속에 하나의 상처이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이다.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 속으로 주치는 후계자에서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주치를 먼저 언급했다. 암중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희망을 달성하려고 한 것이며, 주위 사람들은 전혀 눈치를 못채었다. 셋째는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방식을 택하였다는 점이다. 징기스칸은 후계자선정에 있어서, 가장 절묘한 방법이 바로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발언하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모두 자기의 의견을 내놓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한편에서 판단하고 분석했다. 스스로 말은 몇 마디 하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