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재릉(梓凌)
명태조 주원장의 후손은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단절되지 않고, 명나라멸망후 300년간 귀족의 신분으로 중화대지에서 생활앴으며, 여전히 영광을 누렸다.
제1대 한군후(漢軍侯) 주지련(朱之璉, ? - 1730)은 자가 상옥(商玉), 호는 창암(蒼巖)이며, 안휘 봉양 사람이다. 명태조의 13째아들 간왕(簡王) 주계(朱桂)의 후손이고 청나라때 팔기(八旗)에 들어갔고, 세습일등후(世襲一等侯)가 된다. 강희31년(1692년) 진사가 되고, 같은 해 박주지부(亳州知府)에 임명된다. 그는 나중에 안경부(安慶府)로 옮겼다.
강희46년(1707년_ 박주의 백성들은 그를 위하여 생사(生祠, 살아있는 사람에게 사당을 지어주는 것), 주공서원(朱公書院)을 지어서 기념했다. 강희48년(1709년) 박주에 수재가 나고, 전염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다. 주지련은 다시 박주로 돌아가고, 그는 인민을 이끌고 재해를 극복한다. 주지련은 박주의 인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다. 주지련이 두번에 걸쳐 박주지부로 있었던 기간은 18년이 된다.
참고: 1등연은후세보(一等延恩侯世譜)
주지련 [정백기한군] 옹정2년 십이월, 명나라 황실후예. 정정지부특사일등후. 8년에 졸하다. 건륭14년 팔월 일등연은후에 추증되고 세습망체(世襲罔替)되다.
주진(朱震). 주지련의 아들. 옹정8년 십일월 일등후를 세습받다.
주소미(朱紹美). 주진의 아들. 건륭11년 이월 일등후를 세습받다. 14년 팔월 일등연은후로 고쳐서 세습받다.
주의봉(朱儀鳳). 주소미의 종자(從子). 건륭40년 십이월에 세습받다.
주육서(朱毓瑞). 주의봉의 아들. 가경2년에 세습받다.
주수길(朱秀吉). 주육서의 아들.
주수상(朱秀祥). 주수길의 동생. 도광8년에 세습받다.
주이탄(朱貽坦). 주수상의 족조(族祖). 도광16년에 세습받다.
주서규(朱書珪). 주이탄의 족숙(族叔). 도광16년에 세습받다.
주학령(朱鶴齡). 주서규의 계자(繼子).
주성단(朱誠端). 주삭령의 족손(族孫). 동치8년에 세습받다.
주욱훈(朱煜勛). 주성단의 아들. 광서17년에 세습받다.
청나라에 투항한 마지막이자 최대의 무리는 대만으로 도망갔던 인원들이다. 예를 들어,1663년, 요번왕 장양군왕의 아들 영정왕 주술계(朱術桂)는 노감국 주이해(朱以海)의 비인 진씨와 유복자 주홍환(朱弘桓)을 데리고 대만으로 건너간다. 이 기간동안 대만으로 도망쳐와서 피난한 사람으로는 노계군왕, 노계군부장군 주자모(朱慈某), 봉신군부장군, 봉남군왕 주화목(朱和睦), 익왕 주이호(朱怡鎬), 서성군왕, 낙안군왕 주의준(朱義浚), 파동군앙이 있다. 강희22년(1683년), 시랑(施琅)이 대만을 함락시키고 정씨정권이 청나라에 투항하며, 대만의 명나라왕족들도 대부분 청나라에 투항한다.
시랑이 대만으로 왔을 때 즉시 이들 황족종실의 보첩과 인신을 몰수한다. 청나라조정은 이들 명나라종실유민들을 죽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들을 대륙으로 이주시켜, 산동, 하남, 절강등의 군현에 안치시킨다. 이들 종실후손은 청나라조정의 책봉을 받았고, 계속 살아남았다.
<필기통지>에 따르면, 명나라에서 투항한 장군들은 모두 한군팔기(漢軍八旗)에 편입되었다. 일반적으로 적극적으로 투항한 자들은 하오기(下五旗)에 편입시켰고, 수동적으로 투항한 자들(영향력이 비교적 큰 자들)은 상삼기(上三旗)에 편입시켰다. 청나라때 저명한 한군의 기인(旗人)들은 다음과 같다;
정황기한군(正黃旗漢軍): 경계무(耿繼茂), 경중명(耿仲明), 경정충(耿精忠), 당통(唐通), 정지룡(鄭芝龍), 정극상(鄭克爽)
상황기한군(鑲黃旗漢軍): 유량좌(劉良佐), 홍승주(洪承疇), 퉁양성(佟養性), 시랑(施琅), 퉁도뢰(佟圖賴), 퉁국유(佟國維), 융과다(隆科多), 연갱요(年羹堯), 고악(高鶚)
정백기한군(正白旗漢軍): 오삼계(吳三桂), 오응웅(吳應熊), 손가망(孫可望), 풍석범(馮錫范), 풍국상(馮國相), 풍의(馮毅), 왕보신(王輔臣), 관문(官文), 원세부(袁世富), 원수산(袁壽山), 주지련, 조인(曹仁), 이후(李煦), 조설근(曹雪芹), 주욱훈(朱煜勛)
상백기한군(鑲白旗漢軍): 악종기(岳鍾祺), 채육영(蔡毓榮), 이영방(李永芳), 오수진(吳守進)
정홍기한군(正紅旗漢軍): 유국헌(劉國軒), 범문정(范文程), 우성룡(于成龍), 조대수(祖大壽), 조택윤(祖澤潤)
상홍기한군(鑲紅旗漢軍): 공유덕(孔有德), 공사정(孔四貞), 요계성(姚啓聖). 유지원(劉之源)
정남기한군(正藍旗漢軍): 상가희(尙可喜), 상지신(尙之信), 포승선(鮑承先), 석정주(石廷柱), 이국한(李國翰), 왕세선(王世選)
상남기한군(鑲藍旗漢軍): 좌몽경(左夢庚), 조량동(趙良棟), 영완아(寧完我), 마광원(馬光遠)
원수산의 자는 미봉(眉峰)이고 원숭환의 후손이다. 한군 정백기 사람이다. 제정러시아의 침입시,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군에 항거한 바 있다. 부친인 부명아(富明阿)는 일찌기 길림장군을 지냈다. <동만현지>에 따르면 그에 대하여 이렇게 적혀 있다:
"원독사(袁督師, 원숭환)는 자식이 없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하옥되어 죄가 정해진 후, 그의 첩이 아들을 하나 낳아서 도성(북경)의 민간에 숨겼다고 한다. 청나라군사가 산해관을 넘어들어온 후, 만주의 모 인사가 그 아이를 얻어 팔기에 적을 만들어주었다" "신안 진국태가 일찌기 다른 사람에게 말한 바 있다. 옛날에 강남군영에 있을 때, 참령 부명아가 물었다: '신안과 완현은 이웃인데 독사의 후예는 어떠한가?'이렇게 답했다. '독사의 조상선영은 나의 고향에서 멀지 않다. 청명, 중구에 우리 고향에서는 대신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후손은 없다." 부명아는 이를 듣고 다음 날 몰래 말한다: "나는 독사의 몇대손이다. 그대가 나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으니 형제와 다를 게 무엇이냐. 고향사람들에게 잘 대하는게 당연하다."
원숭환에게 아들이 있었다. 그가 주살된 후, 유복자가 있었다. 원숭환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왜 건륭때 원숭환의 후예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던 이유는 원숭환이 참살되어 친족이 모두 천리밖으로 유배갔고, 원숭환의 첩은 민간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숭환은 항청명장이므로 자신의 신세내력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는 원숭환의 유복자는 이름이 문필(文弼)이었는데, 외지로 떠돌았다. 군공이 있어 영고탑 정백기에 편입되었다. 영고탑(흑룡강 영안)은 북경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공문 하나로는 들을 수 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1세) 원숭환
(2세) 원문필
(3세) 원이한(袁爾漢)
(4세) 원귀(袁貴)
(5세) 원상재(袁常在)
(6세) 원간(袁赶)
(7세) 원세유(袁世有), 원세관(袁世寬), 원세복(袁世福, 만주명 富明阿)
(8세) 원수산, 원영산(袁永山)
(9세) 원경은(袁慶恩)
대청의 12대 연은후인 주욱훈은 청나라가 망한 후에도 계속하여 부의의 곁을 지켰다. 주원장의 후손은 대가 끊어지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들은 지금 만주족이 되어 있고, 소수민족의 대우를 누리고 있다.
기실 팔기는 잡탕이다. 당연히 뒤에는 부패된다. 그러나 건국초기, 확실히 만,몽,한의 삼족을 위주로 민족엘리트들의 집합체였다. 예를 들어, 문으로는 범중엄의 후손인 범문정이 있고, 무로는 악비의 후손인 악종기가 있다. 그들의 후손도 모두 팔기에 들어가서 기인(旗人)이 된다. 민국후에는 만주족으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만주족들 속에는 개략 4분의 1의 조상이 몽골인이고, 4분의 1은 한인이며, 약 5분의 1은 다오월, 어룬춘, 장족, 회족등이다. 그리고 청나라시대의 기인에는 각족들이 통혼하여 진정한 조상이 만주인인 사람은 3분의 1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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