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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청태종의 장남은 왜 후계자가 되지 못했는가?

by 중은우시 2012. 5. 17.

글: 낙방진사(落榜進士)

 

청태종(홍타이시, 皇太極)는 생전에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다. 그가 서거하기 전에 새 황제자리를 둘러싸고 쟁탈전이 시작된다. 그 자리를 노리는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청태종의 장남인 숙친왕(肅親王) 하오거(豪格)와 누르하치의 아들 중 하나이며, 청태종의 14째동생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쟁탈전이 이렇게 시작된다.

 

먼저 하오거를 보자. 하오거는 청태종의 장남이고, 전공이 혁혁하다. 만주팔기중 정황(正黃), 상황(鑲黃). 정남(正藍)의 3기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오거는 부친 청태종을 계승할 우수한 자질이 있고, 전공도 탁월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청태종이 생전에 이미 군권지상의 전제제도를 거의 확립했으며, 한족 제왕중의 '장자승계"의 전통관념이 만주족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친왕 도르곤은 하오거보다도 3살이나 어렸다. 그도 마찬가지로 지위도 높고 권력도 컸으며, 전공이 뛰어났다. 그는 정백(正白), 상백(鑲白)의 2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청태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 자신도 문무를 모두 겸비했다. 청태종은 도르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짐은 너를 여러 자제들보다 더 좋아한다. 너에게 특히 많이 의지하는데, 네가 나라를 위하여 근면하고, 짐의 명을 잘 따르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청태종은 도르곤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자신의 여러 아들과 동생들 중에서 그가 '큰 일을 해낼'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같다. 도르곤의 가장 주요한 카드는 8명의 화석패륵이 국정을 공동으로 의논한다는 체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청태종이 죽은 후, 이 국정을 공동으로 논의하는 패륵들은 대부분 도르곤을 지지했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이때 쌍방의 세력은 대등하고 백중지세였다고. 둘 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우세는 점하지 못했다. 쌍방은 각자 암중으로 밀모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

 

숭덕8년(1943년) 팔월 십사일, 오랫동안 기다리던 날이 드디어 도래했다. 여러 왕 패륵들은 청태종의 관 앞에서 황위계승자를 논의하고 있었다. 양황기(정황기 및 상황기)의 정예들은 청태종의 관이 놓여 있는 숭정전을 둘러쌌다. 양황기를 대표하는 대신 소니(索尼), 아오바이(鰲拜), 투라이(圖賴)등은 옹립의 공을 세우기 위하여 검을 쥐고 소리높여 외쳤다: "선황에게 황자가 있으면 그 중 하나를 세워야 한다.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도르곤은 팔왕공의의 주재자 신분으로 그들에게 소리친다: "버릇이 없다. 여러 왕 패륵들도 아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은 너희들이 끼어들어 말할 곳이 아니다. 빨리 물러가라." 아지거(阿濟格)와 도도(多鐸)는 눈앞의 국면을 보고, 우세를 점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여 급히 앞으로 가서 도르곤을 제지했다. 그러나 도르곤은 이들을 눈에 두지 않았다. 아지거와 도르곤의 동모동생인 도도는 급히 소리쳤다: "태조의 유조에 황제위를 계승할 수 있는 자에 나의 이름도 있다. 네가 따르지 않겠다면, 나를 세워라." 소니, 아오바이, 투라이등은 이렇게 반격한다: "태조의 쥬조에 숙친왕의 이름도 있다." 도르곤은 차가운 눈으로 보면서 말한다: "그러면 나이많은 사람을 세우자는 것이냐. 그럼 당연히 예친왕 다이산(代善)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당시 예친왕 다이산은 이미 나이가 들어 체력이 쇠퇴하여 오랫동안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이 투쟁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미움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예친왕이 만일 응락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복이다; 그렇지 않으면, 숙친왕이 황제의 장남이니 대통을 계승할 수 있겠다."

 

하오거는 더 참지 못했다. 그는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하는 격으로 말한다: "나는 복도 없고 덕도 적다. 어찌 이 임무를 맡을 수 있겠는가?" 말을 마치고는 그냥 떠나버린다. 아쉽게도 하오거는 부친의 전투시의 용감함은 지녔지만, 부친의 모략은 본받지 못했다. 양황기의 대표도 속속 자리를 떠난다. 소니, 아오바이, 투라이등은 이렇게 소리친다: "우리는 황제의 밥을 먹었고, 황제의 옷을 입었고, 황제가 우리에게 준 것은 그 은혜가 하늘보다 높다. 만일 황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제를 따라 땅속으로 가겠다."

 

다이산은 쌍방이 대치하고 있고, 자신은 황제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이 논쟁에서 빠지고자 한다: "나는 선제의 형이지만, 나이가 이미 많고, 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 조정의 일은 하나도 알지 못하니 새황제를 세우는 일에 의견을 말할 수 없다." 말을 마치고, 그도 숭정전을 떠난다.

 

신황제를 세우는 논의가 원만하게 끝나기 어렵게 되자, 총명한 예친왕은 이렇게 입을 연다: "너희들이 하는 말이 맞다. 황제계승은 도리에 맞는다. 숙친왕이 물러나겠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선제의 아홉째 아들인 푸린(福臨)을 황제로 세우자. 그리고 푸린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정친왕(鄭親王) 지얼하랑(濟爾哈郞)과 내가 좌우에서 보정을 하다가, 황제가 성년이 되면 권한을 돌려주자." 이 말이 나오자, 모든 사람들은 의외로 여긴다. 왜냐하면 이 때 푸린은 겨우 6살이어서 아무도 그를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린도 '황자'이다. 양황기의 대신들은 멍해져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들이 내걸은 구호는 "황제계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았다. 푸린의 모친은 청태종의 오궁후비중 하나인 영복궁 장비라는 것을. 오궁후비중에는 비록 인지궁 귀비가 있지만, 그의 아들인 보부보고르는 나이가 겨우 2살에 불과했다. 여러 사람들이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도르곤의 임기응변에 동의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섭정왕의 직위는 가졌다. 도르곤이 비록 황제의 자리를 포기했지만, 푸린이 아직 어리므로 섭정왕도 괜찮은 자리이다. 쌍방은 모두 물러나며 차선책을 구했고, 6살난 푸린이 황제에 오른다. 여진족의 세번째 황제 순치제(順治帝)가 바로 그이다. 예친왕은 비록 황제가 될 기회는 잃었지만, 이번 투쟁의 승리자가 된다. 순치제의 두 섭정왕중 지얼하랑은 도르곤보다 서열이 앞섰지만, 다음 해에 지얼하랑이 삼원, 육부, 도찰원, 이번원등을 불러모아놓고 이렇게 선포한다: "이후 아문에서 처리하는 사무중 우리 두 왕에게 보고하는 것은 앞으로 모두 먼저 예친왕에게 보고하라. 모든 문서의 서명은 먼저 예친왕의 이름을 서명하면 된다. 그후 도르곤이 섭정왕의 우두머리가 된다. 나이러인 순치제의 앞에서 섭정왕의 신분으로 대권을 장악했다. 그는 황제위에 오르지 못한 황제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