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예방육(倪方六)
진패선(진무제)
사건은 왕왕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민간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도굴사건을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소명태자 소통(蘇統)은 두즉(杜崱)의 조상묘를 파헤치고, 나중에 두즉은 소통의 묘를 파헤친다.
이 글에서 얘기할 것도 이런 인과응보형의 도굴사건이다. 남조 진나라의 개국황제인 진패선은 ‘후경의 난’의공신인 왕승변을 죽이고, 왕승변의 아들인 왕반(王頒)은 여러해후에 부친의 복수를 하는데, 살아서 진패선을 죽이지 못했으니, 그의 능묘를 도굴하여 진씨집안의 풍수를 파괴한 것이다.ㅇ
왕승변과 진패선은 모두 소씨의 양(梁)나라 중신들이다. ‘후경(侯景)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왕승변과 진패선은 백모주에서 단에 올라 피를 뽑아서 맹세한다. “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고, 서로 속이지 않으며,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신이 벌할 것이다” 그런데, 이같이 한마음으로 일하던 동료도 후경의 난이 평정된 후에 정치적인 입장에 차이를 보이게 된다.
<<양서.왕승변전>>(권45)에 따르면, 후경이 피살된 후, 소연(蕭衍)의 일곱째 아들인 상동왕 소강(蕭絳)이 강릉(지금의 호북성 형주)에서 황제에 오르니, 그가 양원제(梁元帝)이다. 왕승변, 진패선은 모두 소강의 중용을 받아 왕승변은 건강(建康, 남경)을 지키고, 진패선은 경구(京口, 진강)을 지킨다.
소강이 죽은 후 상황은 바뀐다. 당시 서위(西魏)는 양나라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는데, 양나라 승성3년(554년) 구월, 서위의 승상 우문흑태가 병력을 이끌고 강릉을 기습했다. 소강은 사람을 보내어 멀리 남경에 있던 왕승변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시기가 늦어서 구원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소강은 이미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한다.
왕승변과 진패선의 갈등은 소강이 죽은 후 누구를 황제로 앉히느냐의 문제에 있었다.
왕승변과 진패선의 의견은 처음에는 일치했다. 즉 양원제의 아홉째 아들이자, 당시 강주자사로 있던 소방지(蕭方智)를 황제로 앉히는 것이었다. 그가 양경제(梁敬帝)이다.
소방지는 나이가 겨우 13살밖에 되지 않았다. 군국대사는 자연히 왕승변과 진패선 두 사람이 주도했다. 그런데, 이때 북제(北齊)의 황제인 고양(高洋)도 위기에 처한 양나라의 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는 정양후 소연명(蕭淵明)을 양나라의 괴뢰황제로 앉히고자 했다. 소연명은 소연의 조카인데, 동위에 포로로 잡혔다. 소연이 여러 번 구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바 있다.
이때 북제는 소연명을 양나라로 돌려보낸다. 당시 조정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왕승변에게 동의하도록 압박을 가한다. 왕승변은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압력에 밀려, 묵인하게 된다. 소연명이 강을 건너 건강으로 오던 날, 왕승변은 감히 수행을 하지 못하고, 배를 강의 중앙에 정박시키고 강안에는 닿지 않았다. 소연명이 괴뢰황제에 오른 후 왕승변의 관직을 올려주고 녹봉도 올려주었다.
왕승변의 행위는 진패선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진패선은 왕승변이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경구(진강)에서 병력 10만을 일으켜, 남경을 공격한다. 괴뢰황제 소연명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왕승변의 군대는 당시 성 서쪽의 석두성에 있었다. 그들은 진패선이 공격할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아무런 방어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진패선의 병력은 쉽게 성벽을 넘어 공격해 들어간다.
당시 왕승변은 정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아들 왕외(王頠)를 데리고 남문루에 올라서 버티면서, 진패선에게 공격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한다. 진패선은 그들에게 내려오라고 요구한다. 왕승변은 누각을 내려가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려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진패선은 누각 아래에 불을 지른다. 왕승변은 이를 보고는 내려가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내려가면 그래도 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아들을 데리고 내려가서 붙잡히게 된다.
이 전에 큰아들 왕의(王顗)가 왕승변에게 진패선의 배신을 대비하는게 좋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왕승변은 듣지 않았다. 이제 일이 터지니 후회해도 늦은 일이다. 그날 밤, 진패선은 왕승변과 왕외를 죽여버린다.
왕씨와 진씨 두 가문의 원한은 이렇게 맺어졌다.
권력을 잡는데 가장 큰 장애였던 왕승변을 처리한 후, 진패선은 간이 커지게 된다. 그는 양나라를 대체하여 진나라를 설립하고, ‘영정(永定)’이라는 연호를 쓴다. 그러나, 진나라도 수명이 길지는 못했다. 32년만인 589년에 수문제 양견에 의하여 멸망한다.
<<북사.왕반전>>(권84)에 따르면, 왕반은 왕승변의 어린 아들이고, 어려서부터 뜻이 있었고, 호탕하며 시원시원했으며, 문무에 모두 능했다. 왕승변이 후경의 난을 진압하러 갔을 때 왕반은 인질로 소강에게 잡혀있었다. 소강이 서위의 포로로 잡힌 후에는 다시 서위에 인질로 가 있었다. 새옹지마라고 그 덕분이 그는 진패선이 왕승변의 일가족을 모두 죽일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부친이 진패선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반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린다. 기절했다가 한식경이 지나서 다시 깨어나고, 깨어나서는 다시 통곡했고, 식사도 하지 않았다. 부친상이 끝난 후, 포의를 입고 야채를 먹고, 풀을 깔고 잠을 잤다. 이를 통해서 부친과 형의 원수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했으니, 춘추시대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과 비슷한 면이 있다.
서위를 북주가 대체한다. 주명제 우문육은 그에 대하여 들은 후에 그를 도덕적 모범으로 칭찬한다. 왕반은 북주 조정에서 관직을 받는다.
북주의 후반기에, 권신 양견이 정치를 주도했는데, 양견은 자신의 외손이자 8살된 정제(靜帝) 우문연(宇文衍)에게서 황제 자리를 빼앗아 오고, 수(隋)나라를 건립한다.
수나라가 건립된 후, 왕반의 관운이 찾아온다. 개황초년(581년), 남만을 평정한 공로로 사구현공에 봉해진다. 나중에 양견이 진나라를 공격하는 대책을 논의할 때도 그의 계책을 중시한다.
양견은 왕반의 계책을 읽은 후에 이상하다고 느낀다. 남조의 인물인 그가 왜 이렇게 진나라를 무너뜨리는데 적극적일까? 그리하여 양견은 왕반을 부르게 된다. 왕반은 울면서 자신의 신세내력을 얘기한다. 양견은 그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연유를 알게 된다. 진나라를 공격할 때, 왕반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전투에 참전한다. 수백명을 이끌고 적진을 쳐들어가고 전투중에 부상도 입는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왕반은 비밀리에 부친의 옛날 수하병사 천여명을 불러모아서 복수를 도모한다.
왕반은 그들의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중 한 명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왕반에게 묻는다. 이미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무너뜨렸고 부친의 원수의 나라를 전복시켰는데, 결국 복수를 하여 원한을 푼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도 슬퍼하는가? 혹시 진패선이 너무 일찍 죽어서 당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해서인가?
그는 이어서 이렇게 얘기한다. 만일 그 원인으로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이라면, 아예 진패선의 묘를 파내서 시체를 관에서 끄집어내서 효성을 표시하는게 어떻겠는가?
옛날에 오자서의 부친, 형이 초평왕에게 살해된 후, 초평왕이 이미 죽었으므로, 친히 그를 죽이지 못해서 나중에 초평왕의 묘를 파헤친 후 시신에 300대의 채찍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반은 바로 그런 의도였는데, 부친의 수하가 이 말을 하자 바로 머리를 땅에 박으며 감사를 드렸다. 힘을 너무 강하게 쓰는 바람에 이마가 깨져서 피가 날 정도였다.
왕반이 진패선묘를 파혜친 사건은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다.
진패선은 왕승변을 죽인 후, 즉시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다. 소방지를 황제로 올렸다. 이때 조정의 모든 일은 진패선이 혼자서 처리했다. 황제보다도 권력이 컸다. 557년, 진패선은 소방지를 핍박하여 양위하게 한다. 전국옥새를 건네받는다. 이리하여 양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립된다. 도성은 여전히 건강(남경)이었다.
진나라가 양나라를 대체한데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만일 진패선이 아니었다면 양나라는 아마도 훨씬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실사구시적으로 본다면 진패선은 좋은 황제였다. 웅재대략을 지닌 보기드문 근검한 황제였다. 군웅이 쟁패하던 시대에 진패선은 사나이라고 할 수 있고, 일세의 영명한 군주였다. 남경의 백성들은 진나라초기에 비록 짧았지만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된다.
진패선은 국사로 너무 과로하여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영정3년(559년) 유월초십일에 병이 난 후에도 여전히 국사를 처리했다. 유월 십육일 친히 소송사건을 처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병세가 위중해져서, 3일후에 선기전에서 병사한다. 당시 나이 57세로 겨우 3년간 황제로 있었다.
진패선이 죽은 후에 그의 조카인 진천(陳蒨)이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문제이다. 진문제는 당시 상원현(지금의 남경시 강녕구)의 동남 30리 지점에 있는 방산 서북의 “팽성역측(彭城驛側)”의 길지를 골라서, 진패선을 묻는다. 능의 이름은 만안릉(萬安陵)이라고 한다. 그해 음력 팔월 십일일, 진패선의 영구는 능에 묻힌다.
왕반은 만안릉을 파헤치기로 결정한 후 그냘 저녁에 바로 행동에 들어간다. 그도 우려하는 바가 있었다. 진패선은 황제이므로 능묘의 봉토가 아주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하룻밤만에 파헤치지 못하여, 진패선의 시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날이 밝게 되면 일이 폭로될 것이다. 그래서 부친을 따르던 수하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왕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스스로 삽과 괭이를 준비해서, 행동에 들어간다.
천여명이 한꺼번에 묘를 파내자, 아무리 큰 봉토라도 하룻밤이면 파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남조의 황제릉은 한나라 당나라와는 달리, 큰 도로변에 만들었다. 산을 깍아서 만든 것이 아니므로, 도굴이 용이했다. 도굴방지수단도 간단하고 허술했다.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남아있는 남조의 황제릉은 거의 없다.
이들은 다 함께 삽을 휘둘러, 금방 묘실까지 파들어가고, 진패선의 거대한 관을 만나게 된다.
진패선은 559년에 묻혔다. 왕반이 도굴한 것은 개황초년이므로 이미 40년이 흘렀다. 왕반은 진패선의 관을 깨도록 시켰다. 진패선의 시체는 완전히 썩어 있었는데, 수염은 아직 다 떨어지지 않았고, 뼛속에 끼어든 터럭까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왕반은 미친 듯이 진패선의 시체를 끌어냈다. 진패선의 시신을 나무더미위에 올려놓고 진패선의 시신을 불에 태워서 가루로 만든다. 왕반은 그래도 한이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깜짝 놀랄 행동을 보인다. 진패선의 뼛가루를 물에 타서 “골회차(骨灰茶)”를 만들어 마셔버린 것이다. 이는 중국고대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다.
왕반은 수나라의 관리이므로, 도굴을 한 것은 수나라의 조정이미지를 흐릴 수 있었다. 왕반도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자신을 묶어서 진왕 양광의 앞으로 가서 죄를 받겠다고 한다. 양광은 사정을 다 들은 후에 ‘나는 인의로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왕반의 행위도 효와 의를 중시한 것이니 내가 어찌 그에게 죄를 묻겠는가?”
그가 이렇게 말을 하자 아무도 왕반의 도굴죄를 추궁할 수 없었다. 나중에 관련부서에서는 그의 전투에서의 공로를 가지고 상을 청하여 그는 관직도 올라가고 하사도 많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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