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팔기자제는 '명사'이다. 청나라초기에는 '영광'을 대표했고, 청나라말기에는 '패가(敗家)'를 대표했다.
'팔기자제'의 타락에 관하여 후세인들은 왕과 귀족들이 자신의 자녀를 잘 교육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거나, 국가에서 이들 자제들을 제대로 단련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청나라때 팔기자제의 변천사를 읽어보니, 핵심요소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타락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청나라병사들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진입하여 중국을 통치한 후, 팔기자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된다. 일부분은 병영에 남은 것이고 일부분은 사회에 배치한 것이다.
사회로 나간 이들 '팔기자제'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던 기병에서 우아함을 쫓는 문인문객으로 변신한다. 이들은 문화수준이 높게 변신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팔기자제는 선천적인 기반이 약했고, 이런 변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변신한 것은 지취금미(紙醉金迷)의 도련님이 되었다. 접선을 쥐고, 새장을 들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것이다. 그의 뒤에는 수많은 가복들이 뒤따랐다. 다른 일은 할 줄 아는게 없었으므로, 그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공업에 종사하지도 않고, 그저 사회에서 놀기만 했다.
병영에 남은 팔기자제들은 비록 예전과 마찬가지로 군사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첫째는, 그들 부친대의 공로로 인하여, 국가군대의 특수대우를 받는 인물들이 되었고, 둘째는 그들의 시대는 평화시대였고 전쟁할 일이 별로 없어졌다. 그러다보니 전투력은 날로 하락한다.
선배들 팔기자제는 산해관을 넘어들어와서 한인들이 내란을 벌이는 틈을 타서 중원을 종횡무진했고, 강남을 피로 씻으며, 위명을 날렸다. 팔기병들은 산해관의 일전에서 기병(奇兵)의 역할을 수행하며, 일찌기 풍운을 질타하고, 전쟁터를 누볐던 이자성의 농민군도 오삼계와는 싸울 수 있었지만, 팔기병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이를 보면, 팔기병의 전투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고, 당시에는 최고의 '정예부대'였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중후기로 접어들어, 소위 강건성세(강희제, 건륭제의 태평성대)가 되면 병영에 남은 팔기병들도 그동안의 전과를 앉아서 따먹는 지경에 처한다. 그들은 사회에 나간 방탕한 자제들보다 더더욱 하고싶은대로 한다. 아편전쟁시기가 되면 아편담뱃대가 그들의 주요한 상징물이 되다.
청나라말기에, 병영에 남은 팔기자제이든, 사회에 나간 팔기자제이든 이미 '아편을 피우고, 새장을 들 줄만 아는' 지경에 처한다. 온갖 추악한 일은 모두 벌였다.
팔기자제의 변화에 대하여 청나라통치자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
명나라가 부패로 망했다.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전왕조의 교훈을 받아들여 비교적 신경을 많이 썼다. 청나라에는 기본적으로 혼군(昏君)은 없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근정(勤政)했다. 그리고 비교적 청심과욕(淸心寡慾)하였으며, 전체적으로 탐욕스럽지 않았다.
국가정권의 색깔이 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청나라의 역대통치자들은 팔기자제를 구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왕과 귀족들에게 자녀교육을 강화하도록 요구하기도 하고, 적지 않은 사회단련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를 통하여 이들 자제들이 용감하게 전투하며, 소박하고 힘든 것을 견디는 정신을 가지게 되기를 희망했다.
예를 들어, 옹정제때는 '경기이간(京旗移墾)'정책을 실시한다. 북경에 살고 있는 할일없는 기인들을 모아서, 동북지방에서 농사와 개간에 종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도록 하게 한 것이다. 첫째는 국가의 재정부담을 줄이는 목적이고, 둘째는 이들 자제들이 노동으로 단련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렇게 하여 팔기의 위풍을 다시 세울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효과는 미미했다. 경성의 이들 자제들중 가기를 원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갔다고 하더라도, 빈 손으로 되돌아왔고, 계속 놀면서 정부에서 먹여살려야 했다. 너무 오랫동안 가둬기른 애완동물처럼, 이미 포획의 야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그들은 경성의 화천주지한 생활에 도취해 있었고, 매일 어떻게 하면 더욱 즐겁게 놀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새를 기르고, 경마를 하며, 창극을 보거나 부르고, 귀뚜라미싸움을 했다. 이것은 그들이 잘하는 분야였다.
그들은 건륭제 말기에, 전당포에서 가장 환영받는 무리였다. 국가에서 지급하는 돈만으로는 그들이 쓰기에 부족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앞당겨 써야만 했다. 그들은 조상이 모은 비취보석, 골동서화등을 모조리 가지고 나왔다.
가정교육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사회단련기회를 만들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팔기자제는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청나라의 팔기자제들 사이에서는 수백년간 이런 말이 있었다: "한인무루, 기인유루(漢人無累, 旗人有累)". 여기서 '루(累)'는 '자본, 밑천'을 의미한다. 그 뜻은 한인은 자본이 없지만, 자신들은 자본과 밑천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 밑천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조상들이 옛날에 피를 흘리고, 죽음을 넘나들며 청왕조를 새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런 걱정없이, 그냥 봉록을 받아서 먹고 살아도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부친대의 특권에 기대어, 한인들에 대한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만해지고, 사회에서 하고싶은대로 하였고 놀면서 즐겼다. 그들은 조상들이 전쟁중에 모은 대량의 재산을 먹고 살았고, 졸부의 심리를 지니고 돈을 마구잡이로 썼다. 비단금침애서 태어나고 자란 팔기후예들은 교사음일(驕奢淫逸)이 그들이 항상 하는 짓이었다.
팔기자제가 믿는 것은 '자본, 밑천'이었다. 지금의 말로 하자면, '특권과 기득권'이다. 부친대에 사회자원을 독점하여, 공정경쟁도 필요없이, 이들의 이세들은 그냥 그것을 받아서 즐기고 하고싶은대로 하면 되었다.
특권은 혈통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팔기자제는 천하인들이 이를 가는 칭호로 바뀐다. 청나라의 중후기, 그들은 홍수전의 농민군조차 이기지 못한다. 할 수 없이 이한치한으로 증국번의 민병을 조직하게 해서야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세계의 진정한 열강들이 수평선의 너머에 나타났을 때, 팔기자제들은 더더욱 힘을 쓰지 못했다. 1860년 영프연합군, 1900년 팔국연합군의 겨우 만여명에게, 너무나도 쉽게 북경성이 함락당한다. 도검과 창을 든 팔기부대는 황급히 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섰지만, 그 결과 견고한 전선과 대포의 앞에 일패도지하고, 작오수산(作烏獸散)하고 만다.
할일없이 놀고 있던 팔기자제들은 스스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찌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그저 국토를 팔아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신해혁명은 한 부대의 변란만으로 애신각라씨의 중국통치를 무너뜨린다. 팔기자제들의 총대표인 황제가 파산한다. 팔기자제들은 모조리 파락호로 전락하고 만다.
중국의 이천년 봉건역사를 돌아보면, 팔기자제는 가장 대표적인 '견자군(犬子群)'이다. 그들의 변화는 근본적으로 왕과 귀족들이 자녀교육을 잘시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루(累)'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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