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청나라 황제의 결혼식

중은우시 2012. 2. 1. 14:58

글: 임만평(任萬平)

 

오늘은 황제의 혼례에 관해서 얘기해보기로 한다. 청나라때의 황제들은 자금성(紫禁城)에 거주하므로, 결혼도 자금성에서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만일 황제가 자금성에서 대혼전례(大婚典禮)를 올리려면 이런 전제가 필요하다: 황제가 되었을 때 연령이 매우 어리고, 성혼연령이 되어야, 비로소 황궁안에서 혼례를 거행할 수 있다. 만일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이미 결혼했다면, 그는 황위를 계승한 후, 간단한 의식만을 거행하게 된다.

 

청왕조때 순치제부터 선통제까지 10명의 황제 중에서 단지 순치제, 강희제, 동치제 및 광서제의 4명의 황제만이 자금성 안에서 혼례를 거행했다. 이를 '대혼전례'라고 부른다. 마지막 황제인 부의도 자금성에서 혼례를 거행했지만, 그때는 이미 민국시대였다.

 

위에서 언급한 4명의 황제는 즉위시 나이가 아주 어렸다. 가장 나이많은 강희제가 겨우 8살이고, 가장 어린 광서제는 겨우 4살이었다.

 

황제의 혼례는 일반적으로 모두 "예의(禮儀)"라고 말하지만, 기실, "예"와 "의"는 구분된다. 글자의 발전과정을 보면 그 의미가 약간 바뀌었다. "예"는 내재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으로 보이지 않으며, 일종의 본질적인 것을 나타낸다. "의"는 의식을 말한다. 그것은 유형적이고, 눈에 보이고, 이들 의식을 통하여 내심의 '예'가 드러나는 것이다.

 

청나라때 황제는 진정한 혼례전에, 특수한 단계를 거친다. 그것은 선수녀(選秀女) 즉, 수녀를 선발하는 것이다. 선수녀는 청나라때는 제도화된다. 명나라때도 민간에서 일부 비교적 준수한 여자를 뽑기는 했지만, 제도화하지는 않았고, 통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청나라황제는 결혼전에 매3년마다 1번씩 선수녀활동을 펼쳤다.

 

선수녀활동을 거행한 것은 청나라황제들이 자신은 천하를 가졌으므로, 그의 통치범위내에서 가장 우수한 여자들을 모조리 궁으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청나라의 통치자는 만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단지 기인(旗人)의 여자들만이 입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인'에는 당시 3종류가 있었다. 만주팔기, 몽골팔기, 한군팔기. 한군팔기(漢軍八旗)는 아주 특수하다. 그들은 실제로 한족이다. 다만 만주족에 귀순하여, 누르하치, 홍타이시가 그들을 기민으로 편성해준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기인으로 대우받는다. 각각 8기씩 있으므로 모두 24기가 된다.

 

청나라때는 매3년마다, 24기의 적령인 여자들은 모두 선발에 참여해야 한다. 당시 호적을 관리하던 부서는 호부이다. 호부는 호작을 관리할 뿐아니라, 당시 전국의 재정도 관리했다. 호부는 이 24기의 도통들에게 문서를 보내어, 선수녀를 통지한다.

 

만일 제1단계에서 탈락한다면, 그녀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도 된다.

 

만일 1차에 통과하여 이름이 오르게 되면, 기명수녀(記名秀女)가 되어, 친왕(親王)에게 보내어질 수 있다. 만일 황제가 혼인연령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면, 계속 호부에 이름을 걸어두고, 제2차선발을 기다려야 한다. 제2차선발때 어떤 여자는 황후가 되고, 어떤 여자는 황비가 된다. 광서황제가 결혼할 때, 선수녀부터 시작하여 <대혼화책>을 그려서 남겼다. 여러 페이지이며, 성혼과정을 모두 그림으로 남겼다. 황후를 결정한 후, 바로 궁안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전주에 불과하다.

 

뽑힌 수녀는 친가로 되돌아간다. 관련의식을 거행한 후에 비로소 다시 황궁으로 들어간다. 광서의 황후인 나라씨가 신무문을 떠나 친가로 돌아갈 때, 황궁의 가마에 앉는다. 그녀가 돌아갈 때는 혼자가 아니다. 당시 뽑힌 여자는 근비와 진비도 있다. 광서제는 그때 1후2비였다. 근비와 진비도 나라씨의 친가로 따라서 돌아간다. 그리고 다음 번 혼인절차를 기다린다.

 

황후 즉 나라씨의 부친은 팔기의 부도통이다. 고관이라 할 수 있다. 저택에는 방이 많았다. 그들은 원자(院子) 하나를 구분하여 서소(西所)라고 부른다. 황후와 황비들은 이 곳에 거주했다. 이들이 거주하기 시작하고부터 황후의 친가사람들도 다시는 접촉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이미 황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는 없다. 황궁은 태감, 시위를 파견하여 그들을 시중든다. 준황후 혹은 준황비인 수녀들은 혼전례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혼전례(婚前禮)는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즉, "납채(納采)"와 "대징(大徵)"이다. "납채"때, 황후는 집에서 기다린다. 황제는 황도길일을 선택하여, "납채례"를 행한다. "납채례"는 바로 황제가 구체적인 납체사절을 정하여 황후집으로 보내는 것이다. 납채사(納采使)는 아무나 담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친왕, 대신이 먼저 황제에게 후보리스트를 올리면, 황제가 그 중에서 납채사를 고른다. "납채사"에도 보좌하는 '납채부사'가 있다.

 

"납채사"는 먼저 태화전(太和殿)으로 가서 '사지절(使持節)'을 받는다. 이 절(節)을 들고 황제를 대신하여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외지로 파견나가는 관리를 '사절(使節)'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사지절'의 줄임말이다.

 

백성들이 정혼을 할 때도 여자측에 약간의 예물을 보낸다. 황제가 결혼할 때도 이 절차를 거친다. 예물을 보내는 것이다.

 

만주족은 기마민족이므로 그들은 민족의 말타고 활쏘는 풍속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보내는 것에는 말(馬)도 있고, 투구갑옷(盔甲), 베(布匹)과 돈(錢)이 있다. 그이전에는 대안(大雁)을 보냈는데, 그 의미는 안(雁)은 계절을 알아서 날씨가 따뜻하면 남쪽으로 가고, 날씨가 추우면 북쪽으로 가는데, 이는 후궁이 되는 여자도 예절을 잘 알아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알아서 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민간에서는 의식이 끝나면, 여자의 친가에서는 온 사람들을 대접한다. 첫째는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에게 약간의 예물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지고무상이다. 그도 납채연을 열기는 하지만, 황후와 그 친가 사람들이 황궁에서 온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사람을 시켜 황후집안을 위하여 주석을 준비한다. 즉 황실에서 납채연을 준비하여, 황후의 부친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집에서 대청왕조를 위하여 이렇게 좋은 딸을 길러주어써ㅓ으니 감사하다는 의미이다. 황제가 장인의 집에서 대접을 하는 것은 민간의 습속과는 정반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