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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은 어떻게 신격화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2. 1. 7.

글: 호각조(胡覺照)

 

제갈량이 신격화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 본인의 자질에 공로를 돌려야 한다. 즉, 현상(賢相), 염리(廉吏)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는 그의 신분때문이다. 이는 통치계급에게 필요한 것일 뿐아니라, 전체 사회에서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각종 갈등을 해소해주는 윤활제이며, 사회를 상대적으로 안정시키고 지탱해주는 것이다. 이런 관리는 아주 드물다. 그래서 더욱 귀한 것이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군, 정, 재, 문의 대권을 한 몸에 거머쥐고 9년여동안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다보니 개인숭배가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외에 3가지 요소가 더 합쳐져서 개인숭배는 더욱 심화된다: 첫째, 방대한 국가기기는 민중을 엄밀하게 통제한다. 구만사천명에 불과한 촉국에서 관리가 사만여명이고 군대가 십오만명이다. 평균 27.5명이 관리 1명을 먹여살리고, 5명의 사병을 먹여살려야 한다. 후방의 생산제일선에서 뛰는 사람은 이제 노인과 어린이들 뿐이었다. 민중이 방대한 국가기기를 먹여살리고 있는데, 방대한 국가기제는 거꾸로 민중들의 머리위에 걸린 날카로운 검이 되었다. 노인과 어린이가 주축이된 서촉에서 반항의 역량을 키우기는 어려웠다.

 

둘째, 대외전쟁으로 민중의 시선이 옮겨졌다. 불만정서는 쉽게 적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덮여버린다. 원래 자신을 대표할 수 없는 민중들은 더더욱 전쟁을 승리로 끝내면 남편 아들이 영광스럽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모두 제갈량에게 걸었다.

 

셋째, 엄격한 형벌로 위협했다. 이는 제갈량의 치국에 있어서의 기본사상이다. 엄격한 형벌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백성들의 불만정서는 가슴 속에 숨겨져 있을 뿐, 서로 소통되지 못했다. 고압적인 분위기하에서 여론은 일률적으로 찬가만 부르게 된다. 이렇게 오래 지나다보니, 이들 허구의 찬사는 전체 국민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으로 되게 된다.

 

제갈량이 중원을 다섯번째 정벌할 때, 형세는 이릉지전전보다 훨씬 열악했고, 승상의 신분은 유아독존의 황제보다 훨씬 못했지만, 동료들 중에서 감히 그 누구도 반대의견을 내지 못했다.이는 제갈량이 개인숭배가 이미 형성되고, 사람과 신은 서로 의사교류할 수 있는게 아니라, 그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으로 굳어졌다.

 

진수는 익주 파서 안한현(지금의 사천성 남충시)에서 태어났다. 233년에 태어났으니, 제갈량이 죽었을 때 겨우 두 살이었다. 촉국전학에서 배우고 초주(교육부 차관 혹은 차관보를 지냄)를 따랐다. 관료가 된 후에는 관각영사를 지낸다. 그의 부친으 마속의 부하로 군에 있었고, 고급장교였다. 군인은 사고가 비교적 단순하다. 공을 세워서 처자식이 잘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래서 전쟁을 숭상한다. 그래서 제갈량의 치국방략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의 부친의 인식은 진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좋은 집안출신인 진수는 전쟁이 하층민중에게 가져오는 심각한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진수의 후배신분이나 낮은 관직을 보면 그는 자연히 제갈량의 그림자 아래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가 제갈량이 죽은 후, 장완, 강유등은 환관 황호의 전권과 작태를 해결하지 못했다. 진수도 아부를 잘 하지 못해서 쫓겨난다. 그후 제갈량에 대하여는 더욱 숭배하는 마음을 품는다. 그러다보니 제갈량의 과실은 눈에 띄지 않고 그의 공로가 더욱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기에서 여러가지 편파적인 내용이 나온다. 그런 내용은 아래의 네 가지 분야에서 벌어졌다.

 

첫째, 제갈량시대에 서촉은 전형적이 전시경제체제이다. 그 특징은 모든 것은 전선이 우선이고, 전쟁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민중의 질곡생사는 돌아볼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전기에서, 민중들이 입은 전쟁의 고통은 단 한 글자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촉나라인구가 급격히 하락한 사실과 원인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북벌전쟁때 전방장병이 적국에 투항한 것도, <진서.선제본기>에는 분명히 적혀 있는데, <삼국지>에는 이를 숨겼다.

 

둘째, 제갈량의 치국과 덕정을 기술하면서 결론적인 언어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실제사례로 뒷받침되지 않았다. 이 책의 다른 사람의 전기와 비교하면 아주 다르다. 이는 역사기록의 증거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셋째, 제갈량의 충신이미지를 만들기 위하여, 진수는 사실을 왜곡했다. 제갈량, 제갈균 형제 두 사람이 융중으로 가서 농사를 짓는 부분에서, 진수는 사실을 꼬아서 적었다: 숙부인 제갈현이 두 사람을 데리고 예장(지금의 남창)으로 가서 태수직위에 취임하였다가 나중에 조정에서 주호로 바꾸어 보내자, 제갈현은 두 사람을 데리고 형주로 가서 유표에 의탁한다. 제갈현이 죽은 후, 제갈량 현제 두 사람은 농사를 짓는다. 이것은 좀 말이 되지 않는다. <헌제춘추>에 기록된 사실은 이렇다: 예장태수 주술이 죽은 후 유표는 제갈현을 추천하고, 원술의 동의를 받는다. 제갈현은 두 조카를 데리고 예장으로 가서 태수에 취임한다. 그러나 조정은 이 유표의 추천을 비준하지 않고, 주호를 보내어 인수인계받게 한다. 아마도 제갈현이 인수인계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주호는 양주자사 유요에게 병력을 빌어 쳐들어간다. 제갈현은 전투에서 패배후 서성을 물러났는데, 서역의 백성이 들고 일어나 그를 죽여버린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형제 두 명이 형주로 간 것은 그저 자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넷째, 충신이미지를 만들기 위하여, 진수는 제갈량이 신하로서의 절개를 잃었던 것을 숨기고 쓰지 않았다. 남정을 끝내고 성도로 돌아온 후, 이 별것 아닌 공로를 가지고 제갈량은 기꺼이 오석(五錫)을 받는다. 즉, "금부월 1개, 곡개 1개, 전후우보, 고취 각 1부, 호비 육십인" 조조와 비교하자면, 제갈량은 훨씬 마음이 조급했던 것같다. 이것들은 모두 충신의 이미지를 해치는 일이다. 진수는 이를 숨기고 언급하지 않았다.

 

진수는 제갈량을 끌어올리고, 그에게 불리한 내용은 숨겼다. 거의 완벽한 사람의 지경에까이 끌어올린다. 후인들중에서 진수는 부친이 제갈량에 의하여 머리가 박박 깍인 적이 있어서 이를 보복했다고 하는 것은 더 따져보지 않아도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제갈량전>에 가정에서의 실패책임을 분석하면 아주 분명하다. "마속은 제갈량의 이동배치를 따르지 않았고, 일련의 잘못된 결정과 배치를 했다." 진수의 부친은 마속을 따랐던 장수이므로, 마속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그 부친이 잘못했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 사료를 보면, 진수가 보복심리를 지녔다는 혐의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부친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미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역대 정치가, 사학가는 2급 미사일추진기이다.

 

다섯 가지 원인으로 제갈량의 충신 이미지는 수립된다.

 

첫째, 유비가 영안궁에서 아들을 맡길 때, 명확히 표시했다. "그대의 재주는 조비보다 열배이이,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킬 것이고, 대사를 이룰 것이다. 만일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만일 재주가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취해도 된다." 이런 조서는 역사상 보기 힘든 일이고 사상유례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조서가 있으면, 제갈량은 이미 유선을 대체하더라도 구실이 충분하다.

 

둘째, 유비가 병사한 후, 제갈량은 이미 정치, 재정등 대권을 움켜쥐었다. 남정을 통하여 이엄으로부터 병마대원수라는 아주 중요한 권력을 빼앗아 온다. 이미 군, 정, 재, 문의 대권을 한 몸에 지녔다. 황제라는 이름만 없는 황제가 된 것이다. 황제 유선은 그저 간판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셋째, <출사표>의 구절인, "이렇게 성의를 다하는 것은 선제에 보답하고 폐하에 충성하는 직분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우매하고 가소롭지만, 일반중국인들의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한다는 도덕표준에 잘 부합한다.

 

넷째, 오장원에서 병사한 비극적인 결말은 원래 제갈량의 완벽을 추구하는 책략이고, 이를 통하여 다섯번에 걸친 실패의 책임을 덮어버렸다. 후세인들이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그는 "국궁진췌, 사이후기"라는 영예를 얻게 된다.

 

다섯째, 진수는 본인전기에서 제갈량과 이엄간에 "구석" "십석"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내용을 감추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충신의 이미지는 더욱 커지게 된다.

 

유선은 옥새를 지니고 있지만, 군권을 가진 자가 황권을 가질 가능성이 있었다. 유비의 임종유언은 제갈량으로 하여금 황제의 보좌에 순조롭게 앉을 수 있도록 하는 길을 닦아놓았다. 그러나, 제갈량은 감히 모험을 벌이지 않는다. 그저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점차 추진한다. 재미있는 것은 대체하려는 의도가 아직 분명해지지 않았을 때, 그는 이미 오장원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인격을 완벽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동시대인 조비, 사마염과 비교하자면, 그들은 군권을 장악한 후, 즉시 군권을 이용하여 황위를 차지한다. 그들의 선조인 조조, 사마의, 사마소등은 보다 진중했지만, 모두 핍궁, 시해 및 궁정정변은 있었다. 이는 제갈량의 인격적인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충성의 표준에서 보자면 제갈량은 거의 완벽한 사람이다. 그의 자손들에게도 하자가 없었다. 그 아들 제갈첨은 비록 장수의 재목은 아니었지만, 병력을 이끌고 부릉으로 가서 등애를 막을 때, 황종의 의견에 따라 산에 의지하여 적을 막는 전략을 채택하지 않고, "적을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정확한 전략을 취한다. 그리하여 등애의 부장은 먼 길을 돌아 면죽을 포위한다. 이것은 그의 재능분야일 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부친의 충성 의발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일찌기 등애가 주겠다는 '낭야왕'등 고관대작의 유혹을 물리치고, 사신의 목을 벰으로써 거절의 의사를 명확히 한다. 그리고 촉국을 위하여 면죽에서 전사한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살신성인을 이룸으로써 부친의 절개와 명성에 멋진 마침표를 찍는다. 손자인 제갈상은 전장터로 나거서, 위군에게 부닥쳐 가서 죽었다. 제갈상의 죽음은 조부의 충절에 또 다시 금상첨화를 이루었다. 이처럼 불사이군하고 그 후손까지도 마찬가지였으니, 후대의 존경을 받을 만하다. 제갈량은 통치계급이 표방하고 숭상하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수가 <제갈량전>을 쓸 때 비록 그를 높이 받드는 혐의는 있지만, 그래도 제갈량을 범인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이렇게 제갈량을 평가한 바 있다: "치술(治戌)은 잘했으나, 기모(奇謨)는 부족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가 장수의 도략보다 뛰어났다." 이는 오차북벌에 대한 평가이다. 그러나 그저 그의 약점을 보았지, 그의 과실을 보지는 않았다. 아들 제갈첨을 평가할 때는 제갈첨이 서화에 뛰어나고, 명성이 실제보다 더 많이 났다고 평가했는데, 이것도 근거있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계급은 여전히 제갈량을 받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제갈량이라는 깃발에 묻은 오점은 모조리 털어내야 했고, 진수의 결론도 뒤집어야 했다.

 

그후, 비록 많은 사학가들 최호, 주이존, 전대석, 조익등이 진수를 위하여 변명해주었고, 증거도 충분하였지만, 겨우 피동적으로 진수의 죄명을 씻어주었을 뿐, 제갈량의 결점과실을 확인할 담량은 없었다. 방현령과 기타 사학가, 정치가들이 이 충신의 기치를 수립하려는 정치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제갈량을 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은 <삼국연의>의 덕을 많이 보았다. 나관중 선생이 일부러 제갈량을 신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당시 시대 중국민중의 심리적인 요청을 반영시켰을 뿐이다.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나관중은 남송왕조의 통치하에서 생활했다. 당시, 남송이라는 몽골철기에 밀려서 도망온 정권은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받기 위하여, 문화인들에게 역사에서 근거를 찾게 만든다. 즉, 삼국시대 촉한 할거정권을 '화장'시킴으로서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복건의 남송 소조정은 여전히 정통정권이다. 정통정권이므로 당당하게 이를 기치로 내걸 수 있다. 문화인들도 역사를 마음대로 고칠 수 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삼국평화(三國評話)>벼전이 속속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삼국연의>로 모아진다. 여기에는 몇 가지 특징이 현저하다:

 

첫째, <삼국연의>는 역사를 거꾸로 말한다. 즉 촉한할거정권을 정통으로 보고, 조위정권을 한나라를 찬찰한 간적이라고 취급한다; 조조의 국가통일대업은 무시하고, 제갈량, 노숙의 두 <융중대>를 만들어 막 통일되려는 국가를 다시 분열시킨 일련의 행동을 극력 칭송한다. 이것은 역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중원민중은 '정통정권'을 갈망했고, 이를 근거지로 하여 반격을 가하여 최종적으로 몽골철기를 몰아내고 걍산을 통일시키고 싶어했다. 각종 <삼국평화> 버전의 출현은 강남의 민중들이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는데, 이는 모두 배출할 수 없는 여러가지 생각을 삼국시대를 빌어서 해소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제갈량은 민중이 바라는 인물이었다. 당시, 몽골인은 일사천리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고, 남송의 부패한 소정권은 이미 덕망을 갖춘 인물이 없었다. 나서면 모두 따를만한 우두머리급 인물이 없었다. 어린 황제는 그저 허수아비이고, 좌승상 문천상은 군사적 재능이 없어서 포로로 잡혀 죽는다; 우승상 진의중은 인품과 재능에서 뛰어난 점이 별로 없었다. 그는 황용등과 함께 간신 정대전을 공격함으로 인하여 육군자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관직에 진출한 이후에는 간신 가사도의 편이 되어 명성을 더럽혔다. 원나라의 대장군 바얀이 임안으로 밀고 들어올 때, 그가 나서서 화의협상을 벌이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그는 도의와 책임을 버리고, 국가안위는 돌보지도 않고 고향으로 가버린다. 남송망명정권이 멸망하기 전날, 재상의 지위에 있던 진의중은 다시 한번 책임을 버리고 월남남부의 점성으로 도망친다. 이것이 바로 당시 남송왕조의 정치형세이다. 연이은 실패와중에 중원의 민중들은 "군대가 패배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떨치고 일어서는 영웅위인을 바랐다. 홀로 굳건히 서서 하늘과 땅을 받치고 역사를 고쳐쓸 영웅을 갈망했다. 어디에 가야 그런 인물을 찾을 수 있을까? 현실에 없다면, 꿈에서라도 찾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촉한정권이 눈에 들어오고, 제갈량이 눈에 띈 것이다.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그를 끌어올리는데 여러가지 수법이 동원된다. 하나는 이화접목(移花接木)이다. 즉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교묘하게 제갈량이 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선차전, 풀배로 화살을 빌리는 것은 원래 손권이 밤에 배를 타고 조조군대의 수채를 감시할 때 피동적으로 임기응변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삼국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적극적으로 행한 것으로 그렸다. 황개가 조조군영을 불지르자는 건의를 한 것도, 제갈량의 공로로 옮겼다. 둘째는 무중생유(無中生有) 이다. 없던 일을 날조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비가 삼고초려후, 군사지휘권을 모조리 넘겨주는 것등이다. 셋째는 포풍착영(捕風捉影)이다. 예를 들어 적벽대전 전에 동오는 원래 통일과 분열의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설전군유(舌戰群儒)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넷째는 포폄참조(褒貶參照)이다. 예를 들어, 반장사의 부분에서 위연을 폄하함으로써 제갈량의 사람을 알아보는 현명함을 돋보이게 하고, 노숙을 멍청하게 그림으로써 제갈량의 총명을 돋보이게 하는 것등이다. 다섯째는 장신농귀(裝神弄鬼)이다. 제갈량의 지혜를 극도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팔진도, 노수제귀, 양천걸수등등을 허구를 창조한다.

 

제갈량은 소설 하나로 하늘을 날아오르는 영혼이 된다. 아마도 나관중은 이런 것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