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한무제(漢武帝)와 금옥장교(金屋藏嬌)

중은우시 2009. 5. 21. 20:21

글: 정정(丁丁)

 

금옥장교(金屋藏嬌)의 뜻은 중국에서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금옥장교의 이야기를 아는 경우는 많지 않다. 주로 중국문인들 특히 풍류를 좋아하는 문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왔고, 이러한 류의 사랑이야기에 대하여 말하기를 즐겨했고, 이를 제목으로 시를 짓고, 사를 지었다. 그리하여 평범한 이야기가 화려하게 치장하고 기복이 있는 이야기로 바뀌어 버렸다. 당나라때의 시인인 이백은 <<원정>>이라는 시에서: 청간진후황금옥, 적적주렴생망사(請看陳后黃金屋, 寂寂珠簾生網絲)라고 하였고, 백거이는 <<속고시>>에서: 세모망한궁, 수재황금옥(歲暮望漢宮, 誰在黃金屋)이라고 하였다. 당연히 적지 않은 다른 시인들도 이러한 류의 시를 썼다.

 

그렇다면, 금옥장교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인가? 왜 천백년이래로 수많은 문인학사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는가? 사실, 금옥장교의 이야기는 한무제에게서 유래하고 지금으로부터 이미 이천년이 되었다.

 

금옥장교의 "교"는 원래 한무제 유철의 첫번째 황후인 진아교(陳阿嬌)를 가리킨다. 아교의 모친은 관도장공주인데 바로 한문제(漢文帝) 유항의 딸인 유표(劉)이다. 유표는 나중에 당읍후 진오(陳午)에게 시집가는데,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했다. 그리고 장상명주이며 총명하고 교만하며 성격이 제맘대로인 이 딸 진아교를 낳게 된다.

 

유표와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啓)는 오누이간이다. 유철(한무제)는 한경제 유계의 아홉째 아들이므로, 유표는 한무제의 친고모가 된다. 그러므로 유철과 진아교는 고종사촌관계이다.

 

어렸을 때, 유철은 잘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했다. 유년기의 유철은 자주 고모인 관도장공주의 집에 가서 놀았다. 사촌누나인 아교를 좋아했고, 두 사람은 자주 같이 놀았다. 아교는 아주 예뻤다. 유철은 7살이 되기도 전에 교동왕에 봉해지는데, 왕에 봉해진 후에는 더 많이 고모집에 가서 사촌인 아교와 어울렸다.

 

한번은 관도장공주 유표가 소년 교동왕 유철을 안고, 그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후 유철에게 물었다: "너는 부인을 갖고 싶으냐?" 그러자 유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도장공주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부인을 갖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웃으면서 좌우의 시녀 100여명을 유철에게 가리키면서 골라보라고 말하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를 손북처럼 흔들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관도장공주는 마음 속으로 그를 더욱 좋아하게 된다. 100여명의 시녀가 다 필요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기의 딸 아교인 것이다. 관도장공주는 아교를 가리키며 유철에게 물었다: "아교는 어떠냐?" 그러자 유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도장공주는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가 이렇게 마음씀이 깊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아교를 점찍었다니. 관도장공주는 흥미를 느끼고 다시 유철에게 물었다: "아교가 좋으냐?" 그러자 유철은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유철은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만일 아교를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으면, 나는 반드시 황금으로 집을 지어서 아교를 거기에 살게 할 거예요."

 

관도장공주는 그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웃었다. 기뻐진 관도장공주는 바로 유철의 모친 왕부인을 찾았고,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달리 총명한 왕부인은 그 자리에서 이 혼사를 성사시킨다. 양가는 이렇게 정혼을 하게 된다. 자녀들이 결혼하게 되자 자연히 한집안사람이 된다. 한경제 유계와 관계가 좋았던 관도장공주는 당연히 미래의 사위인 유철을 위하여 좋은 말들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라비인 유계와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바로 유철을 언급하며 총명하다고 칭찬했다. 이렇게 하여 유철은 유계의 관심을 끌게 되고 여러번 관찰을 받게 된다. 유계는 이 아홉째 아들이 확실히 용봉의 자질을 갖추고 있고, 키울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한경제는 여러 아들중 유철을 특히 마음에 둔다. 그리고 유철이 7살때 태자로 세우게 된다. 유철은 14살때 태자의 신분으로 14살인 아교를 처로 맞이하니, 아교는 태자비가 된다. 유철은 16살에 황제에 등극하고 아교는 황후가 된다.

 

그러나, 아교는 어려서부터 걱정없지 자라고 유복하게 생활해왔었다.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응석을 부리는게 습관화 되었따. 무슨 걱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는 것도 몰랐다. 황후가 된 후에, 아교는 여전히 한무제 유철의 총애를 받는다. 아교는 아름답기 그지없고 애교가 뛰어났다. 한무제는 아교에게 푹 빠져 있었는데,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두려워했다.

 

제멋대로하는 성격의 아교는 인생을 즐겼고, 매일 한무제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함께 후궁에서 놀았다. 즐거운 생활은 빠르게 흘러갔다. 10년이 흘렀다. 이 10년간 온갖 향락은 다 누렸다. 그런데, 이 10년간 아교는 임신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아직도 시간은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하물며 한무제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모친이 잘 말해서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무제 유철은 큰 뜻을 품은 사람이었다. 금방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을 싫어했고, 그는 아교는 여전히 좋아했지만, 그의 감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는 이전에 그의 마음을 빼앗았던 진아교도 그저 성격이 제멋대로인 귀족여자에 불과했다. 어떤 때에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편하지가 않았고 심지어 어떤 때는 싫증이 나기도 했다. 정력이 왕성했던 한무제는 적막함을 느꼈고, 다른 여인을 찾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이 끝난 후 발걸음이 배회하기 시작하고, 점차 아교의 침궁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때, 침어낙안의 위자부가 나타난다. 한무제는 마치 음침한 생활에 찬란한 햇살이 비친 것같았다. 유철의 적막한 심리는 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충만했다. 고독한 마음이 마침내 의지할 곳을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유철은 하루하루 아교를 떠나고, 하루하루 위자부에 가까워졌다. 아교가 이런 변화를 느꼈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버렸다.

 

아교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자신이 임신을 하지 못한 것은 국가사직이 걸린 큰 문제였고,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따. 그리하여 아교는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회임하고자 했다. 의사도 찾고, 약도 먹고, 점도 치고, 신에게 기도도 했따. 모든 방법은 다 써보았지만, 그래도 배는 불러오지 않았다. 아교는 절망하기 시작했다. 특히 위자부는 연속으로 세번이나 임신을 했다. 그러나, 위자부가 아무리 예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가녀(歌女)에 불과했다. 이런 미천한 가녀가 황후의 총애를 빼앗아가다니. 황후인 아교로서는 용서가 되지 않았다. 아교의 모친인 관도장공주와 한무제의 모친인 왕태후도 모두 그녀를 위해서 불평을 했고, 공동으로 위자부에 대응했다.

 

그러나 위자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무제도 사랑에 미쳤다. 한무제는 위자부가 절색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그녀를 떠날 수가 없었따. 그리고 위자부가 3명의 공주를 낳은 후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 한무제는 더욱 기뻤다. 아들에게 유거(劉據)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오래지 않아 태자로 봉한다.

 

유철은 위자부를 사랑하면서 다른 미녀에게 사랑이 옮아가자, 다른 미녀에게는 더욱 열정적이며, 더욱 아끼고, 더욱 신경쓰고, 더욱 사랑했다. 그러나, 황후 아교는 더욱 고통스럽고, 더욱 상처받고, 더욱 적막했으며, 더욱 씁쓸했다. 아교는 다른 총애를 얻었다가 잃은 여인들보다 마음이 아팠다. 왜냐하면 한무제는 그녀가 어려서부터 같이 놀았고, 그녀가 계속하여 믿고 신뢰하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유철이 그녀를 떠난 것은 그녀의 동년기의 순진함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아름답고 천진난만했던 감정을 배신하는 것이었따. 아교는 유철을 가진 적이 있었고, 다른 여인들이 갖지 못한 즐거움을 누렸었다. 마치 순삭간에 십년간 쌓아왔던 오새찬란한 황금집이 무너진 것같았다. 아교의 마음은 칼에 꽂힌 것처럼 소리없이 핏방울을 흘렸다.

 

입맛이 없는 아교는 다른 궁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더더욱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마지막이 어느 날이었는지도 기억이 희미하게 유철의 모습이 그녀의 궁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다보면서 궁문의 동정을 살폈고, 유철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교는 기나긴 밤을 홀로 지내면서 눈을 붉어지고 눈가는 검어졌고, 얼굴색은 창백해졌고, 용안은 초췌해졌다. 이때, 초복(楚服)이라고 부르는 무당이 황후의 침궁으로 찾아온다. 제정신이 아닌 황후는 물애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초복이 가르쳐준 방법을 그대로 시행한다. 작은 포인(布人)을 만들고 작은 포인을 위자부라 칭하며 매일 바늘로 위자부를 찔렀다.

 

한나라궁중에서는 절대로 무고비술(巫蠱秘術)을 금지했다. 황후 아교의 이러한 행동은 궁녀들에 발각되어 고발당한다. 한무제는 대노하여, 당시의 형률대로라면 참해야 하지만, 한무제는 옛정을 생각하여, 황후의 인새(印璽)를 거두고, 황후를 폐위시킨다. 아교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장문궁(長門宮)으로 들어간다. 장문궁은 아주 구석진 곳에 있고, 곳곳에 황폐한 풀이 가득했다. 황궁에서 떨어진 장문궁은 색칠도 벗겨지고, 낡고 썩은 냄새가 났다. 아교는 이곳으로 들어갔다. 눈물이 흐르는 적막한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아교는 이렇게 유철에게서 멀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철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했고, 옛정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녀는 한무제가 부(賦)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당시의 유명문인 사마상여를 초청하여 부를 짓게 한다. 사마상여는 눈앞의 이 여인에게 감동하여 붓을 들어 천고에 유명한 <<장문부(長門賦)>>를 쓴다.

 

눈물에 뒤범벅이 된 여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글을 읽고 한무제는 크게 칭찬한다. 그러나, 부에 나오는 여인의 감정도 한무제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한무제는 여전히 장문궁을 내팽개쳐두었고, 아교를 기억해내지 않았고, 마음을 되돌리지도 않았다. 아교는 마음이 재처럼 사그러들었다.

 

장문원부(長門怨婦)의 치정(痴情)은 한무제의 영웅심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이후의 문인들의 마음은 움직였다. 문인들은 붓을 들어, 글을 쓰면서 장문사(長門事), 장문읍(長門泣), 장문폐(長門閉)등을 읊었는데, 이는 모두 총애를 잃고, 사랑을 잃은 것의 대명사였다.

 

지금의 금옥장교는 축첩의 대명사로 뜻이 바뀌었다. 그러나 결말은 비슷하다. 결말은 모두 비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