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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청나라의 국조(國鳥)는 왜 까마귀일까?

by 중은우시 2012. 2. 5.

작자: 미상

 

 

 

홍콩의 TV드라마중에 <금지욕얼(金枝欲孼)>이 인기를 끌어 청나라궁중드라마의 붐을 불러온 바 있다. 드라마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황궁의 상공을 도는 까마귀를 "신아(神鴉)"라고 부르며, 이 "신아'를 잡는 것은 엄한 처벌을 받는다고. 원래는 보통의 까마귀가 왜 신조(神鳥)로 받들어지게 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일까?

 

심양고궁과 북경고궁에는 모두 소룬(索倫)이 있다. 겨울에, 이 솔론의 꼭대기에 음식물을 놓아서 까마귀들이 먹게 하였다.

 

만주족이 까마귀를 숭배한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까마귀 숭배는 일종의 고대 신앙이다. 중국의 많은 민족은 고대에 까마귀를 숭배한 바 있다. 상고신화를 보면 삼족오(三足烏)가 서왕모를 위하여 먹을 거리를 구해주었다는 신화가 있다. 이때부터 이미 까마귀를 '신조'라 불렀다. 그리고 까마귀점은 고대인들의 까마귀에 대한 숭배를 보여주는 일단이다. 일찌기 서한시기에, 까마귀점이 유행한다. 나중에는 까마귀점에 대한 전문서적인 <음양국아경(陰陽局鴉經)>까지 나온다. 여족(黎族)의 <거목야우(擧木惹牛)>이야기에서, 까마귀는 사람을 구해준다. 보미족(普米族)의 신화인 <홍수도천(洪水滔天)>에서, 까마귀는 재난의 발생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으로 나온다. 까마귀에 대한 숭배는 생산방식과 관련있다. 최초의 까마귀숭배는 수렵시기에 나타났을 것이다. 까마귀는 사냥꾼을 도와서 동물의 시체를 찾을 수 있고, 먹거리를 획득할 수 있다. 동시에 어떤 민족은 검은 색을 숭배하는 습속이 있는데, 까마귀는 검은 깃털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나중에, 까마귀의 이미지는 반대로 가버린다. 주요원인은 생산방식의 변화때문이다. 대부분의 민족은 수렵에서 농경으로 바뀌었는데, 까마귀는 잡식성이며 물건을 훔치는 습성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특히 사람들이 산림을 떠나, 더욱 선진적인 수단으로 먹거리를 획득하게 되었을 때, 더더욱 까마귀를 이용하여 먹거리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때 까마귀의 썩은 음식을 먹는 습성은 까마귀를 죽음을 알리는 신호로 인식하게 된다. 만주족은 현재는 더 이상 어로, 수협에 종사히지 않는다. 그러고, 다른 민족들은 까마귀에 대한 심미관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지만, 만주족은 지금도 여전히 까마귀에 대한 숭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까마귀가 일찌기 민족의 조상을 구해주었다는 전설이 만주족으로 하여금 까마귀를 제사지내고 숭배하도록 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전설에서, 까마귀는 만주족의 황제 혹은 영웅인물과 연결된다. 그들이 적으로부터 들키지 않도록 구해주었다. 까마귀는 이로 인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고, 만주족의 사랑을 받았다. 이런 이미지에서 까마귀는 의인화되고, 구조행동도 직접적이었다. 이 이미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가마귀가 칸(누르하치)를 구해서 도망치게 했다는 전설이다. 칸이 명나라군사들에게 추격당할 때, 거의 따라잡았을 때, 한 무리의 까마귀가 그의 몸 위를 덮어서, 명나라군사들이 멀리서 보니 까마귀떼가 보였다. 그래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앞쪽으로 달려간다. 이렇게 까마귀는 칸의 생명을 구한다.

 

<소릉의 유래>에서도 한 무리의 까마귀가 청태종을 둘러싸서 극도로 위험한 지경에 처한 청태종을 구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청태종은 이때부터 까마귀를 신물로 보고, 사람들이 까마귀를 해치지 못하게 하였을 뿐아니라, 성경(盛京)의 동북쪽에 땅을 정해서 까마귀를 먹였다.

 

청나라의 문헌인 <만주실록> 권1에는 애신각라씨의가족이 까마귀를 숭배하는 신화를 기록하고 있다: 부쿠리옹순의 여러 대 이후에, "그 자손이 포학하여, 부족에 모반이 일어난다. 6월에 어두리가 함락되고, 긔 자손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그 안에 한 어린아이가 있는데 이름이 판차(樊察)가 있는데 도망을 쳐서 광야로 간다. 나중에 병사들이 쫓아오네 한 신작(神鵲)이 머리 위에 앉았다. 추격병은 사람의 머리에 신작이 살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고목이라 생각하여 돌아간다. 그리하여 판차는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그는 몸을 숨기고 평생을 살았다. 만주의 후손들은 모두 신작을 신으로 여기고 해치지 않았다."

 

그외에, 만주족은 까마귀를 숭배하는 것이 까마귀가 썩은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만주족의 선조들은 어로수렵의 생산생활방식을 가졌는데, 당시에는 생산력이 낮아서, 자주 사냥할 수가 없었다. 까마귀는 들짐승의 시체를 먹기를 좋아했다. 사람들은 까마귀가 모여있는 곳이면 의외의 먹거리를 획득하곤 했다. 오래 이러다보니, 점차 까마귀에게 신령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아시아 동북부 및 바다를 사이에 둔 북미 서북부의 연해에 사는 원시어로수렵민족들은 까마귀를 성물로 숭배하고 있다. 이는 까마귀숭배와 어로수렵민족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주족의 민간전설에서 까마귀의 구원자로서의 이미지는 까마귀의 썩은 음식을 먹는 습성과 관련이 있다. 까마귀가 누르하치와 청태종의 몸에 내려앉아 이들을 둘러싼 것은 적에게 그들이 이미 죽었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는 소룬의 꼭대기에 먹을 것을 주어 까마귀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심양고궁의 청녕궁 앞에 소룬을 세웠다. 꼭대기에는 밥그릇 모양의 물건을 두었다. 나무기둥은 한백옥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셔먼은 제사의식에서 오곡과 돼지고기조각을 신간으 꼭대기에 놓아둔다. 이때 까마귀가 모여들어 주변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그 위에 앉기도 하고, 쪼아먹기도 한다. 그 수가 수천수만에 이른다. 궁전의 꼭대기가 거의 꽉찬다. 여기서, 까마귀의 영성은 까마귀가 우연히 주공을 구해주었다는 것에서 부여된 것이다. 이미 원래의 동물숭배가 아니었다. 까마귀에게 구함을 받은 황제는 그 의외의 도움으로, 까마귀에 대하여 감사하게 되고, 만주족의 후인에 있어서, 가마귀는 만주족의 황제(조상)를 구해주었으므로 까마귀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보은의 행동이다. 까마귀에 대하여도 이렇고, 까치에 대하여도 그렇다. 누르하치의 전설에는 여러가지 다른 내용으로 전해진다. 그중에 어떤 경우는 희작(까치)가 누르하치의 머리 위에 있어서, 명군이 나무인줄 알고 그냥 갔다는 내용도 있다. 이것은 청나라문헌에 기재된 희작이 판차를 구했다는 전설과 비슷하다. 그러나, 왜 사람을 구한 것이 까마귀이고, 다른 새종류가 아닐까? 그 원인을 따져보면 원시적인 만주족이 가지고 있던 까마귀동물숭배와도 관련있을 것이다.

 

후스하리씨의 샤먼제사에서 까마귀는 숲의 거거(格格, 공주)이다. 즉 임해여신(林海女神)이다. 까마귀가 있으면 사냥꾼이 숲을 드나들 때 평안할 수 있다. 그래서 옛날에 사냥꾼들이 숲을 들어갈 때면 미리 까마귀에게 술과 고기를 던져주었다. <우부시번마마>에서 까마귀는 천신 아부카이언두리의 심복이 전쟁중에 검은 풀을 잘못 먹어서 죽었고, 까마귀로 되었다. 그리고 사람과 말이 머무는 곳에서 날면서 사람을 지켜주었다. 어떤 샤먼은 이렇게 적었다. 까마귀의 깃털은 태양이 없을 때의 색깔이다. 즉 칠흑같은 밤의 색깔이다. 까마귀는 흑색의 경비새이다. 그래서 까마귀가 있으면 밤에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 영고탑에는 사커사언두리에 관한 신화가 내려온다. 천신이 인간의 천재지변과 질병을 바라보면서 조금도 예방할 줄 모르는 것을 보고, 샤크샤를 인간세상에 내려보내 길흉화복을 예보하게 한다. 그는 한 나이든 사냥꾼의 집에 태어나서 반은 사람 반은 까치인 형상으로 까치집에서 자란다. 하루종일 까치와 함께 살았다. 그는 홍수, 전염병을 예보하여 부락이 환난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야루리의 미혼진을 풀어내서 부족사람들을 구해주었고, 만주족에게 "희신(喜神)'으로 모셔진다. 매번 부족에 사람이 새로 태어나거나, 새로 집을 짓거나, 오래 앓던 병이 낫거나, 전투를 하러 나갔다 평안하게 돌아올 때면 만주족은 '희신'에게 제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