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고위(高緯): 중국역사상 최초의 무상황(無上皇)

by 중은우시 2010. 9. 20.

: 유계흥(劉繼興)

 

무상황(無上皇) 태상황(太上皇) 부친이며, 황제(皇帝) 조부이다. 중국고대 황제제도사상 최고의 허위(虛位)이다. 황제가 황제의 자리를 다음번 황제에게 물려주면(후임자는 대부분 아들), 그는 태상황이 된다. 그런데, 후임자가 다시 양위를 하면, 후임자가 태상황이 되고, 원래 태상황은 지위가 가장 높은 무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는 여성에 있어서 태황태후(太皇太后) 같다. 그러나, 역사상 무상황이 출현할 가능성은 태황태후가 출현할 가능성보다 훨씬 적다. 점은 이상할 것도 없다. 황제는 죽을 때까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보니, 역대에 태상황도 그리많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물며, 태상황은 더더욱 보기어렵다.

 

중국고대의 첫번째 태상황은 북제후주(北齊後主) 고위(高緯)이다. 승광원년(577) 북제의 군대가 북주(北周) 군대의 진공을 버티지 못하여, 멸망한다. 고위는 화를 피하기 위하여, 황제의 자리를 태자인 고항(高恒)에게 물려준다. 그가 북제유주(北齊幼主)이다. 고위는 태상황이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태상황 고위는 유주에게 황제위를 임성왕(任城王) 고개()에게 물려주도록 명한다. 그리하여 태상황 고위는 무상황이 된다. 그런데, 그가 무상황에 오르는 날이 바로 그의 북제가 멸망한 날이다. 그의 황당한 인생은 가련할 정도이다.

 

고위는 남북조시대 북제의 다섯번째 황제로, 북제의 무성제 고담의 장남이다. 천보7(556), 고위는 병주(지금의 태원) 있는 왕부저택에서 태어났다. 소년시기에 용모가 뛰어나서 부친의 총애를 받고 왕세자가 된다. 대녕2(562) 황태자가 된다. 하청4(565), 무성제가 그에게 황제위를 선양한다. 고위가 즉위할 , 부패한 북제정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진취적으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을 제대로 생각을 하지 않고 황음무도하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을 한다. 고위는 자칭 “무우천자(無憂天子)”이다. 노는 방법은 각양각색이고, 가장 놀라운 일은 자신이 작사작곡을 하고, 비파를 끌어안고 스스로 비파를 타면서 노래한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는 수천의 태감, 노비들로 하여금 그의 곁에서 따라부르게 한다. 그는 매일 후비, 궁녀와 어울렸고,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데만 신경썼다. 십일, 반달이 지나도록 조회에는 한번도 참석하지 않기도 했다. 대신들 중에서 그에게 정무에 신경쓰라고 조언하면 가벼우면 파면하고, 심하면 죽어버렸다. 그의 곁에는 아부꾼들만 남게 된다. 이들은 어떤 자는 사방에서 미녀를 물색하고, 어떤 자는 화려한 궁전을 지어서 있도록 하였다. 이런 자들을 중용하다보니, 기강이 무너지게 되었다.

 

고위는 황제위에 10년을 있지 못한다. 그런데도 호화궁전은 십여곳이나 지었다. 북제의 도성인 업성에 만든 사원은 그의 부친 고담의 시절보다 배는 늘어난다. 한번은 대신들이 중요한 일로 그에게 보고를 해야하는데 도성내의 사원을 한참 찾아다닌 끝에 비로소 그를 찾은 일이 있었다. 조정이 이렇게 돌아가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는 부패하고, 군대는 쇠약해지고, 군사력은 날로 약화된다. 혼군 고위가 명장 곡률광(斛律光) 죽이고 이후 북제는 북주의 침략을 막아낼 동량을 잃었고, 망국의 운명을 피할 없게 된다.

 

곡률광은 칙륵족(敕勒族)으로, 자는 명월이고, 삭주 사람이다. 북제의 명장이다. 곡률광은 장수집안에서 태어났고, 부친인 곡률금은 북제의 대사마였으며, 군왕에 봉해졌다. 천고에 유전되는 명곡 <<칙륵가>> 곡률금이 처음에 불러서 유명해진 것이다. 곡률광은 ‘마면표신(馬面彪身)으로 호걸이었다. 말을 잘하지는 못했다. 어려서 기마 궁술에 뛰어났고, 무술로 이름을 떨쳤다. 17 부친을 따라 전투에 나서서 크게 용맹을 떨친다. 우문태의 장사(長史) 막효휘를 활로 쏘아 쓰러뜨린다음 생포한 것이다. 546, 고징(고위의 백부) 진양으로 사냥을 하러 왔을 , 곡률광은 화살 하나로 대조(大雕) 목을 꿰뚫는다. 고징은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한다. 그리하여 그는 “낙안도독(落雁都督)”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군사재능이 풍부했던 곡률광은 여러 북주군대를 물리친다. 564 북주, 돌궐의 20만연합군이 북제를 공격한다. 태화에서 곡률광은 적군과 만난다. 북주의 군대는 궤멸하여 패퇴하고, 대장 왕웅은 곡률광의 진중으로 쳐들어와서 1:1 싸우자고 한다. 곡률광은 좌우를 물리치고, 활과 화살만 들고 마주한다. 왕웅은 삭을 들고 그와 1장여 떨어져 있었다. 곡률광은 화살 개로 왕웅의 이마를 맞춘다. 왕웅이 죽은 곡률광은 기세를 몰아 공격하여 3000여명을 참한다. 570, 북주의 대군이 의양을 포위한다. 곡률광은 3만의 보병을 이끌고 포위망을 풀어준다. 정농에서 북주군과 마주했을 , 곡률광은 앞장서서 용감하게 돌격하여 적군을 물리친다. 그런데, 이번에는 곡률광이 포위를 뚫지 못하고, 한참동안 대치하다 그대로 물러난다. 우문헌이 5만의 북주군을 이끌고 추격할 , 곡률광은 말을 돌려 반격하고 우문영등을 포로로 잡는다. 우문헌은 다시 우문걸등에게 보병기병 3만을 이끌고 공격하게 한다. 곡률광은 이들을 대파한다. 양경흥을 참하고, 천필을 획득한다. 같은 12, 곡률광은 평양에서 보병,기병 5만을 이끌고 분북으로 진격하여 평농등 13 성을 쌓고, 북주의 명장 위효관등을 격파한다. 그리고 주나라병사들 죽고 포로로 잡힌 자들이 수천이었다.

 

곡률광은 전공으로 대장군에 오른다. 부친이 사망한 , 함양군왕을 세습하고, 좌승상에 오른다. 그의 하나는 황후가 되고, 딸은 태자비가 된다. Wwpemfeh 모두 장군이 되거나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공주 3명과 결혼한다. 그의 동생인 곡률선은 유주자사이다. 집안이 공로도 크고, 지위도 높았다. 집안이 아주 흥성했다. 곡률광은 항상 이것을 우려했다. 집안의 세력이 너무 커서 우환을 불러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안을 엄격히 단속하고, 생활에서 근검했으며, 사리를 도모하지 않고, 뇌물도 받지 않았으며, 문객을 들이지 않았다. 조정에 간여하지도 않았다. 북제후주 고위는 무능한 황제였다. 그는 신조정, 목제파등 소인의 말을 믿어, 정치가 어지럽고 부패했다. 곡률광은 이들을 아주 싫어했다. ‘소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망한다’ 이리하여 곡률광은 이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 북주명장 위효관은 여러 곡률광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고위가 멍청하다는 것과 곡률광이 다른 신하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곡률광이 황제위를 찬탈하려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노래로 만들어 업성에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노래는 이러했다: “백승비상천(百升飛上天), 명월조장안(明月照長安) ‘백승(百升)’은 일곡(一斛)이고, 명월은 곡률광의 자이다. 노래는 은근히 곡률광이 황제위를 찬탈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조정등은 이를 기화로 고위에게 이를 말하고 사람을 시켜 곡률광이 모반하려한다고 고발하게 한다. 무평3(572) 유월, 고위는 곡률광에게 준마 1필을 하사한다는 핑계로 다음 동산을 유람하자고 , 궁중으로 유인해서 죽여버린다. 당시 곡률광의 나이 58세였다. 모반죄로 온집안이 멸족되고, 가산을 몰수한다. 그런데, 가산은 , 화살과 , 칼집뿐이고, 재산이 거의 없었다.

 

고위는 스스로 북제의 동량을 죽인다. 조야에서는 이를 모두 안타깝게 생각한다. 북주의 주무제 우문옹은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국내에 대사령까지 내린다. 577 병력을 일으켜 업성으로 쳐들어가 북제를 멸망시킨다. <<북제. 곡률광전>> 기록에 따르면, 주무제 우문옹은 곡률광을 상주국, 숭국공에 봉하고, ‘이 사람이 많이 아직도 있었다면, 짐이 업성으로 들어올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북제의 멸망은 고위가 풍소련(馮小憐) 미친듯이 사랑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풍소련은 원래 목황후의 곁에 있던 시녀였다. <<북사>> 까르면, 풍소련은 ‘총명하고 비파를 알며, 노래와 춤에 능했다” 아주 총명하고, 예쁘면서 재주도 있는 여자였다는 것이다.

 

당시 고위는 비파를 타는 조소의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목황후는 조소의와의 사랑싸움으로, 자신의 시녀 풍소련을 고위에게 보낸다. 고위의 사랑을 빼앗아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위가 조소의는 멀리하지만, 풍소련은 조소의보다 훨씬 심했다. 그녀는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고위를 꼼짝못하게 붙잡는다. 이때부터 고위는 풍소련만을 총애한다. 앉을 때도 같은 자리에 앉고, 나갈 때도 나란히 말을 탄다. 그리고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맹세한다.

 

풍소련은 천생의 우물이다. 용모도 예쁘기 그지없지만, 피부도 아주 탄력이 있었다. 고위는 그녀를 아껴서 손에서 떼지를 못했다. 대신들과 국사를 논의할 때도, 풍소련을 가슴에 안고 있거나, 무릎에 앉히고 귀나 머리카락을 만졌다. 후안무치한 황제 고위는 심지어 풍소련을 벌거벗긴 다음에 조정의 탁자위에 놓아두고, 수시로 각종 동작을 해서, 대신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대신들이 감탄하여 아부하는 말을 하면, 고위는 기뻐하며 춤을 추었고, 자리에서 관계를 했다. “옥체횡진”이라는 고사는 이렇게 하여 나오게 것이다.

 

바로 고위로 하여금 잠시도 떨어져있고 싶어하지 않게 했던 풍소련은 전쟁중에 적지 않은 이적행위를 벌인다(고위는 그녀의 말을 모조리 따랐다). 그리하여 북제의 멸망은 가속화된다.

 

북주의 주무제는 고위가 음란, 혼용한 것을 보고 친히 정벌에 나선다. 북주의 군대가 진주를 맹공할 , 고위는 풍소련을 데리고 부근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 군대를 보내어 진주에 증원하기로 한다. 그런데, 풍소련은 이때 한창 사냥에 재미를 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번만 돌자고 얘기한다. 그리하여 후주는 다시 한번 사냥을 돌고나서 군대를 증원하는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사냥이 끝날 때쯤에 진주는 이미 주인이 바뀌었고, 북주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북제의 군사중진 평양(지금의 임분) 금방 북주에 점령당한다. 풍소련은 전쟁도 사냥처럼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위에게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수복하는 전투를 하자고 조른다. 그녀는 친히 전쟁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고위는 과연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 북제의 대군이 평양성에 도착한다. 사람과 말이 평양성으로 쳐들어가려고 , 고위는 돌연 공격을 중단시킨다. 그리고는 풍소련을 불러서 전쟁장면을 보게 한다. 풍소련은 거울 앞에서 한참을 화장하고 여러 부른 다음에야 나타난다. 이때 방어하던 북주의 군대는 무너진 성벽을 고치게 된다. 결국 북제군대는 공격의 절호시기를 놓치게 된다.

 

이때, 고위는 평양에 대한 총공격명령을 내리려고 한다. 그런데, 풍소련은 날이 이미 어두워진 것을 보자, 공성전의 재미있는 광경을 없다고 생각하여, 내일 다시 싸워달라고 부탁한다. 다음날은 북풍이 거세어, 풍소련은 다시 전쟁을 늦추자고 한다. 결국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좋을 때까지 기다리는데, 북주의 증원군이 도착한다. 양쪽 군대는 피튀기게 싸웠지만, 북제군이 결국 승리하지 못하고 만다.

 

양군이 교전할 북제의 군대는 약하지 않았다. 나쁜 일이라면 풍소련 때문에 군심이 흩어진 것이다. 당시 고위와 풍소련은 나란히 말을 타고 전투를 관전했다. 돌연 돌연 동쪽 날개부분에서 약간 퇴각하면, 풍소련은 놀라서 얼굴색이 변하며, “군대가 패했다”고 소리쳤다. 고위의 수하장수들은 “진격하고 후퇴하는 것은 전투의 상리이다. 폐하께서 움직이시면 군심이 교란되어 수습이 힘들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위는 이를 듣지 않고, 풍소련을 데리고 멀리 도망쳐 버린다. 북제의 군대는 궤멸한다. 만여명이 피살당한다. 고위와 풍소련은 홍동까지 도망쳐온 다음에, 풍소련은 다시 장막안에서 화장을 고쳤다. 사람들이 북주의 군대가 공격해온다고 소리치자, 모두 다시 도망쳤다. 이때 고위는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감으로 하여금 진양으로 가서 황후의 복식을 가져오게 하여 풍소련을 좌황후에 봉하고, 도망치는 도중에 풍소련은 황후의 예복을 입어본다. 그녀는 옷을 입고 한참을 감상하다가 다시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없다.

 

북주의 군대가 곧이어 진양(태원) 공격한다. 풍소련은 나무로 만든 천교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불길한 조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진양을 포기하고 업성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후주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북주는 다시 북제의 중진 진양까지 손에 넣게 된다.

 

고위는 풍소련의 전쟁터에서의 애교를 받아주다가 망국에 이른다. 이는 역사의 비극이고 우스개이다. 당나라때의 시인 이상은은 <<북제>>라는 개를 지었다.

 

하나는 이렇다:

 

일소상경국편망(一笑相傾國便亡)

하로형극시감상(何勞荊棘始堪傷)

소련옥체횡진야(小憐玉體橫陳夜)

이보주사입진양(已報周師入晋陽)

 

하나는 이렇다:

 

교소지감적만기(巧笑知堪敵萬機)

경성최재착융의(傾城最在着戎衣)

진양이함휴회고(晉陽已陷休回顧)

갱청군왕엽일위(更請君王獵一圍)

 

진양이 함락된 , 주무제 우문옹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북제의 수도 업성으로 진격한다. 고위는 업성까지 물러난 , 황태자 고항에게 황제위를 선양한다. 고항은 당시 나이 8세였다. 6 정월, 고항은 업성에서 제주로 도망친다. 우문옹은 업성을 포위공격한다. 서문이 불에 타고, 북제군대가 패배했다. 고위는 백기를 이끌고 동으로 도망친다. 북주의 군대는 업성에 진입한 , 북제의 왕공이하 관리들이 모두 항복한다. 고항은 제주에서 사람을 시켜 옥새를 영주로 보내어 임성왕 고개에게 양위한다. 금방 무상황이 고위는 다시 청주로 도망친다. 우문옹은 위지근을 보내어 고위와 고항을 청주까지 추격한다. 북제장군 고아나굉이 투항한다. 고위, 고항은 십여기를 이끌고 황급히 남으로 도망친다. 진나라로 투항하려는 것이었다. 남교수에 이르러 주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힌다. 이월, 주나라군대는 신도를 함락시키고, 소황제 고개 광녕왕 고효형등이 모두 포로로 잡힌다. 그후 주무제는 군대를 보내어 각지의 반란세력을 진압한다. 북제는 망하고, 북주가 북방을 통일한다.

 

포로로 잡힌 , 고위는 주무제에 의하여 온공(溫公) 봉해진다. 망국지군인 고위는 주무제에게 풍소련을 자신에게 하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주무제는 호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천하를 신발처럼 여기는 사람이다. 늙은 여자 하나를 그대에게 주기 아까워하겠는가? 풍소련을 고위에게 하사한다. 그후에 주나라의 태묘에 포로를 바치는 의식이 진행된다. 고위등 가족들과 대신 수백명은 포로로서 투항하는 모습을 하고, 주나라의 태묘에 무릎을 꿇는다. 이에 이르러, 북제의 50, 162, 330만호는 모조리 북주로 편입된다. 그후에 연회를 베푸는데, 주무제는 고위에게 춤을 추라고 시키고, 고위는 춤을 춘다.

 

반년후, 뿌리를 뽑아버린다는 차원에서, 북주의 누군가가 고위가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한다. 고위와 종족 백여명이 모조리 피살된다. 여기에는 30여명의 왕야도 포함된다. 다만 고위의 동생중 백치인 고인영 장애자인 고인아만 남겨둔다. 이들은 서촉의 구석진 곳으로 쫓겨가서 일생을 마친다.

 

고위가 사사된 , 풍소련은 다시 주무제에 의하여 동생인 대왕 우문달에게 넘긴다. 우문달도 원래 호색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풍소련에게는 푹빠진다. 그리하여 대왕비 이씨는 잊혀지고 우울하게 보내게 된다.

 

얼마후, 우문달이 수문제 양견에게 피살된다. 양견이 황제에 오른 , 다시 풍소련을 우문달의 정비 이씨의 오빠인 이순(李詢)에게 하사한다. 당시 우문달은 풍소련 때문에 이비를 냉담하게 대하였으므로, 이제 이순의 모친이 딸을 위하여 복수를 한다. 풍소련에게 베로 만든 치마를 입게 하고, 하루종일 방아를 찧고, 나무를 하며, 밥을 짓고, 옷을 빨게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욕을 해대고 수시로 질책하고 채찍질했다. 풍소련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