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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한무제: 진시황보다 장생불사를 추구한 황제

by 중은우시 2014. 3. 2.

글: 소랑(小浪)3 

 

모택동은 유명한 <심원춘.설>의 후반부에 이런 내용이 있다: "강산여차다교(江山如此多嬌), 인무수영웅경절요(引無數英雄竟折腰), 석진황한무(惜秦皇漢武), 약수문채(略輸文采), 당종송조(唐宗宋祖), 초손풍소(稍遜風騷).....구왕의(俱往矣), 수풍류인물(數風流人物), 환간금조(還看今朝)" 모택동은 지도자로서의 넓은 흉금 속에 먼저 생각한 영웅인물은 역시 진시황, 한무제이다. 이것은 모택동이 진시황과 한무제를 중국역사상 나란히 언급할만한 영웅이라고 여겼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지 문채가 좀 모자랐다고 여겼다. 즉 이 두 명의 황재는 문학적인 재능은 별로였다는 말이다. 그들은 역사조건의 제한과 봉건통치계급의 국한성으로 오늘날의 '풍류인물'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보았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반세기가량 차이를 두고 나타났다. 진시황은 처음으로 황제를 칭한 천고일제이다. 한무제는 역사상 집권기간이 가장 길고, 역사문화적으로 진귀한 재산을 풍부하게 남긴 정치가이다. 심지어 한무제를 '일대위인"과 "천고명군"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봉건제왕은 모두 현대인들처럼 생사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방사를 미신했고, 장생불로를 추구했다. 한무제는 장생불로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진시황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후세인들에게 여러가지 우매하고 조롱받을 이야기를 남긴다. 이 측면에서 현대의 '풍류인물'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기원전219년, 진시황은 동방의 제나라 옛땅을 순행하고, 현지의 한 방사 서불(일명 서복)을 만난다. 그는 진시황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사기꾼의 기량을 선보여 글을 하나 올린다. 거기에는 동해에 봉래, 방장, 영주라는 3개의 선산(仙山)이 있는데, 산에는 신선이 살고 있고, 장생불로의 선약을 구할 수 있다는고 한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자 뜻밖의 말에 기뻐하며, 거금을 들여 서불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수천의 동남동녀를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서 선산을 찾는다. 그리고 신선에게 장생불로약을 얻고자 한다. 단지 서불은 심계가 있어서, 이 수천의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장 동쪽의 섬으로 가서, 그곳에서 살게 하고 후손을 낳게 한다. 나중에는 하나의 국가로 발전한다. 서불은 9년후에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진시황의 앞에서 사기를 친다. 말솜씨를 드러내어 무슨 봉래의 선약을 원래 얻을 수 있었는데, 바다 속의 거대한 교어(鮫魚)가 파도를 일으키고 바람을 불게 하여 배를 섬에 댈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시황에게 활을 잘 쏘는 사람을 한 명 주면 데려가서 먼저 교어를 죽이고, 선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진시황은 그의 말을 진실로 여겨, 즉시 서불과 궁사를 보낸다. 그후 진시황은 자신도 가마를 타고 따라가서 함께 그 교어를 죽이고자 한다. 진시황은 장생불사약을 얻지 못했을 뿐아니라, 서불은 배를 터고 멀리 봉래산으로 떠난다.

 

누가 알았으랴. 이 세상에는 무슨 장생불사약이라는게 아예 엾다는 것을. 장생불로를 집요하게 추구하던 진시황도 마지막에는 죽을 때 할 수 없이 진이세에게 황위를 넘겨주어야 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한무제도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장생불로를 추구하는데 열중했고, 진시황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다.

 

한무제는 즉위한 다음 해, 친히 한 강호의 사기꾼을 접견한다. 이 소위 방사의 이름은 이소군(李少君)이다. 나이는 3,4십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70의 고령이라고 거짓말한다. 그리고 한무제의 앞에서 큰소리를 친다. 자신이 어떻게 신선에게 제사지내는지, 연단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으며 그 약을 먹으면 사람이 장생불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루는, 한무제가 백관의 앞에서, 오래된 동기(銅器)를 꺼내서는 이소군에게 묻는다: "너는 이 동기가 어느 연대의 것이며 누가 가지고 있던 것인지 말해줄 수 있는가?" 이소군은 그것을 보고 난 후, 일부러 놀라는 척하면서 말한다. "이 동기는 일찌기 전국시대 제환공10년에 내가 본 적이 있습니다.그것은 제나라 군주의 백침대(柏寢臺) 위에 놓여 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급히 동기에 쓰여있는 글자를 살펴본다. 과연 맞았다. 이소군이 말한 것 그대로였다. 이렇게 되자 궁정이 모두 깜짝 놀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소군은 정말 신선이다. 지금 이미 나이가 수백살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무제는 이소군이 연단을 하여 장생불로약을 만들 줄 안다고 믿었을 뿐아니라, 친히 그에게 높은 관직과 많은 녹봉을 준다. 그리고 이소군이 병사한 후에는 이소군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서 진정한 신선이 되었다고 믿는다.

 

이소군이 죽은 후, 동장의 땅에서 다시 이소옹(李少翁)이라는 자가 온다. 그는 스스로 귀신을 부를 수 있다고 말하고, 선단을 만드는 방술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한무제는 즉시 이소옹을 만난다. 당시에는 마침 한무제의 한 부인이 막 죽었을 때이다. 그는 그 부인의 미모를 그리워하고 있어, 이소옹에게 어떻게 하면 그가 부인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를 물어본다. 이소옹은 말한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나는 방술을 이용하여 깊은 밤에 그녀를 오게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꿈 속에 만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날 밤에 한무제는 꿈 속에서 부인을 만난다. 그리고 즉시 이소옹을 문성장군에 봉하고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을 내린다.

 

단지 1년여가 지난 후, 이소옹의 방술은 전혀 효험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래서 한무제는 아주 실망한다. 그래서 이소옹은 마음 속으로 하나의 계책을 생각해낸다. 몰래 비단에 글을 쓰고는 소에게 삼키게 한다. 자신은 그것을 모르는 척하고는 얼마후 여러 사람의 앞에서, 소의 뱃속에 기이한 물건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방술로 이를 알아냈다고 말한다. 결과 소를 죽이고, 뱃 속에서 비단에 쓴 글이 나타난다. 단지 한무제는 이번에 믿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히 조작이라고 말하고, 글을 쓴 자는 이소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소옹을 죽여버린다.

 

4,5년이 지난 후, 교동왕의 왕후는 한무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교동왕 수하의 하급관리 난대(欒大)를 보낸다. 그는 장안으로 가서 한무제에게 비방을 바친다. 한무제는 난대를 접견한다. 그는 허풍을 잘 쳤다: "나는 원래 이 바다에서 오가면서 많은 신선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장생불로의 비방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황상이 허락해주시면, 나는 황상의 이름으로 많은 돈을 주고 그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리하여 황상에게 약을 만들어 바치게 하겠습니다." 이때, 한무제는 황하의 제방이 붕괴되어 많은 백성이 죽은 일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난대의 의견을 받아들이다. 이 난대는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건장했으며 말을 잘 했다. 사기술이 아주 고명했다.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을 받았을 뿐아니라, 한무제는 자신의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한다.

 

개략 기원전100년을 전후하여, 한무제는 제나라의 옛땅을 순시한다. 이곳의 방사와 신선, 선약을 얘기하는 사람은 수만명이 이르렀다. 그러나 한 명도 장생불사를 확인시켜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한무제는 여전히 꿈에서 깨어나지를 못했다. 바다 위에서 그는 제례를 거행하여 천주(天主), 지주(地主), 인주(人主), 음주(陰主), 양주(陽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의 8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배를 타고 봉래도에 도착했을 때, 한 대신이 그는 몇 장이나 되는 큰 키의 사람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거인은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또 한 명의 신하가 말한다. 그도 한 노인이 개 한 마리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고, 막 황상에게 얘기하려는데, 순식간에 그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무제를 포함하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가 바로 봉래신선이다" 그후 한무제는 수천명의 사람을 보내어 선약을 구한다. 그러나 하나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한무제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