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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한무제는 왜 황태자의 모친을 죽였는가?

by 중은우시 2010. 8. 24.

글: 왕립군(王立群)

 

파벌간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제국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중요한 일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균형은 가장 취약한 형태이기도 하다. 아주 쉽게 깨어질 수 있다. 일단 균형이 깨지면, 제국정권의 안정성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균형파괴는 균형을 이루던 한 파벌이 특정한 역사조건하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기형적으로 성장한 모 파벌이 다른 파벌들을 초월하여 다른 파벌을 압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른 파벌은 그저 한동안 약세상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기다려 반격을 도모하거나, 연합을 도모하여 기형성장한 그 파벌을 견제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균형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먼저 서한 초기의 여씨외척이 주살된 후의 정국을 살펴보자.

 

여후(呂后)가 사망한 후 2달만에, 여씨종족은 멸문당한다. 조정의 3 파벌중 외척파가 전멸을 당해버린 것이다. 황족파의 핵심은 겨우 황사자(皇四子) 대왕(代王) 유항(劉恒)과 황칠자(皇七子)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남고, 황손중에서는 제왕(齊王) 유양(劉襄) 및 그의 두 동생 유장(劉章), 유흥거(劉興居)가 가장 우수했다. 여씨일족을 제거하는데 불세의 공을 세운다. 다만, 황자와 황손의 이런 특수한 상태하에서 스스로 독립하여 황위에 오를 능력은 없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면 공신파와 조정황족파가 합의를 이루어야 했다.

 

그리하여 여씨일족을 제거한 후, 서한의 중앙정부 3파균형국면은 철저히 무너지고, 공신파가 홀로 우뚝 서는 국면이 형성된다.

 

공신파의 선천적인 약점을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합법적인 황위계승권을 지닌 황자, 황손중에서 그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황위후계자로 옹립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는 의미는 공신파에 가장 우호적이고, 공신파의 이익최대화를 보장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황손중에서 유양, 유장, 유흥거는 여씨일족을 제거하는데 불세의 공을 세웠지만, 그들은 젊고 능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공신파는 유양을 감히 황제로 옹립할 생각을 못한다. 왜냐하면 그와 두 동생은 너무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황제후계자로서는 최선의 후보자였다. 그러나, 유양, 유장, 유흥거는 공신파에 의하여 배제된다. 황손중에서 이 세 사람을 배제하고 나니, 나머지 황손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후계자로 삼을 수가 없었다.

 

황자중에서는 회남왕 유장이 여후가 길렀던 인물이다. 유장이 여씨외척파를 제거한 공신파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유장도 후보에서 제외된다. 최종적으로 남은 사람은 황사자 대왕 유항이다. 이것은 떡이 굴러떨어진 격이다. 유항은 그 자신조차 천하에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유항은 주변사람들과 회의를 하고 토론을 하고, 경성에 사람을 보내어 소식도 얻어냈다. 이는 모두 갑작스러운 희소식이 너무나 돌연했기 때문이다.

 

대왕 유항은 겉모습은 착실하고, 권력욕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유방의 여덟아들 중에서 심기가 가장 깊은 인물이었다. 이 점은 부친인 유방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당시 유방이 태자 유영이 너무 유약하다고 싫어했다. 이 점에서는 사람보는 눈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방은 척부인에게 빠져 있어서, 척부인 소생인 조왕 유여의만을 총애했다. 그러다보니 황사자 유항을 황태자로 삼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 당연히 유방이 정말로 황사자 유항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다면, 여후가 한바탕 난리를 쳤을 것이다.

 

유항은 멍청한 것처럼 꾸미고, 권력도 탐하지 않고, 권력을 좋아하지도 않는 자태를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십여년을 보낸다. 여후도 속이고, 모든 대신도 속였다. 지모가 뛰어난 진평(陳平) 조차도 대왕 유항이 유방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유항은 이런 정교한 연기에 의하여 한나라의 세번째 황제 한문제(漢文帝)가 된다.

 

대왕 유항이 경성으로 가서 황제위를 받는 순간, 진평, 주발(周勃) 및 모든 대신은 알아챘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유항은 절대로 공신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바꾸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한문제 유항은 황궁에 들어가는 그날 밤에 바로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이를 통하여 황궁의 경비를 강화하고, 실제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위 주발의 군권을 박탈한다. 그후, 한문제는 주발을 배척하고 공격한다. 황족파는 다시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공신파는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문제 유항은 주발, 진평, 관영(灌嬰)의 세 공신을 차례로 재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권력은 절대적으로 한문제 유항의 손에 장악되었다. 공신파와 외척파는 모두 약세를 보인다. 한나라 중앙정부의 새로운 파벌균형이 이루어진다. 황제를 절대핵심으로 하는 국면은 한경제, 한무제때까지 지속된다.

 

한무제는 극단적인 전제군주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 그 자신은 권력의 중심이었다. 외척, 대신은 모두 발언권이 없었다. 한무제는 한무제는 위자부, 이부인들을 사랑하게 되면서 외척파가 공신파보다 권력이 컸다(물론 이때의 공신파는 이미 흘러간 역사였다). 그러나, 강대한 황권앞에서는 어느 파벌도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한무제 만년의 무고지화는 황족파들이 중대한 타격을 받는 사건이 된다. 황태자, 황태손이 모두 그의 진압하에 비명에 간다. 한무제는 임종 전에 아주 골치아픈 형국이 벌어진다.

 

이때 한무제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창읍왕(昌邑王), 연왕(燕王), 광릉왕(廣陵王) 및 어린아들 유불릉(劉弗陵)이 그들이다. 그는 앞의 세 명을 배제하고 막내아들 유불릉을 황제에 앉히고 싶어했다.

 

막내아들 유불릉은 겨우 6살이었고, 모친 구익부인(鉤弋夫人)은 20여세였다. 아들은 어리고 처는 젊다. 한무제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젠가 죽으면 유불릉이 정권을 잡는다. 그가 강산을 통치할 수 있겠는가?

 

제국의 제도에는 두 가지 치명적 약점이 있다. 하나는 군주전제이고 다른 하나는 부사자계(父死子繼)이다. 부친이 죽은 후, 아들이 아무리 어리더라도 황제위를 계승한다. 고아과모(孤兒寡母)가 권력을 장악하였을 때는 무수한 비극이 나타났다.

 

당시 한무제는 7살때부터 16살때까지 꼬박 9년동안 세상일을 모르는 어린아이에서 은위병시(恩威幷施)의 천자로 성장한다. 유불릉에게 그렇게 긴 성장기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를 보좌해줄 몇명의 신하를 찾아야 한다.

 

한무제는 어린아들 유불릉을 황태자로 앉히는 문제에 있어서, 유불릉의 모친 구익부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골치아픈 문제도 직면하게 된다.

 

<<사기.외척세가>> 저소손의 보전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한무제는 유불릉을 태자로 확정한 후 구익부인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한무제는 구익부인을 심하게 질책하고, 구익부인은 깜찍 놀라서 악세사리도 벗고는 고두사죄한다. 한무제는 전혀 용서하지 않고, 즉시 구익부인을 감옥에 넣으라고 명한다. 구익부인을 궁문으로 끌려나가면서도 계속하여 한무제를 되돌아보면서 애원한다. 한무제는 그저 차갑게 말할 뿐이었다: 너는 죽어야만 한다.

 

왜 구익부인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을까? 한무제는 이렇게 설명했다:

 

구익부인이 죽은 후 어느날, 한무제는 할일없이 지내고 있었다. 좌우의 시종들에게 묻는다. 구익부인을 죽인 일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보라. 시종은 대담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아들이 곧 태자가 될텐데, 왜 그녀를 죽여야만 했습니까? 한무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잘 모른다. 역사상 국가가 어리러워지는 것은 왕왕 황상이 너무 어리고, 모친이 한창 나이일 때이다. 젊은 태후가 홀로 깊은 궁궐에 있으니, 적막하고 교만하며 사치하고 음란한 일이 계속 발생한다.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그녀는 홀로 지내는 황태후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여후의 일을 듣지 못했는가?

 

그리하여, 한무제는 말련에 그를 위하여 자식을 낳아준 비빈은 아들을 낳았건 딸을 낳았건 모조리 사사한다.

 

이것이 바로 한무제의 '모친은 죽이고 아들은 남기는' 방식이다. 젊고 무고한 구익부인은 너무나 공포스러웠고, 너무나 잔혹했다. 다만, 곧 무덤으로 들어갈 한무제에 있어서, 이는 미래의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영명한 조치였다. 어쨌든 한나라때 제왕들에게 여후는 실제로 벗어나기 힘든 악몽이었다. 구익부인은 너무 젊었다. 황태자를 세울 때 유불릉이 8살이고, 구익부인은 기껏해야 이십여세였다. 이같이 젊은 황태후가 과부로 일생을 마치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추문이 나올지 아닐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한무제는 이유중 하나만을 말했을 뿐이다. 나머지 하나는 말하지 않았다. 구익부인을 죽인 것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사전에 곽광이 보정을 하는데 장애를 제거해준 것이다.

 

한무제는 왜 곽광으로 하여금 수석고명대신이 되도록 했을까? 곽광은 곽거병의 동부이모의 동생이다. 십여세때 입궁해서 이십여년간 한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다. 그는 조정에 둘 도없는 조심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곽광은 신하이지 군주는 아니다. 그를 위하여 조화롭고 안정된 정치환경을 조성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구익부인이 살아있으면, 곽광의 집정능력은 많이 감쇄될 것이다. 왜냐하면 구익부인은 한소제 유불릉의 모후이고, 황태후의 지위와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황제 유불릉의 바로 다음가는 권위를 지니고, 고명대신 곽광보다 높은 지위를 누린다. 이렇게 되면, 그녀가 한무제 사후의 정치중심이 될 것이다.

 

구익부인이 만일 정치에 간여한다면, 공정하게 집행하는 곽광이 구익부인과 정적이 될 것이다. 구익부인이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곽광을 반대하는 세력이 반드시 구익부인과 연합하려 할 것이다. 태후의 기치를 내걸고 궁정을 어지럽히게 될 것이다. 어느 상황이 나타나더라도, 모두 곽광의 손발을 묶는 결과가 될 것이다.

 

후원2년(기원전87년) 정월, 한무제는 막내아들 유불릉을 황태자로 삼고, 곽광,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 전천추의 5명을 보정대신으로 임명한다.

 

한무제는 조서를 내린 3일째 되는 날에 세상을 떠난다.

 

한무제가 구익부인을 죽인 것은 모후의 정치간여를 막았다. 그러나, 곽광은 보정대신의 대권을 장악해서 또 다른 우환이 된다. 곽광은 권신이고 외척이 아니다. 외척파는 한무제가 사망한 후 다시 되살아나서 신속히 성장하여 독보적인 파벌로 성장한다.

 

곽광은 한무제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책임과 힘을 다하여 한소제 유불릉을 보좌한다. 다만,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해도 바람이 그치지 않는 법이다. 동시에 명을 받은 보정대신 김일제가 1년여후에 병사한다. 상관걸은 곽광이 독보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데 불만을 품고, 연왕 유단, 한소제의 누나 개장공주와 결탁하고, 상홍양과도 손을 잡는다. 그들은 연왕 유단의 명의로 한소제에 글을 올려, 곽광이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한다. 이처럼 교묘하게 기획된 음모는 14세된 유불릉에 의하여 드러난다. 그후 상관걸, 상홍양은 정변을 통해 한소제를 몰아내고 연왕을 옹립하고자 한다. 한소제가 먼저 손을 써서, 상관걸, 상홍양등을 모조리 체포하고, 그 가족을 주살한다. 장공주, 연왕 유단은 사면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차례로 자살한다.

 

이같은 반역사건을 한소제가 친히 분쇄하자, 곽광은 이 성공하지 못한 정변의 최대수혜자가 된다. 이때 고명대신은 곽광과 전천추만 남게 된다. 전천추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조정에 나올 때도 마차를 타고 나왔다. 무슨 힘이 있어 곽광에 대항하겠는가?

 

한소제가 14살때 곽광을 무고한 음모를 알아차린 것으로 봐서 그는 총명하기 이를데 없는 인물이다. 아쉽게도 이 영명한 황제는 22세때 요절한다. 그는 자식을 두지 못했다.

 

서한제국은 다시 한번 신하가 황제를 고르는 난감한 일이 발생한다. 이때 조정의 중신은 곽광 한 사람이다. 곽광은 중신이며, 외척이다. 그는 이미 황태후가 된 외손녀를 이용하여 창읍왕 유하(劉賀)를 새로운 황제로 올린다.

 

유하는 즉위하는 날부터 아주 황당했다. 경성으로 오는 도중에 민간여자, 재산을 약취했고, 그의 속리, 가족들에게 자사의 관복을 입게 하고, 관직을 내리고 작위도 내렸다. 황제가 된 후, 유하는 창읍에서 데려온 심복들에게 모두 관직을 내린다. 유하는 아름다운 궁녀를 보면 바로 불러들였고 술을 따르게 하고 시침들게 했다. 또한 악부의 악기를 모두 가져오게 하여, 주야로 계속 연주하여 궁중의 분위기가 엉망이 된다.

 

곽광은 이런 모습을 보고, 세밀하게 기획하고 황태후의 명의를 빌어, 황제가 된지 27일밖에 되지 않은 새 황제 유하를 폐위시킨다. 그리고 민간의 한무제 증손자 유병이(劉病已. 이름을 나중에 劉詢으로 개명한다)를 불러서 황제에 앉힌다. 그가 한선제(漢宣帝)이다. 곽광은 유하, 유병이의 두 황제를 옹립했을 뿐아니라, 유하를 폐위시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조치는 아주 순조로웠다. 이는 당시 조정의 파벌이 이미 무력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곽광 1명만이 권력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런 국면은 제국제도하에서 장기간 지속될 수 없다.

 

한선제는 즉위후에 고묘(高廟)를 알현하고, 대장군 곽광은 말을 타고 동행한다. 한선제는 가마에 앉아 있지만, 등뒤에 가시가 돋아있는 것같이 느껴져서 아주 불편했다. 이것이 바로 "망자재배(芒刺在背)"의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곽광의 부인은 어린딸이 한선제의 황후가 되지 못한 것에 계속 불만을 품고 있었다. 본시3년(기원전71년) 정월 허황후가 임신하여 출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몸이 좋지 않았다. 곽광의 부인은 곽광과 상의하지도 않고, 입궁하는 약관(藥官)을 매수하여 허황후를 독살한다. 허황후가 급사하자, 약을 만든 의관이 투옥된다. 곽광의 부인은 그가 자백할까 두려워, 부득이 사실을 곽광에게 털어놓는다. 곽광은 이를 듣고는 깜짝 놀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부인의 잘못을 감싸주고, 요행히 난관을 넘기기를 바란다. 다시 곽광이 나서서 주선하여 곽광의 딸이 황후가 된다.

 

이때 곽광의 권력은 최고봉에 오른다. 한선제 본인도 곽광에게는 어느 정도 양보했다.

 

지절2년(기원전68년) 봄, 곽광의 병이 위중해진다. 한선제는 친히 위문을 간다. 그날 곽광의 아들 곽우(禹)가 우장군이 된다. 삼월, 곽광이 병사한다.

 

곽씨가족은 한무제, 한소제, 한선제의 3황제를 섬기면서 세력이 악성팽창하고, 조정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다. 곽광이 죽은 후, 아들 곽우는 부친의 작위를 물려받아 박륙후(博陸侯)가 된다. 곽광의 질손(侄孫) 곽산(山)은 낙평후(樂平侯)가 된다.

 

한선제는 민간에 있을 때부터 곽씨의 세력이 크다는 것은 들었다. 황위에 오른 후에 비로소 곽씨세력이 상상을 초월할만큼 거대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황후마저도 곽광의 딸이다.

 

어쨌든 제국제도의 권력중심은 황제 본인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파벌의 팽창은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다. 황제가 조정을 장악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리하여, 곽광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곽씨권력을 약화시키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그는 장안세를 대사마대장군에 임명하고, 허황후의 아들 유석을 태자로 봉하며, 허황후의 부친 허광한을 평은후에 봉한다. 어사대부 위상을 승상으로 삼는다.

 

곽광의 부인은 유석이 태자에 오른 것을 알고는 아주 화가 난다. 급히 입궁하여 태자를 독살할 음모를 꾸민다. 이때 곽광의 부인이 허황후를 독살한 일이 발각된다. 한선제는 곽씨세력을 제거할 결심을 굳힌다.

 

지절4년(기원전66년) 칠월, 곽광의 사후 2년만에 곽씨의 권력을 박탈당한데 대한 원한으로 모반을 꾀한다. 그들은 한선제를 폐위시키고 곽우를 황제로 올리고자 한다. 그러나 음모가 드러나서, 곽광의 질손 곽운, 곽산은 자살하고, 곽우는 요참(腰斬)당한다. 곽광이 부인과 여섯 딸, 사위, 손녀사위는 모조리 처형당한다. 친척중 연루되어 주살당한 집안만 수십집안이다. 곽거병의 후인은 모조리 대역죄로 처형당한다. 곽황후도 폐위당한다. 곽씨가족은 철저히 멸망한다.

 

황족파가 최종적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한나라초기의 황족, 외척, 공신의 3파중에서, '공신'은 유방을 따라 강산을 얻은 개국공신들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개국공신들은 한문제때 이미 기본적으로 모두 사라진다. 그후, 한무제때 흉노전쟁에서 새로운 공신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은 한나라초기의 개국공신들과 비교할 바는 못된다. 한나라초기의 개국공신은 진나라말기의 의거 전에는 개국황제와 호형호제하던 평민들이었다. 한무제때의 공신은 그저 황제전제제도하에서의 행운아들일 뿐이다.

 

그리하여 한소제, 한선제시기에, 곽광등 보정대신은 그저 한무제의 신임을 받은 노신들일 뿐이다. 곽광 본인은 처름부터 외척신분으로 세력이 악성팽창한다. 곽씨가족은 이미 서한황조에 여씨외척파 이후의 또 하나의 악성팽창한 외척파가 된다. 일단 그들이 황권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황족파의 핵심인물인 황제, 공신파에서 변화해온 대신파들이 모두 그들을 싫어하게 된다. 외척파의 소멸은 필연적인 수순이 된다.

 

곽씨외척파의 멸망은 그저 한 외척파의 멸망일 뿐이다. 곽광때부터, 서한말기에서 동한시기까지 외척파는 시종 고질이 되어 시시때때로 황족파와 대신파를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