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동(阿東)
수나라, 당나라이전까지는 왜국사람들은 “백성들중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庶多跣足)’. 아직도 신발을 신을 줄 모르는 민족이었다. 그러니, 중국의 황제들은 자연히 이 이웃나랑에 대하여 무시하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입장이었다. 왜국도 전혀 고분고분하게 중국의 말을 듣지는 않았다. 수당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평정은 부지불식간에 깨어진다. 암류가 용솟음쳐서 왜인은 중국과 대등하게 상대하고자 했고, 모든 면에서 체면을 끝까지 고집했다. 그리하여, 화약연기없는 ‘체면전’이 벌어지게 된다.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사상 이 체면전은 근 100여년간 지속된다.
수나라 개황2년(600년) 일본의 섭정 쇼토쿠태자(聖德太子, 廐戶太子)는 처음으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수문제는 관리를 보내어 왜국사신에게 왜국의 풍속을 묻는다. 왜국의 사신은 이렇게 대답한다. “왜왕은 하늘을 형으로 삼고, 해를 동생으로 삼는다. 하늘이 밝기 전에 정무를 살펴보고, 가부좌를 하며, 해가 뜨면 일보는 것을 중지한다.” 이 보고를 받고 마치 파리를 삼킨 것처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수문제는 생각한다: 중국의 황제는 스스로 하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데, 왜왕은 하늘을 형이라고 부르다니, 왜왕이 숙부뻘이 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하여 수문제는 대노하여, ‘훈령을 내려 고치게 한다’ 수문제는 천진하게 생각했다. 이 이웃나라의 잘못에 대하여 말로 몇마디 혼을 내면 고쳐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다. 수나라때의 이 체면싸움은 아직 전모가 드러난 것이 아니다. 그 이후는 훨씬 더 심해진다.
당시의 일본은 한편으로 순종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회만 있으면 야심을 드러냈다. 수나라 대업3년(기원607년), 왜국의 외교가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수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국서에는 “동천황(東天皇)이 서황제(西皇帝)에게 경백(敬白)한다”는 말로 시작하다. 이것은 처음으로 외교문서에 ‘천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수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 수양제는 왜국국왕의 조공에 아주 기뻐했는데, 국서에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는 내용이 나오자, 안색이 홱 변하고 만다.
이번에는 수문제때처럼 왜왕이 자신을 하늘을 형으로 삼는다는 식으로 ‘숙부’뻘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왜왕은 국서에서 신하가 천자를 뵙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군왕의 예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양제에게는 대불경이다. 그리하여 수양제는 홍로경에게 말한다. “오랑캐의 글에 무례한 점이 있으니 다시는 보이지 말라.” 즉, 이후에 이런 불경한 국서는 자신에게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서의 칭호에 대하여 수양제는 그저 우연한 사건으로 생각했고, 이를 통하여 왜왕의 의도까지 간파하지는 못했다. 더더구나 이를 중시하지도 않는다. 홍로경으로 하여금 왜국의 사신을 잘 접대하게 하였고, 배세청(裴世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기까지 하다.
수나라 대업4년(608년) 팔월 십이일, 왜왕은 배세청을 접견한다. 접견때, 배세청은 먼저 수나라의 선물을 바친다. 그 후에 수나라의 국서를 올린다. 쇼토쿠태자는 수양제의 국서에서 첫번째 문구가, “황제가 왕에게 안부를 묻는다(皇帝問候王)”라고 되어 있자, 그의 웃던 얼굴이 돌연 굳어진다. 수나라가 다른 사람을 낮춰보면서 자신의 패주로서의 이미지를 나타내려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군왕으로 동등하게 대접해주지 않은데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고, 사신에게 선물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꾹 참고 발작하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이웃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에 대하여 마음 속에 깊이 원한으로 품고 있었다.
그해 구월 십일일, 배세청 일행이 귀국한다. 오노노 이모코는 사절단을 동행하여 호송한다. 그는 수나라에 왜왕의 국서를 바치는데, 홍로경이 펼쳐보니, 첫문구가 “동황제경백서천제”였다. 그는 놀라서 등에 식은 땀을 흘린다. 신하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황제는 이런 글자를 싫어한다고. 더구나 황제는 ‘더 이상 이런 글은 내게 보이지 말라’고까지 하였지 않은가? 그래서 이를 감히 수양제에게 올리지 못한다. 이 국서를 보면 일본은 대등한 예절을 유지하고자 하고, 체면을 유지하려고 하는 심정이 잘 드러난다.
수나라때는 중국과 일본간의 체면싸움이 그저 말과 문자로 나타났다. 그러나, 당나라때가 되어서는 중일간의 교류가 더욱 빈번해지고,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이 이미 안정시키면, 사방의 오랑캐를 복속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멀리서온 왜국의 사절과 유학생들을 아주 잘 돌봐주었다. 그리고 칙령을 내려 일본은 1년에 1번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신주자사 고표인(高表仁)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기도 한다. 이때, 중국과 일본의 교류는 밀월기였다. 일본인들은 대당의 인자함에 감동했고, 강성한 대당의 앞에서, 바다를 사이에 둔 왜국은 그대로 승복하지 않았다. 왜왕은 문자로 더 이상 장난치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부닥치게 된다.
정관6년(622년) 십월, 고표인은 난파진(難波津, 지금의 오사카)에 도착한다. 왜왕은 높은 격의 접대를 한다. 그러나, 고표인등이 왕도로 가서 왜왕을 접견하려할 때 마중나온 왜왕의 아들과 예를 다투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서>에는 ‘무수원재(無綏遠才)’라는 네 글자로 이번 충돌을 표현하고 있고,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이슈는 아마도 같을 것이다. 이번 충돌은 아마도 왜왕의 아들이 동등한 예로 상대할 것을 요구했고, 고표인이 화를 낸 것일 껏이다. 고표인은 대당의 조서를 읽는 것을 거절하고, 즉시 귀국하겠다고 한다. 이때의 왜왕은 그래도 인내심이 있었다. 633년 정월에야 사절단을 호송하여 고표인을 중국으로 돌려보낸다.
이번의 체면충돌에 대하여 당나라조정은 왜국에 죄를 묻지는 않았다. 그냥 대범하게 고표인이 무능하여 쌍방이 서로 불쾌하게 헤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쌍방의 교류도 이를 이유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고종시대가 되어, 왜국은 견당사를 계속 당나라로 보내어 학습하는 외에 ‘문서와 보물을 많이 가져 갔다.” 그동안, 백제와 고려는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구원을 요청한다. 당고종은 조서를 왜왕에게 보내어 신라를 원조하도록 한다. 왜국은 백제와 관계가 밀접하여 당고종의 조서를 본체만체 하고 전혀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다. 당고종은 그의 말이 통하지 않자, 부득이 스스로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도와줄 수밖에 없게 된다. 당고종은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를 들어, 왜국의 제4차 견당사를 억류한다.
이때, 일본은 이미 자신의 발판이 튼튼해졌다고 생각하여, 무력으로 당나라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663년, 중일간의 첫번째 전투인 백강구전투가 일어난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군과 왜군의 해전에서, “네번 싸워 모두 이겼고, 사백척의 배를 불태웠고, 바닷물이 빨갛게 물들었다.”고 적었다. 나당연합군이 일본백제연합군에 철저히 승리를 거두고 끝난다. 왜국의 참패는 자신감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 강대한 당나라의 앞에서 무력으로 싸우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온유하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다른 최선의 길을 찾게 된다.
무측천, 당현종에서 당숙종시기까지, 당나라조정은 왜국의 아와타노마히토(粟田眞人, 朝臣眞人)을 사선경(司膳卿), 조형(晁衡, 阿倍仲麻呂)을 좌산기상시 겸 진남도호로, 정진성(井眞成)은 상의봉어, 후지와라노기요카와(藤原淸河)는 비서감으로 삼는다. 이처럼 왜인들을 관리로 임명한 행위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런 관직을 주는 것은 조정의 관리에 대한 은혜이며 일종의 명예직이다. 사실, 이는 대당과 왜국간에 종주국과 속국의 관계를 나타내려는 것이다. 결국 당나라정부는 여러가지 방법을 써서 체면싸움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애쓴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자’로 ‘체면’을 바꾸는 행위는 연약함을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일찍이 당나라에서 관직을 받은 후지와라노키요카와 일행은 당초에 현종을 만났을 때, 현종이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나라에는 현명한 임금이 있으니, 그 사신의 행동거지도 남다르다.” 그리고 일본에 “유의예의군자지국(有義禮儀君子之國)”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그리고 당현종은 아배중마려로 하여금 후지와라노키요카와일행을 데리고 창고와 삼교전을 보여주게 하고, 키요카와와 길비진비(吉備眞備)의 용묘를 그려서 번장에 넣어두게 했다. 이는 일본사신의 체면을 많이 봐준 것이다.
그러나, 네가 체면을 살려준다고 하여, 상대방도 너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은 아니다. 얼마후, 당현종이 연회를 베푸는데, 후지와라노키요카와는 체면쟁탈전을 벌인다. 천보12년(753년), 정월 초하루. 당나라의 문무백관과 각국사신들이 장안 대명궁 함원전에 모였다. 성대한 새해첫날축하의식을 연 것이다. 각국사신이 자리를 잡은 후에, 후지와라노키요카와는 일본의 자리가 원래는 서쪽의 토번(吐蕃)의 바로 아랫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자리에 앉고 보니, 신라사절이 동쪽의 가장 윗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항의를 제기한다. 신라보다 낮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대당은 일본과 신라의 자리를 조정해주어 일본의 체면을 살려주다. 이번 ‘자리’다툼은 당나라 황제의 면전에서 일어났고, 당현종은 일본사신이 공개적으로 떼를 쓰는 것을 용인하고 결국은 타협까지 해준다. 이는 일본의 국제지위가 어느 정도 올라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당도 이미 이 속국을 무시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백여년의 중일간 체면전을 살펴보면, 일본인은 처음에는 말, 문자, 대항, 들이받기식으로 계속하여 요구하고, 수당정부는 훈계, 화, 관직부여, 양보, 용서, 무력등의 책략으로 피동적으로 응대한다. 일본인들은 조금씩 자존심을 찾아가고, 수당정부는 이 과정에서 존엄을 점차 상실한다. 체면전부터 시작하여 일본인들의 야심은 점점 더 팽창하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중국의 영토와 자원을 노린다. 나중에 왜구가 오고, 왜군이 왔다. 그들은 ‘유의예의군자지국’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총과 칼을 들고, 대담하게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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