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석(李碩)
석륵(石勒), 석호(石虎)의 후조(後趙)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왕조이다. 왜냐하면 후조의 황족은 모두 중앙아시아에서 온 백인종이었기 때문이다. 문헌에 기록된 이래 한나라까지, 중국은 서방의 백인종과 접촉해본 적이 없다. 중원주변의 융, 적, 강, 흉노 등등은 모두 한족과 마찬가지로 황인종이다. 인류학명으로는 동아시아몽골인종이다.
신강의 로프노르(Lop Nor, 羅布泊)의 누란(樓蘭) 지역에서는 백인종의 무덤과 미이라가 발견된 바 있다. 탄소14연대측증에 따르면 기원전 수천년전이다. 이들 백인종은 아마도 유라시아대륙의 한가운데 있는 초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신강으로 이주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1천년이후, 이들은 신비하게 소멸한다. 원인은 불명이다. 당시의 중원세계는 그들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도 없다. 양자간에는 접촉이 발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간에는 기나긴 하서주랑(河西走廊)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기원전138년이 되어 장건은 한무제의 명을 받아 서역에 사신으로 간다. 그는 아직도 흉노족이 점령하고 있던 하서주랑과 신강을 지난다. 연도에 만난 사람의 얼굴모습, 체형은 내지인들과 차이가 없었다. 파미르고원을 넘어가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경내에 있는 대완국(大宛國)에 도착하자, 장건은 놀랍게도, "눈이 깊고, 수염이 많은" 백인종을 만나게 된다. 자건은 대완 현지사람들에게 물어보고서야 서쪽으로 가면 안식국(지금의 이란)이 있고, 중간에도 많은 소국이 있으며, 그곳의 주민들이 모두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발견은 한무제로 하여금 서역에 대한 흥미를 배가시켰다. 그후 40년동안 한나라군대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정벌군을 보내고, 흉노인의 수중에서 하서주랑과 서역을 빼앗는다. 이때부터, 한제국은 중앙아시아의 백인종과 직접 연락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동한시대 전기에 반초, 반용 부자 두 명은 서역에서 수십년을 힘들게 경영하여, 한왕조의 이곳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한다. 이때까지 백인종은 여전히 신강으로 들어오지 않았었다.
동한의 사학자 반고는 반초, 반용의 친척이다. 그가 <한서>를 쓸 때, 반초부자가 조정에 낸 보고서를 참고하여, 사실대로 당시의 서역상황을 기록한다: 서역남북도(신강 타클라마칸사막의 남북 양쪽)의 각 소국의 주민은 내지(중원)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 단지 소륵(지금의 신강 서쪽끝의 카슈카르지구)에서 서북으로 가거나, 혹은 대완국에서 서쪽으로 가면, '깊은 눈의 많은 수염'을 지닌 사람들의 소국이 일부 있다. 반고는 이들을 "새종(塞種)"이라고 칭했다. 현대학술계에서는 고대 동이란어계의 소그드족이라고 생각한다. 기실 그들의 민족구성은 단일하지 않다.
수당시기 몽골초원을 누빈 돌궐어 백인종은 이때 아직 알타이상 이북의 초원 깊은 곳에 살고 있었고,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제국과는 연결이 없었다.
로프노르에서 백인종이 소멸한 후, 한나라의 세력이 중앙아시아에까지 미치기 이전에 서역지역은 소국이 난립했고, 분열되어 할거했다. 초원유목민족은 시시때때로 약탈하였다. 그래서 중앙아시아백인은 파미르고원을 넘어 신강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이 곳을 점령한 이후, 통일되고 안정적인 질서가 세워진다. 동서방의 이민의 길이 점차 개통된 것이다.
동한중기때부터 중앙아시아의 상인, 이민이 파미르고원을 넘어오고, 점차 서역남북도에 출현한다. 현재 신강에서 출토되는 거로문(佉盧文) 목독(木牘), 소그드문 지장(紙張)중 가장 오래된 것도 겨우 2세기때의 것이다. 즉 동한 중후기이다. 글의 일부는 새로 신강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서쪽에 있는 고향사람들에게 보내는 서신이거나 처음 신강에 온 경력과 이곳의 상업소식등을 전하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내지의 전란이 빈번했다.그러나 중앙아시아인들의 동쪽으로의 이주를 막지는 못했다. 조위(曹魏)와 서진(西晋)때, 백인이민은 하서주랑과 중원지구에 나타난다. 한나라사람들은 원래 흉노등 서북방유목민족을 호인(胡人)이라고 불렀다. 이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이들 백인이민족들을 "갈호(羯胡)"라고 부른다. 그러나, 백인종들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위진남북조때는 "호인(胡人)"이 중앙아시아백인을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된다. 북방초원의 황인종 유목민족은 더 이상 호인이라고 불리지 않게 된다.
삼국시대와 서진시대(3세기)에, 돈과 문화를 지닌 호인은 왕왕 장안, 낙양등 대도시에 정착했다. 그리고 대규모의 동서방무역을 경영한다. 재력이 부족한 하층민은 대부분 유목민출신이다. 이들은 고용되어 일하거나, 가축을 기르거나, 아예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토착민들에게 배척을 받아, 사람들이 많이 살고, 땅값이 비싼 지방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황량한 섬북고원을 향하여 계속 동쪽으로 가서 병주(산서)지구로 들어간다. 몽골초원에서 병주에는 흉노, 선비등 유목민족이 비교적 많았고, 민족성분이 복잡했다. 그래서 새로 진입한 사람들도 쉽게 자리를 잡게 된다. 호인들은 이곳에서 반농반목의 생활을 한다. 그리고 병주에 도착한 후, 중앙아시아 호인은 황인종유목민들과 통혼을 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선비족에는 적지 않은 백인종의 성분이 섞이게 된다.
새로 들어온 호인들과 토착주민들간에는 충돌이 없을 수 없었다. 설륵의 가족은 대체로 조부때인 조위 후기에 병주로 들어왔다. 석륵은 병주에서 농사를 지을 때, 한족 이웃인 이양(李陽)과 작은 못을 놓고 다투었고, 여러번 폭력사건이 벌어졌다. 백인여자들은 자색이 뛰어나 현지의 고관대작들이 노리는 대상이 된다. 조위 후기에, 새로 임명된 병주자사는 출발전에, 낙양의 친구,동료들로부터 호인여자노비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앞다투어 받는다. 심지어 대금을 선지급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새로 이민온 사람들은 사람도 적고 세력이 약하여 항상 현지의 권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대상이 된다. 사마등은 그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차별대우와 멸시가 폭발한 것일 뿐이다.
새로온 이민들은 자신의 언어와 종교를 가져왔다. 고대 중앙아시아네는 배화교가 유행했다. 가장 오래된 앗시리아제국(고대 그리스인과 싸웠던 페르시아제국)은 배화교를 국교로 삼았었다. 이 종교는 이민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온다. 상업에 종사하던 호인들은 문화수준이 있었고, 자신의 언어를 글로 쓸 수 있었다. 현재 출토된 많은 소그드문서는 바로 그들이 쓴 것이다. 하층호인들은 자신의 모어를 쓰지 못할 뿐아니라, 배화교의 기본 교의조차 점점 잃어버린다. 그래서 석륵, 석호때가 되면, 그들은 서방에서 전래되어온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습속은 여전히 배화교의 영향을 보류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죽은 후에 화장을 하고 뼈를 황야에 묻는다든지, 화염을 숭배하여 야간에는 불을 붙이는 것을 금지한다든지, 업성의 석호 궁정에는 배화교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단도 준비되어 있었다.
중앙아시아호인은 원래 이름만 있고, 성은 없었다. 석륵가족의 성이 "석"이 된 것은 그들이 반란무장군에 가담했을 때, 상사였던 군관이 아무렇게나 지어준 것이었다. 아마도 명부를 작성하여 관리하기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중앙아시아에서 온 호인들은 고향 소국의 이름을 성으로 삼게 되는데, "강(康)", "안(安)", "사(史)"등이 그것이다.
석륵, 석호의 전쟁은 민족의거나 민족전쟁이 아니다. 석씨무장세력이 강해지면서, 그 안에는 가난한 한족의 수량이 점차 호인의 수량을 넘어서게 된다. 낙양의 상층 소그드호인들은 석륵에 의탁하려 하지 않았다. 311년, 석륵의 군대가 낙양을 점령하였을 때, 많은 호인상인들과 진나라의 고관들은 함께 보루로 도망쳐서 피난한다; 1907년, 돈황에서는 한 소그드 호인상인이 고향에 보낸 서신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낙양과 업성의 함락을 문명세계의 대재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경영하던 국제무역체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
염민전쟁은 수십만의 호인을 말살시킨다. 그러나 그후에도 중앙아시아 호인은 계속하여 중국으로 들어온다. 남북조 후기에, 장안, 낙양과 업성에는 모두 많은 호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의 비단을 서방의 비잔틴제국에 팔았다. 선비족의 북위, 북제, 북주조정에는 모두 호인과 배화교신앙을 지지했다. 중국과 배화교의 이런 밀접한 관계는 오백여년간 지속된다. 당나라전기에 이르러, 이슬람교를 신앙하는 아랍군이 사산조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을 멸망시키고, 중국세력을 중앙아시아에서 축출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이런 관계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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