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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한무제: 진시황 못지 않은 폭군

by 중은우시 2012. 3. 3.

글: 서부명기(西部銘記)

 

한무제 유철(劉徹)은 일찌기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숭배하던 역사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확실히 숭배할 만한 인물이다. 북방으로 눈을 돌려, 일찌기 그의 증조부인 유방을 여러해동안 애먹였던 흉노를 여러번 그가 격패시킨다. 이때부터 막남(漠南)에는 더 이상 흉노왕정이 없게 된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 열대우림의 남월까지 한왕조의 판도에 넣는다. 장건과 소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두명의 영용한 외교가와 탐험가는 얼마나 많은 속국을 집어넣고, 얼마나 많은 제후들을 봉했던가? 이러한 문치무공을 지닌 인물이라면 어찌 어려서 세상일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의 존경과 숭배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존경과 숭배의 광환아래 그는 만년에 유불릉을 태자로 세울 때, 전해지는 바로는 서한초기의 여후간정(呂后干政)의 국면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유불릉의 모친이자 그가 만년에 가장 총애했던 구익부인을 죽여버린다. 이것도 나는 그의 과단과 견의(堅毅)로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위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서한의 그 판도를 직면했을 때, 선인이 남긴 많은 사서를 읽고 한무제에 가까워지자, 이 글은 쓰기가 쉽지 않겠다고 느꼈다. 한무제는 원래 내가 어렸을 때 생각한 것처럼 위대하고 완벽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사마광(司馬光)의 의견에 찬동하기 시작했다: 한무제와 진시황은 본질적으로 그다지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내 마음 속의 우상은 무너져 내린다.

 

피비린내나는 목우(木偶)

 

우선 한무제의 만년부터 얘기해보자.

 

한무제 정화2년, 즉 기원전91년, 66세인 한무제는 이미 풍촉잔년(風燭殘年)의 노인이었다. 항상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늙고 병든 시골노인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노인은 중국역사상 '웅재대략'으로 유명한 군왕이 생명의 마지막 겨울에 접어든다. 미앙궁의 황금과 야명주로 장식한 호상에 누워서, 그는 자신의 질병을 누군가가 무고(巫蠱)를 행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소위 무고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믿고 있던 것으로, 어떤 사람을 병이 들게 하거나 죽게 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나무로 그 사람의 모양을 깍아서 만들고 그후에 그 인형을 침으로 찌르고 땅 속에 묻어두고, 다시 악독한 저주를 행하면 아주 영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나라궁전의 겉으로 화려하고 당당하며 삼엄한 경비의 가운데 약간 명성을 얻은 무당들이 드나들어 후궁들을 위하여 저주를 행해주곤 했다. 이들 후궁들은 총애를 얻기 위하여, 서로 공격하기도 했다. 가장 살상력이 있는 공격은 한무제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궁중에 목우를 묻어두었고, 목우의 신주는 바로 폐하 당신이다.

 

개략 꼬박 2년의 시간동안, 한무제는 이 목우와 저주에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질병이 심해지면서, 후비들의 거짓말과 고발, 성상(星象)이 보여주는 재난, 하루에도 몇 번씩 놀라는 변방의 사건들, 이 모든 것은 한무제로 하여금 확신하게 만든다. 자신의 병과 제국의 병은 모두 목우때문이라고. 그리하여, 한무제는 가장 믿는 심복대신인 강충(江充)으로 하여금 목우를 찾게 한다. 일단 발견하면 살계를 대거 펼칠 것이다. 2년간, 목우로 인하여 죽음을 당한 자가 부지기수이다.

 

특히 나라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강충이 태자의 동궁에서 목우를 가장 많이 찾아냈다고 한 점이다. 그 말에 숨은 뜻은, 태자가 저주의 방법으로 부친이 하루빨리 죽고 그리하여 자신이 후계를 잇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태자의 지위는 원래 위험했다. 강충의 조사결과와 그가 한무제에게 보고하려고 준비한다는 위협은 태자를 더더욱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여려해동안 부친의 그림자 속에서 자란 젊은이는 스승인 석덕(石德)에게 찾아가서 대책을 상의한다.

 

석덕도 견식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태자에게 말한다. 이전에 승상부자와 두 공주 그리고 위황후가 모두 무고를 행했다고 지목되어 죽임을 당했다. 만일 황상이 강충의 보고를 듣는다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결백을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일을 벌여서 끝장을 보는 것이 좋겠다. 아예 강충을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다. 태자는 원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사부의 말을 듣고, 강충과 그 수하의 몇몇 오랑캐무당을 붙잡아서 죽여버린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사건이 마침내 태자반란의 결과로 이어진다. 한무제는 대노하여, 승상에게 병력을 이끌고 태자를 치라고 한다. 태자도 군대를 모아서 쌍방은 장안에서 5일간 혼전을 벌인다. 5일후, 태자는 패배하여 도주한다. 그해 8월, 태자는 장안성 교외에서 자살한다. 동시에 해를 입은 것은 태자의 두 아들이다. 즉 한무제의 미성년인 두 손자들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한무제도 처량함을 느낀다. 태자와 두 황손이 그냥 죽을 길을 택한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비애가 들었다. 성격도 더욱 급해진다. 폭군은 아마도 즐거울지 모른다. 재수없는 것은 그 아래의 신하들이다.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아침에 저녁이 어떨지 모른다. 이때 천하의 사람들은 알게 된다: 이 방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사람은 희노애락이 무상한 노인이다. 이 노인은 소년때의 웅재대략도 없고, 심지어 소년때처럼 탐욕스럽지도 않다. 그저 계속 화를 내고 계속 사람을 죽임으로써 두려운 생명의 마지막을 버티려고 할 뿐이다.

 

생명의 끝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는 제왕은 맹수보다도 흉맹하다.

 

시인의 기질을 지닌 황제

 

한무제가 황제위를 승계한 것은 때를 잘 만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나라 역대황제중 운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복은 그의 조부인 한문제와 부친인 한경제가 여러해동안 여민휴식(與民休息)의 무위정책(無爲政策)을 써서 일천여년 봉건사회에서 가장 양호한 사회국면을 조성해주었기 때문이다.

 

문경이제(文景二帝, 한문제 한경제의 두 황제)는 청정공검(淸靜恭儉), 안양천하(安養天下)로 유명하다. <한서. 식화지>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무제 초기에 이르는 70년간(항우를 멸한 때로부터 한무제가 북방흉노를 공격하기 전까지), 국가에 큰 일이 없었다...경사의 돈은 백만의 거액을 쌓아두었는데 끈이 썩고 헤아려볼 수도 없었다. 태창의 곡식은 오래 묵혀두었고, 넘쳐서 바깥에 쌓아둘 정도였다. 썩어서 먹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백성이 사는 길거리에는 말이 있고, 논밭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문경이제는 청정무위의 황로사상(黃老思想)을 기반으로 여민휴식, 여민생양하였다. 이는 진나라말기 다년간의 전쟁으로 조성된 상처를 치유했을 뿐아니라, 대량의 사회재부를 축적한다. 국가역량이 사상유례없이 강성해진다. 이것은 한무제가 나중에 문치무공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기초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조부나 부친과 비교하면 한무제는 전형적인 패가자(敗家子)이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무실(務實)하고 담박(淡泊)했다. 한경제는 일찌기 노대를 하나 만들려고 생각하다가 계산해보니 10호의 중등집안의 재산만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서 그만둔다.

 

이렇게 통이 작은 것은 한무제가 보기에 우스운 일이다. 한무제는 콩이 컸다. 그리고 어렸을 때도 그는 휘금여토(揮金如土)의 시원시원함을 드러낸다. 그의 이모가 농담으로 사촌누나인 아교(阿嬌)를 그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자, 한무제는 말한다: 반드시 황금으로 만든 집을 지어 그녀를 살게 할 것이라고. 문경이제이래 수십년간 축적한 부는 한무제가 바닥이 드러나도록 다 써버렸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다. 후기가 되어서는 일을 크게 벌이기 좋아하는 한무제는 놀랄 정도의 소비를 한다. 나중에는 관직을 팔아서 돈을 모은다. 서한정부의 부패가 심화되고, 국운이 쇠퇴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이다.

 

성격적으로 보면, 한무제는 상당한 정도의 시인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쉽게 격동하고 성격이 민감했다. 왕왕 개인의 호오를 기준으로 일처리를 한다. 젊었을 때, 이 소년천자는 정력이 넘쳤다. 그러나, 그의 모후인 두태후가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정력이 넘치는 소년천자는 그의 정력을 국가대사에 쏟을 수 없게 되자, 황당한 일들을 벌인다. 자주 미복으로 궁을 나서서 자칭 평양후(平陽侯)라고 한다. 한번은 그가 한밤중에 종남산으로 가서 사냥을 했는데, 말을 달려서 농지로 들어가서 농사를 망친다. 현지의 농민이 욕을 계속 해댔고, 현령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려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황제의 신물을 꺼내서 자신이 당금천자라고 밝힌다. 현령등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한무제는 여기서 이전에 체험하지 못한 즐거움을 느낀다.

 

두태후가 죽었을 때, 한무제는 이미 21살의 성인이 되었다. 이제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었던 군왕은 마침내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불세의 공훈을 세우고자 한다. 그후에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했다. 하물며 조부와 부친이 남긴 많은 재산이 창고에 넘쳐났다. 이것을 다 쓰지 못하면 일생동안 근검절약했던 부친과 조부를 볼 면목이 없게 될 것이다.

 

청년 한무제에 있어서 공적을 세우는 선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쟁만큼 통쾌하고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대상은 먼저 한고조를 이긴 바 있고, 한고조를 평성에 칠일밤낮을 갇혀있게 했던 흉노이다. 흉노는 한고조때 화친정책을 실시한 이래, 한나라와 흉노간에는 변경분쟁이 있기는 했지만, 흉노는 예전처럼 걸핏하면 말을 몰고 남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무제는 자잘하게 변방에서 싸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큰 위업을 원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속인과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속인과 범인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다. 더더구나 그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도 없다.

 

한무제가 진정으로 집권한 후 세번째 해인 기원전133년, 그는 정교하게 기획하여 이후 한나라와 흉노간에 수십년에 걸친 전쟁을 시작하는 마읍지모(馬邑之謀)를 일으킨다. 안문 마읍 사람인 섭일(聶壹)이 한나라정부에 건의한다. 그가 흉노의 침입을 유인하여 한나라군대의 매복권내로 데려올 것이니 그때 소멸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어사대부 한안국은 이에 반대의견을 취한다. 그는 가볍게 변방의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한무제는 이것이 아주 좋은 계책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친히 배치를 한다. 그래서 섭일은 가짜로 흉노에 투항하고, 선우에게 그가 마읍의 수비장수를 목벨 수 있으며 성을 가지고 투항하겠다고 한다. 과연 선우는 계책에 걸려든다. 십만기병을 이끌고 마읍으로 진군한다. 마음으로 가는 길에서 선우는 한나라 당에는 사방이 가축이 있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아주 괴이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부근의 한나라지방군대의 보루를 하나 공격하여 점령하고, 안문위사를 포로로 잡는다. 이 위사는 선우가 그의 목을 내려칠려고 하자, 한나라군대의 밀모를 털어놓는다. 선우는 대경실색하여 즉시 퇴각한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는 계책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화만 불러왔다. "이때부터 흉노는 화친을 끊고, 변방을 공격했으며 왕왕 한나라국경을 침입했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마음지모가 실패하니, 한무제는 체면이 서지 않게 되었다. 한무제와 같은 의견을 지니고 이번 특별행동을 주도했던 왕회(王恢)가 속죄양이 된다. 하옥된 이후 갖은 고초를 겪다가 자살한다. 그후 한무제는 국가의 온 힘을 기울여 흉노와 백번이 넘는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인다. 위청과 곽거병과 같은 직업군인의 공명을 이루어준 외에, 원래 넘쳐났던 국고는 하루하루 비어갔다. 백성들은 이로 인하여 고통을 심하게 겪었다. 국가수입을 늘여서 방대한 군비지출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무제는 기원전123년 무공작(武功爵) 17급을 설치하고, 민간에서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도록 한다. 범죄를 저질러도 돈을 내면 용서해주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정치는 극도로 부패하고, 사법도 극도로 부패한다.

 

특히 탄식할 일은 무제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북순하여 흉노에 시위한 다음 해, 그가 진행했던 무수한 흉노에 대한 공격이 사실은 아무런 작용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원전104년, 무공으로 유명한 한무제는 다시 화친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강도왕 유건의 딸 유세군을 오손왕 곤막에게 시집보낸다. 이렇게 하여 곤막이 한나라흉노전쟁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을 바란 것이다. 동시에, 흉노와의 화친도 계속 협상한다. 그러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한무제가 죽기 1년전에, 흉노와의 전쟁을 계속 주재했던 이광리가 흉노에 투항한 후, 사실은 다시 한번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한무제가 전쟁이든 화친이든 흉노에 대한 정책은 이미 파산되었다는 것을. 흉노의 위협은 다시 한번 한나라에 치명상이 된다. 이 치명상은 수십년후 왕소군이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의 청춘과 미모로 치료하게 된다.

 

한무제의 재위기간동안, 흉노를 공격한 이외에, 서남이, 동월, 남월, 조선, 진국등 이웃나라들이 하나도 예외없이 한나라군대의 공격을 받는다. 기실 한무제에 있어서, 이들 국가와 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이처럼 먼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예를 들면 지금의 해남도에 남해군과 첨이군을 두었는데, 중앙정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결국 이를 버리고 현지인들이 자치하도록 놔둔다), 그가 수십만 병사의 생명과 계속 비어가는 국고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진행한 것은 목적이 단지 하나이다. 이웃나라에게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의 웅재대략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면파

 

여러 사서를 종합해서 이런 추론을 얻어낼 수 있다: 한무제의 몸에는 이중성격이 있다. 한편으로, 그는 조부와 부친과 같은 개명한 군주가 되고 싶었다. 위소보가 강희에게 아부를 한 것처럼 '요순우탕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요순우탕이 되려면 반드시 각 방면에서 스스로를 점검해야 하고, 스스로를 단속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내로 통제해야 한다. 자신의 권력도 반드시 제국통치의 운행궤도안에서 사용해야 한다. 젊었을 때처럼 성격대로 마구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선비들을 중시하는 겸손한 태도도 보여야 한다. 대신들의 날카로운 의견도 받아들여야 한다. 심지어 그의 체면을 완전히 깍아버리는 반대의견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무제가 전혀 원치 않는 일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요순우탕의 컴플렉스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양면파 수단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정직한 대신들의 비판에 대하여 그는 받아들이고 찬양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바꾼 적은 전혀 없다.

 

한무제는 수렵의 편의를 위하여, 태중대부 오구수왕에게 아성의 이남, 주의 동쪽, 의춘의 서쪽에 있는 수백킬로미터의 땅을 황실의 상림원으로 만든다. 동방삭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하는 것은 위로는 국가의 쓸 것이 부족하게 되고, 아래로는 농잠의 업을 빼앗는 것이 된다. 어리고 약한 자들은 옛땅을 그리워할 것이고, 노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역사상 혼군들이 토목공사를 대거 일으켰던 사례를 든다. "은나라는 구시의 궁궐을 만들어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영왕은 장화의 대를 만들어 초나라백성들이 흩어지고, 진나라는 아방의 궁전을 만들어 천하가 어지러워 졌다." 무제는 그 말을 듣고는 동방삭의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서 동방삭을 태중대부, 급사중으로 임명하고, 황금백근을 하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원래 계획대로 상림원을 건설한다. 그러나 상당히 타협했다. 즉, 기녀도 되고 열녀문도 만들고 싶은 것이다. 기실, 이것은 대부분 군왕들에게서 볼 수 있는 통병이다. 전체 25사에는 이렇게 역겨운 기괴한 냄새가 가득 차 있다.

 

무제는 일찌기 동언(董偃)이라는 남자를 총애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늘 날의 말로 하자면 동성애이다. 한무제는 동언에 대한 총애가 후궁들에 대한 총애보다 더 했다. 그에게 의관을 하사했을 뿐아니라, 존경과 애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직접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의 애칭을 부른다: 주인옹(主人翁). 하루는 한무제가 선실에 술을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동주인옹과 함께 마셨다. 동방삭이 진언을 해서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언은 죽일 놈이라고 직언한다. 한무제는 아무 말도 않고 한참을 있다가 동방삭에게 황금 삼십근을 내린다. 뒤로는 사람을 시켜 동주인옹에게 북궁으로 오게 하여 술을 마셨다.

 

역사상의 잔인무도한 혼군과 비교하면, 한무제는 그들보다 훨씬 세다. 그는 결국 요순우탕의 문치무공을 이루고 싶어서 약간 조심했을 뿐이다. 양면파의 수단을 썼을 뿐이다. 잔인무도한 혼군이었다면, 재상조차도 끌어내서 목을 벴을 것이다. 하물며 계속 흥을 깨는 농신이야. 그러나, 잔인무도한 혼군보다 낫다고 하여 반드시 영명한 군주인 것은 아니다. 바모보다 학문이 뛰어나다고 하여 반드시 총명한 사람은 아닌 것과 같다. 이것은 보편적인 상식이다. 최소한, 그의 조부 및 부친과 비교하면 한무제는 한참 부족하다.

 

역대군왕은 체제가 그들에게 독재권력을 부여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항상 남자로서 바라마지않는 지고무상의 권력과 구름처럼 가득한 미녀들을 누릴 수 있다. 온세상의 땅이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는 정복자와 통치자의 허영을 맛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한무제는 자연히 얻었다. 사람은 항상 이상과 목표가 있어야 살아갈 동력과 이유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한무제는 이 모든 인간세상의 지극한 부귀영화를 얻은 후, 또 어떤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살아갈 동력으로 삼았을까?

 

확실히 그것은 어떻게 해야 장생불로할 수 있을까? 영원히 천하의 부귀영화를 혼자서 다 누릴 수 있을까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무제는 진시황과 너무나 닮았다.

 

앞에서 필자는 얘기한 바 있다. 한무제는 시인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이라고, 이것은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 아니다. 충분한 근거가 있다. 서한 이백년간 남겨진 시가는 겨우 이십여수인데, 그중 한무제가 남긴 것이 다섯 수이다. 한무제가 일찌기 쓴 시작에는 <과자가2수>가 있고, 만년에는 <추풍사>가 있다. <추풍사>는 부귀가 오래갈 수 없고, 인생이 끝나기 직전의 우울함이 배어 있다.

 

이런 심리상태하에서 한무제는 장생불로지술을 구한다. 놀라운 점은 한무제에 의하여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궁형보다 훨씬 컸던 사마천이 그의 위대한 저작 <사기>에서 한무제에 대하여 전기를 쓰면서, 한무제의 전쟁에 관한 무공이나 문치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적지 않는다. 모조리 한무제가 어떻게 봉선하고 어떻게 신선을 구했는지만 기록한다.

 

한무제가 가장 믿었던 방사는 이소군(李少君)이다. 이 자는 장신농귀에 재주가 있었다. 그는 사실상 3,4십세에 불과했는데, 스스로 이미 칠십세라고 말한다. 어쨌든 당시는 신분증과 같은 증명서가 없어서, 사람들은 그의 헛소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소군은 "사물각로(使物却老)"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엉터리 이론으로 제후들 사이를 오가면서 제후들로부터 금은재물을 편취했다. 시정의 백성들이 보기에는 아무 일도 안하면서 부유하게 살고 있으니, 그가 정말 재주가 있다고 느낀다. 그외에 이 자는 잔머리를 잘 굴렸다. 한번은 그가 무안후의 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자리에 구십여세된 노인이 있었다. 이소군은 자신이 이 노인의 숙부와 함께 사냥을 간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인 장소까지 언급한다. 이 노인은 어렸을 때 확실히 이소군이 말한 곳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란다.

 

한무제는 이런 기이한 일들을 듣고 난 후, 급히 이소군을 입궁하도록 한다. 이소군은 한무제에게 허풍을 떤다. 자신은 일찌기 해상에서 놀았는데, 신선 안기생(安期生)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안기생은 그에게 대추를 주었는데, 대추가 수박만큼 컸다고 한다. 이런 헛소리를 한무제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속히 방사 양범을 대해로 보내어 달선산으로 가게 한다. 신선으로부터 불사약을 얻어오라는 것이다. 신선의 불사약을 구하기 전에 그는 계속하여 방사들이 만든 단사를 먹는다.

 

이소군이 죽은 후에도, 한무제는 그가 죽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는 신선이 된 것이라고 믿었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들이 본받는 법이다. 얼마후, 소옹(少翁)이라는 방사가 다시 한무제의 좌상객이 된다. 이 자는 이소군만큼 사기술이 뛰어나지 못했다(아마도 이소군이 한무제를 속인지 얼마되지 않아 죽은 것도 관련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각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무제는 소옹을 문성장군에 봉한다. 그에게 신선을 찾아달라고 한다. 아무리 찾아다녀도 신선을 데려오지 못한다. 아마도 한무제도 의심이 들었나보다. 문성장군은 비단에 그자를 가득 쓴다. 그리고 풀에 넣어두어 소로 하여금 먹게 한다. 그후에 한무제에게 예언을 한다. 소의 배에 천서가 있으니, 죽여서 보라고. 과연 소를 죽이니 뱃속에서 비단이 나왔다. 비단의 글자는 아주 기괴했다. 한무제는 의심이 든다. 그 백서를 신하들에게 돌려서 보게 한다. 신하들 중에서 그 필적이 문성장군의 것이라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 있었다. 한무제도 개략 자신이 깊이 믿었던 방사에게 속았다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어서 조용히 문성장군을 죽여버리고 만다.

 

문성을 죽인 후, 무제는 신선과의 연락원인 방사들에 대한 믿음을 잃는다. 그리고 크게 후회한다. 낙성후는 황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서, 무제에게 난대(欒大)를 추천한다. 이 란대는 잘 생겼고, 큰 소리를 잘 친다. 거짓말도 꼭 진짜처럼 한다. 그 자신조차 진실이라고 믿을 정도이다. 그는 한무제에게 말한다. 그가 바다를 오갈 때, 여러번 안기생등 신선을 보았는데, 그의 지위가 낮아서 신선들이 믿어주지 않았다. 신선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황금도 만들 수 있고, 강물도 막을 수있다. 불사약도 얻을 수 있다. 신선도 될 수 있다." 한무제는 자연히 기뻐한다. 이때 난대는 아마도 문성의 최후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은 문성을 본받을까 두렵습니다. 방사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다시 방술을 얘기하겠습니까" 한무제는 난감해진다. 그래서 문성은 말간을 잘못먹어서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게 정말 불사약을 구해준다면 너를 총애할 것이라고 말한다.

 

난다의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무제는 그대로 믿었다. 그 자리에서 그를 오리장군에 명한다. 그리고 위장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낸다. 난다는 성은에도 불구하고 몇년간 찾아다녔지만, 어디에서 불사약을 찾겠는가? 마지막에는 결국 한무제에게 목이 잘린다.

 

이치래도라면 방사들에게 여러번 사기를 당하였으면, 어린아이라도 지혜가 늘 것아닌가? 다시 말해서 만일 정말 불사약이 있다면, 한무제에게까지 순서가 돌아올 것인가? 진시황도 구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다만 한무제는 백분의 0.1의 희망이 있다면, 그는 백분의 99.9의 노력을 쏟는다. 그는 평생동안 신선을 구하고 봉선을 했다. 이것이 그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심지어 그가 죽기 전의 1년간 그는 동해로 가서 신선을 보고싶어했다. 불사약을 얻고 싶어한 것이다. 그러나, 동해는 망망대해이고 풍랑이 인다. 신선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한무제는 그저 우울하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서 모친을 죽인다.

 

한무제의 병세가 점차 악화되자, 그는 마침내 세상에 신선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천자이지만, 죽을 운명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부득이 사후의 일을 고려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장생불로하여 천하를 계속 통치할 수 없으니, 자신의 후손이 천하의 주인으로 계속 앉아있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이리저리 생각해본 다음 그는 유불릉을 태자로 세우기로 한다. 유불릉은 당시 7살이었다. 아주 활발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한무제는 한나라초기의 여후 이야기를 생각한다. 마음 속에 놀라움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결정한다. 유불릉을 태자로 올리는 동시에, 유불릉의 생모인 그가 만년에 가장 총애했던 구익부인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한무제는 원래 정이 많은 사람이다. 8,9세때 그는 사촌누나, 즉 나중의 황후에게 그가 어른이 된 후에 황금으로 지은 집에 살게해주겠다고 약속한다(金屋藏嬌). 그러나 여인이 그의 강산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들면, 그 여인은 죽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가 구익부인을 죽인 광경에 대하여 사마광은 이렇게 적었다: "며칠 후, 황제는 구익부인을 질책한다. 부인은 비녀와 귀거리를 떼내서 머리를 박으며 용서를 구했다. 황제는 말했다: "끌고가라. 감옥에 가두어라." 구익부인이 다시 돌아본다. 황제가 말한다: "빨리 가라. 너는 살 수 없다." 마침내 죽인다. 얼마후 황제가 조용히 있을 때 좌우에 묻는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좌우가 대답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 아들을 태자로 삼으면서 그 모친을 죽이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 어린아이나 어리석은 자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국가가 혼란에 처한 것은 군주가 어리고 그 모친이 한창 나이였기 때문이다. 여자가 혼 자서 있으면 음란하고 자기마음대로 한다. 그것을 금할 수가 없다. 너는 여후를 들어보지 못했는가? 없애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웅재대략의 일대영주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는 비로소 확연히 깨달아진다. 독재와 전제체제하에서는 군주가 위세있고 굳센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종이한장보다도 취약하다. 아름다운 구익부인은 억울하게 죽었다. 그녀는 두려우면서도 존경하고 가까이할 수는 없지만 사랑했던 남편의 손에 죽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한무제가 그녀를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을 때, 그녀의 섬약한 몸이 거친 무사들에 의하여 감옥으로 끌려갈 때, 그녀가 놀라고 두려운 와중에 힘없이 한무제를 되돌아본 그 눈은 얼마나 처량하고 차가웠을까?

 

여후가 될지도 모르는 여인을 죽이고 태자를 세운다. 천하에는 불사약이 없다. 무제는 이제 죽을 수있다. 무제가 죽더라도 그가 살아서 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역대제왕의 모범이 될 것이다. 천년이래로 그는 영웅과 영명한 군주의 신분으로 후세인들의 기억에 살아있었다. 다만,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무제시대에 살았던 사람드은 분명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한무제의 문치무공은 바로 무수한 개미같은 백성들의 생명과 행복을 댓가로 희생하고 얻은 것이다. 문제와 경제의 통치시기에 천하는 큰 일이 없었다. 황제도 무제처럼 영웅의 꿈이나 시인의 기운이 없었다. 역사는 그래서 평범하고 재미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평화롭고 안정되게 살았다.

 

역사에 평범하고 재미없게 쓰여진 시대의 백성들은 행복했다.

영웅의 꿈과 시인의 기운이 없는 제왕이 통치한 백성들은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