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체(阿杕)
이천여년전 한문제(漢文帝)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의 수도 장안의 부근에 장릉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에는 아주 보통사람이 하나 살고 있었는데, 성이 김(金)이었다. 김씨집안에 남자가 하나 있는데, 김왕손(金王孫)이라고 했다. 그는 금방 혼인을 하였는데, 왕(王)씨성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녀는 아주 아름답고 온유하며 싹싹했다. 그러면서도 심계가 깊은 스타일이었다.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그들 사이에 딸을 하나 낳는다. 사랑의 결정까지 생기자, 앞날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당시의 사회환경은 중국역사상 유명한 "문경지치(文景之治)"의 태평성대였다. 그러한 시대에 살 수 있다는 것은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연분이다.
그러나, 어느날, 김왕손의 장모가 돌연 찾아온다. 일반적으로, 장모가 딸과 사위의 집에 찾아오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김왕손에게 있어서 이번 방문은 청천벽력이었다. 그의 가정은 이로 인하여 산산조각이 난다. 이뿐 아니라, 이번 방문은 중국의 역사의 수레바퀴도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된다.
김왕손의 장모는 성이 장(臧)이므로, 장부인이라고 하자. 장부인은 총명하면서도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활상태에 대하여 불만이 컸고, 수시로 부귀해지는 방법을 생각했다. 사실 그녀의 집안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괜찮은 편이고 잘사는 편이었다.
장부인은 원래 개가를 한 사람이다. 이전의 남편은 왕중(王仲)이라는 사람인데, 장부인은 왕중과의 사이에 딸을 둘 낳는다. 왕중이 사망한 후 장부인은 전(田)씨집안으로 시집을 오고, 다시 전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는다. 김왕손에게 시집간 왕씨아가씨는 바로 장부인이 이전 남편인 왕중과의 사이에 낳은 장녀이다.
한 가정에서, 아들의 부귀는 통상적으로 그 집안배경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통상적으로 그 가정을 기반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은 완전히 다르다.왕후장상에게 시집갈 수도 있다. 집안이 비슷하지 않으므로, 왕후장상에게 시집갈 때는 정실이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일은 사람하기 나름이다. 천자왕후장상의 집안에는 변수가 많은 법이다. 기회도 많은 법이다.
그래서, 장부인은 자신의 두 딸에게 큰 희망을 건다. 자신의 두 딸에 대하여 점을 쳐보는데, 점쟁이는 그녀들이 모두 크게 부귀할 운명이라고 얘기해준다. 그렇다면 딸들의 이런 운명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장부인은 온갖 궁리를 해서,자신의 둘째딸을 당시 태자의 궁으로 들여보낸다.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우리로서는 현재 알 도리가 없다.
둘째딸은 해결되었다. 이제는 큰 딸이다. 김왕손의 집에서 계속 살게 되면, 점을 봐서 나온 그런 앞날이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아예 딸과 사위를 이혼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장부인이 딸과 사위의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들을 이혼하게 하려면 먼저 딸인 왕씨아가씨의 마음부터 바꾸어야 한다. 왕씨아가씨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쨌든 딸을 낳고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장부인의 온갖 설득과 유혹에 넘어가서 모녀는 이혼하기로 결심한다. 김왕손은 당연히 동의하지 않았다. 시집간 딸은 뿌려버린 물과 같다.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장부인은 어렵다고 포기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억지로 딸을 데려다가 감추어 버렸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를 한 글자로 표현했다: 탈(奪). 아주 생동감있게 묘사한 말이다.
김씨집안은 당연히 가만있지 않았다. 도처를 찾아다니면서 며느리를 되찾아오려고 했다. 장부인은 딸을 계속 숨겨두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숨겨둘 수는 있지만, 영원히 숨겨둘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찌할 것인가? 김씨집안이 감히 찾아가서 내놓으라고 할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 했다. 장부인은 생각을 하다가 아예 큰딸도 태자궁으로 들여보내기로 한다. 당연히 힘이야 든다. 태자궁이 어디 들여보내고 싶다고 들여보낼 수 있는 곳이던가. 그래도 장부인은 둘째딸도 들여보낸 경험이 있어서, 큰딸도 태자궁으로 결국 들여보낸다.
사람은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 왕씨가 태자궁에 들어간 후에 정말 태자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그녀의 과거를 태자가 알았을까? 어떤 사람은 분명히 몰랐을 것이라고 한다. 처녀가 아니면서 태자를 속이면 그것은 큰 죄이다. 그러나 역사상의 일은 어떤 때는 정말 뭐라고 말하기 힘들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태자가 그녀의 과거를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렇지 않았다면 김씨를 그렇게 쉽게 쫓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자식까지 낳은 여인이 어떻게 처녀로 위장할 수 있단 말인가? 서한의 당시 사람들이 재혼인지 아닌지에 그다지 신경을 썼는지 아닌지를 현대인의 기준으로 농단하는 것도 옳지 않다. 게다가 그녀는 정실부인이 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왕씨는 아주 능력이 있었다. 태자와의 사이에 금방 딸을 셋 낳고, 아들을 하나 낳는다.
이때 청사에 이름을 남긴 한문제가 죽는다. 태자가 이어받아 황위에 오르니 바로 한경제(漢景帝)이다. 이미 왕미인(王美人)의 봉호를 받은 왕씨는 순조롭게 사내아이를 낳는다. 이 남자아이가 바로 진시황과 나란히 거론되는 한무제(漢武帝)이다. 왕미인의 세 딸은 각각 평양(平陽), 임려(林慮), 남궁(南宮)의 세 공주이다. 왕미인은 나중에 한경제의 왕황후가 되고, 한무제때는 왕태후가 된다.
왕태후와 김씨 사이에 낳은 딸은 한경제가 죽은 후에 이미 성년이 된 한무제가 찾아서 궁으로 부른다. 그리고는 동모이부(同母異父)의 누이에게 많은 재물을 내린다. 왕태후는 '황상에게 돈을 많이 쓰게 했다'고 말하면서 행복해 했다.
장부인이 일으킨 이혼사건은 직접적으로 한무제의 탄생을 가져오고, 중국역사의 방향에 영향을 주었다. 이 장부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큰 박력이 있었던가?
그녀의 선조도 보통사람은 아니었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제후를 봉할 때, 연왕(燕王) 장도(臧荼)라는 사람이 있었다. 초한전쟁때, 이 연왕은 한때는 유방의 편에 섰다가, 한때는 항우의 편에 서기도 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그러나, 한신이 조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는 바로 유방에 귀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유방의 중앙정부가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초한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나, 초한전쟁이 끝나고, 유방이 황제로 등극한 후에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연왕 장도는 금방 반란을 일으키나, 바로 진압당한다. 그래도 그에게는 후손이 있었고,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한무제의 외조모인 장부인은 바로 이 장도의 손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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