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한(高寒)
역사상 몽골대군은 13세기에 수차례의 대규모 서방정벌을 일으킨다. 비교적 적은 수의 군대와 장거리의 군수공급으로 모든 적을 이겼다(1260년 무슬림에 대한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포함하지 않음). 이는 전체 유라시아의 역사를 바꾸었고, 유럽과 중동의 군사혁명을 촉진시켰다. 몇 차례의 서방정벌과정에서 몽골군대의 수량은 통상적으로 아주 적었다. 총수는 최대 20만을 넘지 않았다(유럽전투에서는 15만을 넘은 적이 없다). 개별 전투의 사람수는 더욱 적었다. 중원에서 금나라에 대한 균주전투에서 진형이 "층층이 겹겹이 이어져서 두텁기가 20리에 이르렀다"는 광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어떤 원인에서일까? 이 글에서는 몇 가지 방면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1. 서방각국의 군대가 채용한 전술은 몽골인의 개선된 동방전술을 당해내지 못했다.
기실, 동서방의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는 일찌감치 쌍방작전시의 전술에서도 나타났다. 동방(중국과 아랍문화를 대표로 하는 범위내에서)의 전쟁사상, 서방처럼 대형이 극히 엄밀하고, 밀집한 방진(方陣)을 이루고, 보병, 기병, 궁병, 투창병등이 밀접하게 협조하는 군대는 나타난 적이 없다. 이것은 서방인들의 사고는 엄격하고, 과학적인 분업을 추구하며, 큰 시스템적인 일을 조직하는 것을 잘하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의 전국시대의 거진(車陣), 명나라때 척계광이 조직한 왜구를 상대하는 원앙진(鴛鴦陣)과 타타르를 상대하는 거,기협동전투진은 영원히 서방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동방군대는 작전시, 대형이 엄정하지 않았다. 부대작전의 기동성과 전술의 영활성(靈活性)을 중시했다. <손자병법>의 영향을 받아, "궤도(詭道)"를 중시하고 정정당당한 정규전을 중시하지 않았다. 이런 전술의식의 지배하에, 군대의 단위별 공격력과 방호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만일 로마제국고 마케도니아제국의 밀집보병방진을 상대하면서 정면으로 작전을 벌인다면, 승리의 가능성은 아예 없다.
동방군대와 달리, 서방군대는 처음부터 엄밀한 대형을 채택한다. 특히 정면전의 공격력과 방호력을 강조했다.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보병방진을 예로 들면, 이런 보병방진은 통상적으로 귀족과 평민으로 20열이상의 밀집된 대오를 이루고, 몸에는 두터운 중갑옷을 입고, 손에는 장창을 들며, 뒷열일수록 창의 길이기 길며, 앞열의 어깨에 걸친다. 이러게 하면 방진의 정면은 진정한 창의 숲이 된다. 방진의 뒷면은 통상적으로 노예가 달라붙어서 따른다. 후방조달과 보호업무를 한다. 이 방진의 양날개는 기병이 양익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하는 임무를 맡는다. 분명하게, 이런 전술의 충격력은 동방군대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약점도 아주 분명하다. 대오가 방향을 트는 것이 불편하다. 반드시 대형의 진형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철기시대에 접어들어도, 말의 안장도구가 발전하여, 기병이 갈수록 중요하게 된다. 쌍방은 기병의 전술운용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동방의 기병은 중무장하는 경우가 적다. 기병은 마도(馬刀), 장창을 쓰며, 궁전을 쓸 수도 있어야 한다. 기병의 주요목적은 군대의 기동능력과 정면의 충격력을 위한 것이고, 넓은 범위에서 작전할 수 있다. 그런데, 서방의 기병부대는 위력이 강대한 중장갑기병으로 발전한다. 사병은 두꺼운 사슬갑옷을 입고, 효과적으로 도창과 궁전의 살상력을 막아낼 수 있다. 기병은 장창과 장검을 사용하여 살상력이 비교적 크다. 다만, 동방과 다른 점이라면, 기병전술이 사용이 여전히 고대로마시대의 보병방진과 마찬가지로, 대형과 정면의 살상력과 방호력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전술기동능력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같다. 작전범위도 여전히 좁은 구역내에서 진행되었다.
동서방의 군대는 지리적인 장애로, 유럽군대와 중동지구의 군대간에 대규모의 전쟁이 발생한 것을 제외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방군대와 만리바깥의 서방군대가 싸우는 기회로 유일한 것은 알렉산더대왕이 인도를 이기고 동진할 때였다. 그러나 병사하면서 진격이 끝난다.
몽골인의 전술
몽골은 징기스칸이 각 부족을 통일한 후, 즉시 중국북방의 각왕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진행한다. 몽골군대는 처음부터 기병의 기동력과 공격력에 의존했다. 과거의 유목민족군대와 마찬가지로, 보병공격역량과의 협동작전은 없었다. 중원의 높고 견고한 성벽앞에서, 강대한 기병은 어찌할 힘이 없었다. 비록 그들은 야전에서는 무적이었지만, 금방, 몽골인들은 요, 금, 서하의 군대로부터 보병과 협동작전을 벌이는 능력을 습득한다. 이리하여 과거에 단순히 기병에 의존하던 전술을 수정한다. 그리고 한족이 새로 발명한 화약과 투석무기를 운용하는 것도 배운다.
전술운용에서, 몽골인들은 특히 부대의 기동성을 강조했다. 원거리에서 우회포위하고 병력을 나누어 협공하는 것을 주요한 전술특징으로 삼는다. 몽골인의 원거리기동성은 역사상 유례없는 정도에 이른다. 그들은 자주 백리가 넘는 지역에서 대규모 기동작전을 펼쳤다. 적이 그들의 공격을 예상하거나 방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전투중에 단순한 정면충격에 의존하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통상적으로 사용한 방법은 소규모의 기병이 게속하여 적군을 교란시키고, 적군이 공격하면 후퇴한다. 추격하는 적군의 대형이 흩어지거나 피로해지면, 사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은 일진의 밀집하여 화살을 쏘게 한 후에 벌떼처럼 공격한다. 이런 전술은 과거의 흉노, 한족, 거란, 여진등이 모두 썼다. 다만 몽골인처럼 사방의 유기(遊騎)를 간첩으로 삼고, 대규모 기병이 수시로 원거리 공격하는 상황은 나타난 적이 없다. 게다가 몽골인들은 대량의 한족과 기타 북방소수민족을 편입시켜, 한족의 선진적인 공성무기를 사용하여 성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동방에서 야전이든 공성전이든 거의 천하무적이 되어 버린다.
사실상, 몽골군대의 기병은 어떤 경우에도 1대1로 유럽의 중장갑기병을 이기지 못했다. 유럽중갑기병의 장창과 중검의 살상력은 몽골기병이 들고 있는 마도, 장창 혹은 낭아봉보다 훨씬 강했다. 유럽기병의 말도 몽골말보다 훨씬 컸다. 다만, 몽골기병의 전략전술은 유럽기병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유럽군대의 전투는 얼마나 큰 규모의 군대이든간에 모두 좁은 전쟁터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유럽군대는 통상적으로 기사의 풍모를 지니고 있어, 정면에서 1대1로 정정당당하게 전투하는 것을 숭상했다. 그들이 백리방원의 지역을 전쟁터로 삼고, 우회전술이 습관화된 몽골군대를 만났을 때, 그들은 확실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전쟁의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몽골인의 서방정벌때, 대부대로 적과 정면조우한 경우, 몽골기병도 신속히 전술대오를 편성하여 정면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전술대형은 통상적으로 5개 가량의 횡열대형이고, 매 횡열은 단열이다. 각 횡대는 거리가 널찍했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보다 훨씬 넓은 정면(현대전술로 말하자면, 이렇게 상대방이 정면으로 충격할 수 있는 넓은 정면은 극히 불리하다)을 가졌다. 앞의 두 횡대는 중기병(동방군대에서 상대적으로)이고, 나머지는 경기병(서방의 경기병과 비교하면 아무런 갑옷을 입지 않은 기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외에 많은 유기가 사방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상대방군대가 가까이 다가오면, 몽골군대의 경기병은 돌연 앞열의 중기병 횡대의 사이에 거대한 공간으로 아주 빠른 속도로 돌진하여 서방의 적을 향하여 장창과 중원에서 배워온 독화살을 쏜다. 여러번 일제히 발사한 후, 중기병이 신속히 후퇴한다. 이어서 경기병도 신속히 후퇴한다. 그렇게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다. 공격을 받은 서방군대는 보병방진이건 기병방진이건 이때 모두 신속히 반격하기 어렵다. 반드시 대형을 유지하여 엄밀하게 전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몽골기병을 살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몽골군대의 기병이 한두번 이런 충격을 가하면 적군의 심리에 동요가 오게 된다. 이런 반복공격을 몽골병은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한다. 왜냐하면 대오의 거리가 비교적 멀어서 그다지 엄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몽골병의 대형은 쉽게 적군에서 멀리 떨어져 새로 정비할 수 있다. 일단 적군의 대형이 혼란해지고 군심이 동요하여 후퇴하기 시작하면, 넓다란 몽골기병대형은 신속히 포위대형으로 들어간다. 적군에 대하여 근거리의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몽골군대는 기병이 급속히 대종심지역으로 전진해갈 때, 견고한 성벽을 만나면, 통상적으로 소수의 부대를 남겨서 감시하게 하면서 후속공성병이 오기를 기다린다. 대부대는 여전히 고속으로 전진한다. 후방의 적은 전쟁준비를 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그외에, 몽골군대는 자주 겨울에 강물이 언 틈을 타서 전쟁을 시작한다.
전투사례: 1241년, 몽골의 수부타이와 바투는 각각 대군을 이끌고 동유럽으로 진격한다.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서 헝가리평원에서 전투를 준비한다. 두 부대의 먼 측익에는 두 개의 소규모 기병부대가 있었다. 오는 도중에 폴란드, 살레지아, 동프로이센을 휩쓸며, 주력부대를 엄호하는 전략의도를 보였다. 헝가리국왕은 몽골군이 페스트성에 다가오기 전에 몽골군대의 의도를 알아차린다. 즉시 10만의 군대를 조직하여 몽골군대와의 결전을 준비한다. 몽골의 근 6만명의 주력은 헝가리군의 공격을 피해 약간 후퇴한다. 사월, 쌍방은 최종적으로 사조강가에서 대치한다. 헝가리는 강건너편에 몽골군 주력이 있는 것을 파악한 후 신속히 거대한 교두보를 점거한다. 그리고 강의 서안에 대량의 마차로 견고한 병영을 쌓고는 몽골군의 공격을 기다린다. 몽골군은 후속 공성병이 도착한 후, 즉시 여명에 위력이 큰 투석기와 화전을 수비하고 있는 교두보의 헝가리군대에 발사한다. 수비부대는 전례없는 공격에 순식간에 궤멸한다. 몽골기병은 신속히 다리를 건너, 막 잠에서 깨어난 헝가리군대의 주력에 공격을 감행한다. 헝가리인들이 자신감있게 대열을 지어 수적으로 열세인 몽골군대를 향해 나갈 때, 금방 이 부대가 주력군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몽골군의 약 3만명의 주력은 근 100리 떨어진 남방에서 일찌감치 밤을 틈타 차가운 강물을 건넜던 것이다. 몽골의 주력은 배후에서 헝가리군대를 급습한다. 대형이 혼란해진 헝가리군대는 즉시 견고한 병영으로 돌아가 사수한다. 몽골인의 공성병은 병영을 향하여 밀집하여 거석, 화전, 독전(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인의 독화살에는 비상을 묻혀서, 강렬한 독연기가 피어올랐다고 한다). 기름을 쏘아댄다. 이들 공격무기는 대부분 서방군대들이 처음 보는 것들이다. 마음 속으로 얼마나 놀랐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 몽골인들이 채용한 "위성필궐(圍城必闕)"의 전술로 헝가리인들은 신속히 붕괴되고 결국은 무너진 곳으로 도망친다. 다만, 경무장한 몽골군대의 속도와 내력은 도망치는 자들보다 훨씬 빨랐다. 계속하여 말을 바꿔타면서 사방으로 다니며 죽인다. 댜뉴브강전투에서 헝가리군대는 7만여명이 사망한다. 몽골군은 신속히 페스트성을 함락시키고 10만여명을 도살한다.
몽골군대는 부대의 고도기동성에 의존한다. 유럽에서 대량의 무장이 견고하지만 행동이 느린 유럽군대를 소멸시킨다. 유럽군대는 속도에서 열세이므로, 전쟁터에서 도망쳐오는 경우가 아주 적었다. 오랫동안, 유럽인들은 몽골군대의 수량이 아주 많았다고 생각했다. 그외에, 유럽군대는 주로 근거리의 격투 살상에 의존했으므로, 몽골군대가 기동작전을 운용할 때, 소량의 몽골군인들만이 살상당했다. 현대의 유럽군사학자들은 유럽군대와 몽골군대의 전쟁중 사망비율은 아마도 냉병기시대에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경우일 것이라고 말한다.
2. 몽골인의 특수한 장비
몽고마.
몽고마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가장 열등한 말이다. 몽고마는 몸이 왜소하고, 속도가 느리다. 장애물을 넘는 능력에서는 유럽의 큰 말에 절대로 미치지 못한다. 다만, 몽골말은 세계에서 인내력이 가장 강한 말이다. 환경과 음식에 대해서도 가장 덜 까다롭다. 아시아의 추운 고원, 황량한 사막이든 유럽평원이든 몽고마는 언제든지 음식을 찾을 수 있었다. 몽고마는 적응력이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몽고마는 장거리를 쉬지 않고 달린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건 더운 여름이건 야외에서 생존할 수 있다. 동시에 몽고마는 언제든지 기승과 마차를 쓰는 일을 다 해낼 수 있다. 이것은 중국전통의 좋은 말들이 최종적으로 모두 몽고마로 대체된 원인이다.
그리고, 몽고마는 몽골군대에서 기승도구로 쓰이는 외에, 먹거리의 하나로 되기도 한다. 몽골기병은 대량의 모마를 쓰는데, 마유(馬乳)를 제공한다. 이것은 몽골군대의 물자조달에 대한 요구가 크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몽골기병은 통상적으로 1마리 이상의 전마를 준비한다.
몽고마의 특수한 장점은 몽골군대로 하여금 당시에 여하한 군대도 따르지 못할 속도와 기동능력을 갖게 해주었다. 예를 들어, 1241년 겨울, 수부타이의 주력기병은 루스카산 입구에서 카르파티아산맥을 넘고, 돌연 다뉴브강유역의 그람성에 도착하는데 3일이 걸린다. 눈이 가득 쌓인 두 지역간의 거리는 300여킬로미터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길이 없는 산지였다.
중원의 신식무기
몽골인들이 사용한 발석거, 화전등은 중원의 신식무기이다. 중원의 각종 왕조는 원래 견고한 성을 이용하여 몽골군대를 막아냈다. 그러나 몽골군대가 장악한 이들 장비는 나중에 신속히 높고 거대한 성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데 쓰였다. 화약과 화전류의 무기가 냉병기시대에 출현했으니, 그 위력은 자연히 놀랄 정도였다. 그외에, 그들을 본 적이 없는 적군에게는 거대한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유럽전투에서, 많은 경우 화약류의 무기는 성벽을 완전히 파괴할 정도의 국면에 이르지 못해도, 수비군들은 전투의지를 잃고 성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몽골기병의 각종 장비
몽골기병은 유럽처럼 병종의 무기를 엄격히 나누지 않았고, 게다가 유럽군대가 사용한 무기처럼 무겁고 크지 않았다. 그래서 몽골기병은 각종 무기를 몸에 휴대했고, 언제든지 서로 다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몽골기병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무기는 통상적으로 궁전, 마도, 장창, 낭아봉이다.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몽골인들의 궁전이다.
그들의 궁전은 비교적 크고 길다. 개략 80킬로그램의 힘을 들여야 당길 수 있다(영화 마르코폴로를 보면 그는 몽골인의 강궁을 당기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정거리가 멀어서, 거의 몽골기병의 가장 중요한 살상무기가 된다. 그외에, 몽골기병은 자주 개인의 기호에 따라 다른 무기를 휴대한다. 예를 들어, 말을 생포하는 밧줄과 말을 붙잡는 그물, 이런 것들은 정규유럽군대가 보기에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고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외에, 몽골기병의 갑옷은 대부분 가죽으로 만들었다. 가볍지만 질기다. 비록 유럽의 중무장기병의 사슬갑옷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부담이 가볍고, 쉽게 장기간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외에 철제갑옷병처럼 겨울이나 여름에 견디기 힘들지도 않다.
3. 몽골군대의 훈련, 인내력과 군사화된 특수사회조직
몽골군대는 중국북방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전사였다. 말등에서 자라고, 어려서부터 활과 화살을 가지고 논다. 성년이 되면, 직업군인이라 할 수 있다. 추위와 힘든 환경에서 자라므로, 모두 끈기있고 근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물질조건적인 대우를 그다지 따지지 않는다. 얼음을 오르고 눈을 베고 자는 것도 통상적인 일이다. 원거리를 다니는 것은 어려서부터의 습관이다. 물질조건을 따지지 않으므로 몽골군대는 군수조달의 부담이 아주 가볍다. 몽골군대는 동서방에서 정착한 농경민족이 가지지 못한 연속작전의 능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서방에서 편안하게 살아온 귀족기병들이나 중국에서 붙잡혀온 백성들이 영원히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모든 적군과 비교하면, 몽골인들은 문화와 물질에서 낙후된 지위를 가졌다. 대규모 공격,약탈은 시종 왕성한 전투력을 유지하는 원인이자 동력이었다. 재물에 대한 갈망은 살인이 가져온 자격으로 몽골인들은 대외전쟁을 거의 멈추지 않았다. 몽골인들은 사병들이 마음대로 도살하게 놔두는 정책을 썼다. 마음 속으로 살인의 용기로 군인의 호전적인 정서와 원시적인 용기를 자극시키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몽골군대는 아주 용감하고 야만적인 전사가 된다. 마음대로 약탈하는 것은 몽골군대의 군수조달의 공급문제를 일부 해결했다.
그외에 몽골의 각부족이 통일된 후, 거의 대외전쟁을 민족생존의 기반이 되고, 유목이 오히려 다음 자리를 차지한다. 몽골은 완전히 군사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최고의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몽골인은 3,4세의 아이들을 전문적인 군사훈련부서에 넣어서 군사교육을 시킨다. 그들은 엄격하게 기마, 활쏘기훈련을 받는다. 이들 어려서부터 훈련된 아이들로 구성된 기병부대는 전투소질과 기능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들은 말등에서 돌격할 때껀 신속히 후퇴할 때건, 정확하게 적을 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보통전사들이 이광(李廣)같은 신궁(神弓)라는 말이다. 이점은 다른 민족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군대가 몽골군대를 만났을 때 사상자가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몽골인들은 전쟁에 상응하는 사회조직을 만든다. 각 부락의 지도자는 생활과 생산의 관리조직자이면서 군사행동의 관리조직자이다. 대외전쟁시, 전인민이 동원되고, 전인민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전쟁에 참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호라즘을 장기포위할 때, 전인민이 참여했다. 성아래에서 방목하며 생활하며, 군대의 지속적인 공격력을 유지했다. 성이 함락될 때까지.
이상의 분석에서 보면, 몽골군대는 유라시아대륙에서 동서로 정벌을 다니면서 거의 무적이었는데 이것은 필연적 결과이다. 몽골은 일본과 월남의 전쟁에서 실패했는데, 이것은 이 두 전쟁터에서 몽골군대가 장점을 발휘하기 가장 힘들었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들은 반드시 말에서 내려 배를 타야 했고, 하늘의 도움으로 목적지에 도달했지만, 해안에 도착한 후, 산지가 나타났다. 그들은 대규모의 기동작적을 벌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말을 타고 전투하기도 힘들었다. 더욱 골치아픈 것은 습기가 많은 공기는 대륙기후에 익숙한 그들이 숨을 쉬기도 힘들게 만들었다. 그들은 환자가 되거나 전염병에 감염되어 생명을 잃는다. 유럽군대가 그들에게 적응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곳의 밀림에서 튀어나오는 군대에 적응되지 못했다. 하물며 그들의 전우는 마음 속에 딴 생각을 품고 있던 한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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