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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탁발선비(拓拔鮮卑)의 기원과 발전

by 중은우시 2012. 2. 4.

글: 사문(思文)

 

 

 

대흥안령 알선동에서 발원한 탁발선비는 대흥안령에서 내려온 후, 첫번째로 거주한 곳이 후룬호(呼倫湖) 호숫가이다. 이곳의 자라이노르, 완공에서 모두 선비족초기의 많은 묘장이 출토되었다. 자라이노르의 묘장중에서 비조문(飛鳥紋) 동물형 동류금대식(銅金帶飾)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위서.서기>의 사실이 확인되었다: "고신수(古神獸), 형태는 말과 같고, 목소리는 소와 유사하다. 앞장서서 가며 끌고 가고, 해마다 나타난다. 이때부터 흉노의 옛땅에 거주했다"

 

원래, 선비족이 후룬호 일대로 이주해갈 때 늪지대를 만난다. 이런 늪지대 위를 가다가 약간만 부주의하면, 빠져서 죽는다. 부족들이 많이 죽었다. 바로 이 중요한 순간에 말처럼 생기고, 소같은 소리를 내는 '신수'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이들을 데리고 늪지대를 빠져나간다. 이렇게 하여 선비족이 서쪽으로 이주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 신수는 내몽고, 동북지구, 화북북부지구에서 모두 출토되었다. 선비족들이 활동했던 지역이라면 모두 출토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후룬호 일대의 생존환경은 대흥안령 심산보다는 훨씬 좋았지만, 몇세기를 거주한 후, "신인(神人)이 말했다: 이곳은 황량하고 궁벽진 곳이니, 도시를 만들 수 없다. 계속 더 가서 좋은 곳을 찾아라."

 

그래서 탁발선비는 후룬베이얼 초원을 관통하여 시린궈러초원으로 서진한다. 지금의 내몽고 적봉시 바린(巴林) 좌기의 임동진 북쪽 일대에 한동안 머문 후(왜냐하면 이곳에서 선비문물이 출토된다. 많지 않다. 임시거주에서 남긴 것으로 보인다), 계속 옮겨가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보기에, 그들은 도읍을 건설할 곳을 찾겠다는 결심이 굳은 것같았다. 여기서 설명해야햘 것은 이대 그들은 물물교환을 통하여 중원의 일부 제품을 획득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들의 묘장에서는 중원에서 생산된 동경이 발견된다.

 

기나긴 이주과정에서, 어려움을 여러번 겪는다. "산곡고심(山谷高深), 구난팔조(九難八阻)" 마침내 흉노의 옛땅을 찾았다. 지금의 음산 전후의 대초원일대이다.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탁발선비족은 67세를 거쳐 대인 탁발모(拓拔毛)에 이르고, 다시 5세를 내려가서 탁발추인(拓拔推寅)에 이른다(이때는 동한 환제 유지가 재위하던 때로, 탁발추인은 단석괴의 서부추장중 1명이다). 그리고 다시 7세를 거쳐 탁발린(拓拔隣)에 이르고, 그 아들이 탁발결분(拓拔潔汾)이다/

 

탁발결분이 이때의 추장이었다.

 

그들이 서쪽으로 이주하여 몽골고원의 음산에 이르렀을 때, 한 산입구에 도착한다. 여기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화를 가득 실은 수레를 하나 발견한다. 그 안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칭 "신녀(神女)"라고 했다. 천신이 보내어 탁발결분과 부부로 맺어지기 위하여 왔다. 그들이 부부가 된 후, 그녀는 다시 떠난다. 떠날 때 그녀는 탁발결분에게 말한다: 1년후 이곳에 와서 나를 기다려 달라. 우리 공동의 아들이 탄생할 것이다. 1년후, 과연 신녀와 결분이 다시 만났고, 정말 아들 1명이 태어났다. 이때부터 탁발선비의 "선비부친, 흉노모친'의 시대가 시작된다.

 

실제로 이는 흉노 옛땅의 사람들이 한 특수한 화친(和親)이다. 두 종족, 두 부락이 화친의 수단으로 연합한 것이다. 

신녀가 낳은 아이가 바로 탁발역미(拓拔力微)이다.

결분은 이 특수한 내력에 계속된 총명함을 보여, 역미로 하여금 추장의 지위를 승계하게 한다.

 

역미는 새로운 시대를 연다.

당시에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계속 서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향을 바꾸어 남진하여 경제가 발달한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역미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는 대부분의 부족원을 이끌고 성락(盛樂)이라는 지방으로 간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의 도성을 건설한다. 이때부터 도읍건설시대가 시작된다.

이 유적지는 후허하오터 와 린거르지방에 위치한다. 그리고 부락연맹을 기초로 하여 "대(代)"라는 나라를 건설한다.

 

깊은 산과 늪에서 나온 민족 탁발족은 신녀형상으로 나타난 흉노족과 만난다. 이렇게 하여 낭만적인 색채의 화친을 이루고, 이는 탁발선비족이 신속히 원시사회에서 봉건사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났을까? 원래, 동한시대, 즉 기원후1세기무렵, 흩어진 흉노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서부초원에서 다시 결집한 것이다. 동한초기, 광무제 유수를 포함한 중국북부의 군벌은 적극적으로 흉노와 화친한다. 흉노도 서부에서 옛 고향인 음산아래 하투로 조용히 출발한다. 그들은 동부에서 온 탁발선비와 만난다.

 

이때의 탁발족은 비록 사회제도가 원시적이었지만, 전투력이나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은 아주 강했다. 용맹하고 사나웠다. 그래서 흉노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여인을 바치면서 새로 만난 부족과 화친하는 것이다. 음산의 아래에 있는 하투지구에서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선비부친, 흉노모친"의 기원이다. 즉, 이번의 민족융합으로 선비족의 인구는 120만에 이르게 된다.

 

분명히 흉노족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새로 건립한 나라를 "대"국이라고 칭한다. 흉노의 시조가 이 일대에서 대국을 건립한 바 있고, 이 지역을 점령한 바 있는데, 나중에 조양자(趙襄子)에게 쫓겨났었다. 지금 그들은 새로운 면목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옛날의 칭호를 되찾는다. 탁발규(拓拔珪)시대에 이르러 "위(魏)"로 개칭한다. 조조부자가 건립한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하여 '북위(北魏)'라고 부른다.

 

나중에 북위는 도성을 평성으로 옮긴다. 즉, 지금의 대동이다. 북위 효문제때, 다시 낙양으로 옮긴다. 그리고 철저히 한화를 완성한다. 수당의 성세는 북위에서 잉태한 것이다. 이세민의 몸에는 절반이상의 선비혈통이 흐른다.

결분과 흉노여자가 결합하기 전에, 그는 선비부인과의 사이에 이미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필고(匹孤)"이다. 역미가 남천할 때, 그는 일부 부족을 이끌고 서진한다. 그들은 황하를 따라 걸었고, 하란산의 동쪽을 끼고 간다. 마지막에 하서주랑과 오늘날 청해호 일대에 도착한다. 이들은 남북조시대에 "남량(南凉)"이라는 나라를 건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