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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징기스칸)

징기스칸이 남긴 세 가지 유언

by 중은우시 2009. 9. 2.

글: 장건안(張建安)

 

1. 첫번째 유언

 

1219년, 징기스칸은 호라즘제국(花剌子模,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이 계속 도발을 해와서, 크게 분노한다. 그리하여 친히 출정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그의 첫번째 서정(西征)이었다.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비(妃)들이 징기스칸에게 간언했다: "바라건데 칸께서는 다시 한번 고려해주십시오. 일단 칸의 큰 나무와 같은 몸이 돌연 쓰러져 버리면, 당신의 백성은 누가 관장하겠습니까." 이것이 그의 첫번째 유언이 나오게 된 연유이다.

 

징기스칸에게는 39명의 후비가 있었다.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은 조강지처인 대황후 보르테였다. 보르테는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 주치, 차남 차카타이, 삼난 오고타이, 사남 톨루이였다. 그들은 모두 몽골제국의 요직을 담당하고 있었다.

 

몽골제국은 적장자를 태자로 삼는 전통은 없었지만, 네 아들중 주치가 가장 나이도 많고, 공적도 탁월했다. 그리하여 징기스칸은 먼저 그의 의견을 물어본다. 그러나, 주치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차카타이가 나서서 큰 소리로 말한다: "칸께서 주치에게 말하라는 것은 그에게 칸을 넘기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어찌 메르치트 잡종의 통치를 받을 수 있습니까?"

 

원래, 주치의 출신은 계속 문제되었다. 예전에 테무진(징기스칸의 본명)의 힘이 아직 강대하지 못하였을 때, 보르테는 메르치트에 포로로 잡혀간 적이 있고, 그때 다른 사람의 처가 되었다. 여러달후, 테무진이 메리치트부를 멸망시키고, 보르테는 다시 징기스칸의 곁으로 돌아왔다. 주치 본인은 보르테가 돌아오는 도중에 낳는다. 시간이 교묘하게도 딱 9개월이었다. 그러다보니 주치가 포로로 집히기 전에 회임한 것인지 아니면 포로로 잡힌 후에 회임한 것인지에 대하여 여러가지 말들이 있었다. 비록 징기스칸은 주치를 다른 세 아들과 전혀 차이없게 대해주었지만, 주치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세 아들도 모두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주치도 혈기넘치는 몽골 사나이이다. 어찌 차카타이로부터 이런 모욕을 받고 그냥 넘기겠는가? 그는 격동하여 차카타이의 소매를 붙잡고 실력을 겨루고자 한다.

 

징기스칸은 이때 차카타이에게 말한다: "어떻게 주치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는가? 주치는 짐의 장남이 아니냐? 이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허용치 않겠다."

 

차카타이는 부친의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문제삼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웃음을 지으면서 주치와 함께 부친을 위하여 힘을 다 바치겠다고 말한다. 그는 비록 이렇게 말하지는 했지만, 암중으로 또 다른 구상을 한다. 주치가 새로이 칸에 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오고타이를 부친의 곁에 두고 후계자의 교육을 받도록 하자고 건의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주치는 비록 불만이 많았지만, 더 이상 자신이 후계자가 되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함께 힘을 다하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함께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모시겠다고 한다.

 

징기스칸은 그리하여 정중하게 명을 내린다: 후계자를 오코타이로 정한다.

 

징기스칸이 이 유언을 내린 후, 첫번째 서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강력한 공세하에 호라즘제국은 정복당한다.

 

1227년, 징기스칸은 정벌도중에 병으로 쓰러진다. 어느날 밤에 그는 돌연 기괴한 꿈을 꾼다. 그는 자기가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여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오고타이와 톨루이를 곁으로 불러서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는 오고타이를 칸으로 삼아라. 나의 유명을 어기지 말라. 차카타이가 곁에 없는데, 그에게 딴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해라"

 

이때 징기스칸의 네 아들중 주치는 이미 죽었다. 그리하여 오고타이가 계승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유목민족의 말자상속의 습속에 따르면, 징기스칸이 죽은 후, 막내아들인 톨루이가 실제로 징기스칸 본인이 이끌든 여러 부족과 대부분의 군대를 물려받게 된다. 이것은 비록 징기스칸의 유언에 따라, 오고타이가 제국의 칸이 되지만, 본인 실력에서는 톨루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두번째 유언

 

징기스칸이 생전에 벌인 마지막 전쟁은 서하(西夏)와의 전쟁이다.

 

1226년 가을, 징기스칸은 병든 몸으로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도중에 아르부허(阿兒不合)에 이르렀을 때, 말이 놀라고 징기스칸은 말에서 떨어지며, 상처를 크게 입는다. 그의 아들과 여러 부하들은 회군하고 징기스칸의 몸이 회복되면 다시 정벌하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그에 동의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서하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보자고 한다. 이것은 사실 서하가 전쟁의 화를 피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였다.

 

징기스칸의 명령에 따라, 사신은 서하국왕에게 약속대로 병사를 보내지 않을 뿐아니라, 못된 말로 비꼬기까지 했다고 질책했다. 그러면서, 몽골대군이 그들을 손봐주기 위해 왔다고 하였다.

 

서하국왕은 그 말을 듣고 두려웠다. 그리하여, "나는 비꼬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곁에 있던 대신 아사 간부가 끼어들어서 도발적으로 말한다: "내가 비꼬는 말을 하였다. 너희가 어쩔 거냐. 만일 나를 죽이고 싶으면, 하란산으로 와서 싸우자. 만일 금은비단을 얻고 싶으면 우리 서량으로 와서 가져가라" 말을 마치고는 사신을 쫓아보낸다.

 

징기스칸은 사신의 보고를 받은 후, 모욕을 받았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즉시 병구를 이끌고 군대를 출발시키고, 서하를 직접 공격한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서, 아라산에 주둔하고 있던 아사 간부를 격파하고, 그를 노예로 삼는다.

 

대군은 계속 진격하고, 그해 11월에는 이미 영주를 탈취하고, 서하의 수도 흥경부를 포위한다. 서하의 마지막 황제는 양식도 떨어지고 원군도 끊기자 어쩔 수 없이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한다. 이때 징기스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된다. 날씨도 더워, 육반산으로 피서를 간다.

 

자신이 병상에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는 모두 서하인들의 불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징기스칸은 분노에 차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서하인들을 깨끗이 제거해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본인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두번째 유언을 남긴다: 하나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감추어, 서하인들이 항복하겠다 생각을 다시 바꾸지 않도록 하며, 그 국왕에게 친히 몽골대군의 군영으로 오도록 하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다시 밀명을 내려서, 당올인(唐兀人, 당항족 즉 서하인)들을 부모부터 자손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버려서 그의 시신앞에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1227년 8월 18일, 징기스칸은 육반산 부근의 청수현에서 사망한다. 향년 66세이다. 징기스칸의 부하는 그의 유언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장례를 치르지 않고, 서하국왕이 몽골칸의 장막으로 왔을 때, 징기스칸이 병으로 그를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삼일후 서하의 마지막 국왕은 죽는다. 몽골대군은 흥경부(지금의 영하 은천)으로 들어간 후 모조리 도살한다.

 

징기스칸의 두번째 유언에 따라 서하는 멸망하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한다.

 

3. 세번째 유언

 

<<원사>> 권1에는 징기스칸의 세번째 유언이 적혀 있다.

 

징기스칸은 죽기 전에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금나라의 정예병사는 동관(潼關)에 있다. 남으로 연산을 점거하고, 북으로 대하를 끼고 있으니, 격파하기 어렵다. 만일 송나라에게 길을 내달라고 하면, 송나라는 금나라와 대대로 원수지간이니 반드시 우리에게 허락할 것이다. 그러면 병사를 바로 대량으로 치고 들어가게 한다. 금나라는 급해지면 반드시 동관의 병사를 데려올 것이다. 그러나 수만의 무리가 천리나 먼 곳을 지원하러 오게 되면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할 것이다. 전쟁을 할 수 없을 지경은 아니지만, 격파하는데는 문제없을 것이다. 그 말을 마치고는 죽었다. 나이 육십육세이고 기연곡(起輦谷)에 묻었다.

 

징기스칸은 죽기 전까지도 자신의 대업을 잊지 않았다. 그는 놀랍게도 죽기 직전에도 마지막 힘을 모아서, 이처럼 명확하게 몽골, 금, 남송의 세 대국의 생사존망이 걸린 작전방침을 말해주었다. 이 최후의 유언은 너무나 완벽하다. 주요전략은 피실격허(避實擊虛, 튼튼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친다), 이일대로(以逸待勞, 편안히 기다려 지친 적군을 상대한다), 연송멸금(聯宋滅金, 송나라와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킨다)이다. 먼저 송나라가 내주는 길을 이용해서 금나라름 멸망시킨다. 그 후에 다시 송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도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뿐아니라, 징기스칸은 아주 구체적으로 출병노선까지 정해주었다. 그리고 남송과 금의 관계에 따라 방안을 실시할 수 있는 현실적인 근거까지 제공해주었다.

 

징기스칸의 조상은 금나라사람들에게 피살당했다. 그래서 금나라와는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서하가 멸망한 후, 금나라는 큰 압력을 느낀다. 그리하여 사신을 보내어 징기스칸에게 화해를 요청한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징기스칸은 금나라 사신의 앞에서는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 그는 여러 신하들에게 몽골대군은 더이상 살륙하지 말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금나라는 마음을 놓는다. 그러나, 사실상 징기스칸은 금나라에서 바친 금은주보를 부하들에게 나눠주는 동시에 부하들에게 "그들은 우리의 조상을 죽였다. 그들의 남자는 우리의 노예로 삼아야 하고, 그들의 여자는 우리의 시녀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징기스칸은 이미 금나라를 멸망시킬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깊이 생각한 후,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성숙된 계획을 아들과 측근들에게 말해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징기스칸의 세번째 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오코타이가 즉위한 후, 몽골대군은 징기스칸의 유지에 따라, 금나라에 대한 강력한 공세를 펼친다. 전체적인 전략배치는 징기스칸의 유언에 따라 진행되었고, 결국 금나라를 멸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