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우연강(寒雨連江)
먼저 만주족의 역사를 얘기해보자. 만주족은 동북지구에서 가장 먼저 기록에 남은 주민의 하나이다. 그들의 선조는 숙신인(肅愼人)이다. 일찌기 서주(西周)시기에 적극적으로 중앙왕조에 조공을 바친다. 서주의 천자는 친절하게도 숙신인들의 소재지를 본왕조의 "북토(北土)"라고 불렀다. 숙신인의 후예는 한나라때 읍루인(挹婁人)이라 불렀다. 남북조시기에 읍루인들은 물길인(勿吉人)이라고 불리웠고, 7대부락으로 발전했다. 수당시기에, 물길인들은 말갈인(靺鞨人)으로 불리웠고, 여전히 7대부락이었다. 당나라중기, 속말말갈(粟末靺鞨, 만주족 선인의 일부)은 첫번째 지방정권인 발해국을 건립한다. 926년, 거란의 귀족 야율씨가 요나라를 건립하고,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여진인으로 불린다. 요나라는 각부의 여진추장을 요의 절도사로 임명하여 여진에 대하여 간접통치를 시행한다. 1115년, 여진의 두령 완얜아구타(完顔阿骨打)가 황제에 올라 금나라를 세운다. 1271년, 몽골귀족이 원나라를 건립하고, 금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여진족에 대하여 "수속이치(隨俗而治)"의 정책에 따라, 여진각부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여 그들을 통치한다. 1368년, 명나라가 건립되고, 동북의 광대한 지구의 여진족에 대하여 많은 "기미(羈靡)" 위소(衛所)를 설치한다. 그리고 여진의 각부 두령을 위소장관으로 하여, 그들의 거주특징에 따라 건주여진(建州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과 동해여진(東海女眞)의 3대부로 나뉜다. 그중 건주여진의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한다. 각부는 병합과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이미 통일의 추세가 나타났다. 16세기에 이르러는 양대집단이 형성되는데, 하나는 만주오부(滿州五部)이고 다른 하나는 장백삼부(長白三部)이다. 양대집단은 여러번 전쟁을 벌였고, 집단내에서도 그다지 태평하지 않았다. 그동안, 경제적인 이익때문에 명나라의 국경을 여러번 침번ㅁ한다. 명나라의 요동군사령관인 이성량(李成梁)은 나쁜 사람이다. 여진내부의 갈등을 충분히 이용하여, 수시로 서로 공격하게 했다. 그 뜻은 여진의 군사력을 감쇄시키는 것이었다. 1583년, 명군과 여진각부이ㅡ 혼전중에 '오살(誤殺)'이라는 핑계로 누르하치의 조부인 줴창안(覺昌安), 타크스(塔克世)를 죽인다. 이로 인하여 원한이 맺어졌다. 1587년, 누르하치는 기본적으로 건주삼부를 통일한다. 무순의 농촌에 성을 쌓고 여진국을 건립한다. 그리고 스스로 한왕(汗王)이라 자칭한다.후금이 건립될 때까지는 명나라에 칭신(稱臣)하고 조공을 바쳤다. 이렇게 하여 상대방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했다. 명나라는 계속 그들에게 분봉을 진행한다. 명나라조정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누르하치는 동북지구를 통일시키는 과정을 가속화한다. 1616년이 되자 기본적으로 통일을 완성한다. 그리고 팔기제도를 창건한다. 몽골 커르친부와 조선국도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누르하치는 황제를 칭하고, 후금을 건립한다. 그렇게 하여 명나라와 분정항례(分庭抗禮)하게 된다. 1635년, 홍타이시는 여진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만주족이라 칭한다. 만주족이 탄생한 것이다. 1636년, 홍타이시가 황제에 오르며 대청(大淸)으로 국호를 바꾼다. 1644년, 이자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오삼계는 청나라병사를 장성안으로 끌어들인다. 청나라는 북경으로 천도한다.
만주족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만주족의 조상은 화하족의 갈래인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족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하여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한족의 중앙왕조가 바뀜에 따라, 만주족은 중앙정권과의 관계가 수시로 바뀌었다. 혹은 멀어지고, 혹은 밀접했다. 중앙정권이 산하기구를 통하여 직접 관리하기도 하고, 자신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을 건립하며, 중앙정권과 번속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일찌기 두번(후금, 청) 중화대지를 통일했고, 유일하게 두번이나 중원으로 들어와서 정권을 건립한 소수민족이다. 이를 보면 그들이 우수한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만주족은 이름은 만주족이지만 조상은 숙신에서 여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역사변천과 전쟁을 겪어왔다. 나중에는 이미 단독의 종족이 아니라, 북방민족이 융합한 일종의 집합체가 된다. 그중에는 한족도 포함된다. 특히 후금시기, 누르하치, 홍타이시는 패업을 노리기 위하여, 여진내부의 모든 부락을 겸병했을 뿐아니라, 동북지구의 개벌 러시아부락도 모두 가입시킨다. 홍타이시는 의식하기 시작헸다. 여진이라는 칭호는 더 이상 정확하지 않게 된 것이다. 1635년 여진이라는 칭호를 취소하고, 완전히 새로운 칭호인 만주족, 간칭 만족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이를 보면 만족이라는 이 칭호는 하나의 민족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정치군사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지역적인 의미가 혈통적인 의미보다 크다. 이 점은 일본 및 대화민족과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일본국은 지역, 정권, 인종 및 문화적으로 모두 자고이래로 독립국가였다. 중국인들과는 혈연관계가 없다. 중국역대왕조와도 신속 혹은 번속관계가 없다. 그저 경제문화분야의 교류만이 있었다. 지금의 일본문화가 중화문화와 동종동원(同宗同源)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수당, 양송시기의 문화교류와 관련있다. 그러므로, 만청입관9만청입관(滿淸入關)과 일본침략을 나란히 거론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전자는 지방소수민족이 중앙정권을 대체한 것이고, 후자는 아무런 의문없이 하나의 국가가 다른 국가를 야만적으로 침략한 것이다. 만청이 중원을 점령한 것은 중국역사상 역대왕조교체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모두 국내의 한 정치집단이 다른 정치집단을 대체한 것이다. 유일한 구분이라면 전자가 한족이고 후자가 만주족이라는 것이다. 만주족정치집단의 탄생과 발전은 자체적인 원인이외에 명나라가 그들을 탄압한 것이 또 하나의 촉진요소가 되었다. 최소한 이성량이 여진족을 해친 것은 누르하치가 거병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근본원인은 그 자신에 있었다. 이자성이 농민반란은 명나라의 붕괴를 앞당긴다. 만청집단은 그저 기회를 잡았을 뿐이고, 산에서 내려와 복숭아를 땄을 뿐이다. 우리는 문제를 볼 때 겉모습만 보고 간단히 비교해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고, 실질을 보아야 한다.
청나라가 삼백년간 중원을 지배한 것이 중화민족에 공헌한 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첫째, 국가통일을 유지했다.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각 소수민족의 지방할거를 해결했다. 대만문제를 해결했고, 삭번을 통하여 오삼계등 군벌의 중앙정권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했다. 둘째, 국토자원을 대거 확장한다. 청나라의 판도는 전왕조보다 넓었다. 나중에 제정러시아에 1백만평방킬로미터를 빼앗기기는 하지만, 나머지 국토만으로도 명나라나 오늘날보다 넓었다. 영토개척에서 청나라는 큰 공헌을 한다. 셋째, 청나라황제는 모두 한문화의 팬이었다. 이는 만주족이 여신시대에부터 한문화를 받아들인 것과 관련된다. 황제본인이 한문화의 박대정심에 경외심을 가진 것과 관련된다. 사람들이 청나라언어와 문자를 배우도록 강제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지도자들이 한문화를 열심히 배우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한문화의 풍성한 성과를 그대로 썼다. 이렇게 하여 한문화를 주체로 하는 중화문화가 계승발전될 수 있었다. 이와 도잇에 점진적으로 자신민족문화가 쇠락한다. 만청은 법률상으로도 민족차별을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한민족과 다른 민족을 평등하게 대우했다. 한인의 과거제도를 승계하였고, 한족과 기타민족의 지식엘리트들을 정치계층에 받아들였다. 이는 원나라와 선명하게 대비된다. 마찬가지로 북방에서 유목사냥하는 민족이지만, 차이는 이렇게 컸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방식과도 완전히 다르다. 일본은 한반도, 대반, 중국만주를 점령한 후, 먼저 현지인들이 본국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강제로 학습하게 하였다. 그 목적은 문화를 말살시키는 것이고, 식민통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만주족은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확실히 '양주삼일' '가정칠도'등 피비린내나는 행위를 하였지만, 중화대지에서 이런 폭력행동은 만주족만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역사상 한족내부에서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다른 소수민족도 많이 저질렀다. 우리는 현대문명을 기준으로 고대인의 행위를 형량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은 명나라말기에 이미 자본주의의 맹아가 나타났으므로, 만일 만청이라는 낙후한 민족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더라면, 그후 삼백년간 중국은 구미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사회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가설은 성립되기 힘들다. 먼저, 직접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청나라가 아니다. 이자성이 이끄는 대순 농민군이었다. 다음으로, 청나라가 중원을 점령하지 않았더라도, 이자성이 황제가 되었는데, 이 국가의 최종방향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이자성이 자본주의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내 생각에는 아마도 석기시대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명나라의 멸망은 청나라때문이 아니다. 이자성이 돌연 나타났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통치자 자신에 있다. 국가의 동란은 그 뿌리를 찾아보면 결국 통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수민족정권이 굴기하는 것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정의 민족정책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육국을 망하게 한 것은 진나라가 아니라, 육국이다.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도 역시 진나라이다." 스스로가 뿌리까지 썩었다면 국면을 회복시킬 방법이 없다. 다른 사람을 탓해봐야 소용이 없다.
만청정권의 최대잘못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천년이래의 봉건전제제도를 답습했다는 것이다. 역대왕조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그대로 활용했다. 혁신의식과 세계적인 안목이 없었다. 정치, 경제상 적시에 세계에 맞추려고 하지 않았고, 자본주의국가로부터 마음을 터놓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중화민족은 부지불식간에 점점 서방국가에 낙후되었다. 만청의 통치자들에게 주요한 책임이 있다. 국가관리에 참여한 한족대신들도 그 책임을 면키 어렵사. 다른 하나는 만청시기에 국가경제가 날로 쇠약하고, 정치질서가 날로 혼란되고, 서방열강이 날로 밀려오는데, 만청의 통치자들은 이를 깊이 생각지 않았다. 정치적인 체제걔혁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저 조삼모사하며 여러번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다. 국가를 해쳤을 뿐아니라, 자신도 해쳤다. 결국 무창의거가 일어나자 대청왕조는 그대로 붕괴해버린다. 중화대지는 다시 군벌혼전이 벌어진다. 그 원인은 마찬가지로 만청통치자의 무능이다. 한족권신이 비협조한 것도 있다. 양자가 합하여, 대청이 망하고 전란이 발발한 것이다. 서태후가 땅을 떼어주고 배상금을 준 것은 매국이라 할 수 없다. 고래로 이런 일은 너무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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