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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 배후의 진실

by 중은우시 2011. 10. 27.

글: 호각조(胡覺照)

 

2년간 준비를 마친 후, 원래는 이엄(李嚴)이나 다른 장수가 담당할 예정이었던 남정(南征)업무를 제갈량은 "여러 장수들의 재능이 나보다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친히 나서게 된다. 이에 대하여 심복인 왕련(王連)은 글을 올려 반대의사를 표시한 바 있다: "이 곳은 불모의 땅이고, 전염병의 근원지이다. 일국의 명망을 한 몸에 걸머진 사람이 모험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삼국지.왕련전>). 그러나, 왕련은 제갈량의 깊은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갈량은 이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히 병사를 이끌고 남정에 나선다.

 

225년 봄, 제갈량은 병력을 이끌고 물길을 따라 월수(越)로 들어간다. 마충(馬忠)을 보내어 동남으로 장가(牂)(지금의 귀양부근. 관할지는 귀주성의 대부분)로 출병하게 하여 주포(朱褒)를 공격하게 한다. 이회(李恢)는 남쪽의 익주(益州)(익주군. 치소는 전지. 지금의 운남성 진녕의 동쪽). 제갈량이 부대를 이끌고 월수에 도착했을 때, 원래는 고정(高政)의 부대가 집결하면 타격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고정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켰고, 옹개(雍闓)와 측근들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맹획(孟獲)이 새로운 우두머리로 추대된다. 제갈량의 부대는 고정을 격파하고, 그를 죽여버린다. 맹획은 내분이후 아직 정비도 마치기 전에, 돌연 팔 하나를 잃은 셈이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부대를 이끌고 익주군으로 후퇴한다. 이때, 마충은 장가군 주포의 군대를 섬멸하고 주포를 참했다. 이회의 부대도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나중에는 승리했다. 오월, 제갈량은 부대를 이끌고 노수(瀘水)를 건너 운남으로 진군하여 맹획을 생포한다. 그후 널리 알려진 '칠종칠금'의 천고미담이 전해져 온다.

 

<한진춘추(漢晋春秋)>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제갈량의 부대가 남중(南中)에 도착했을 때, 맹획이 소수민족들 가운데 위망이 높다는 것을 듣고는 그를 생포하여 감화시키기로 결심한다. 생포한 후, 맹획으로 하여금 촉군의 진영을 구경하게 하고는 묻는다: "우리 군대가 어떠냐?" 맹획이 대답한다: "과거에 나는 촉군의 허실을 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이제 네 덕분에 보게 되었다. 이 정도에 불과하니, 내가 분명히 이길 수 있다." 제갈량은 웃으면서 그에게 돌아가서 군대를 정비한 후 다시 싸우자고 한다. 칠종칠금을 한 후에도 제갈량은 계속하여 풀어주려고 했다. 그제서야 맹획이 감동하여 성의를 담고 말한다. "당신은 하늘과 같은 신위를 지니고 있음니다. 이후 남중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당시 어떤 사람은 맹획을 석방하는데 이견이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렇게 설명했다: "만일 외지인(촉군 장군)을 남겨두려면 반드시 많은 군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병사들이 남아 있게 되면 먹을 것이 없다. 이것이 첫번째 어려운 일이다; 오랑캐는 지금 막 전투에서 패배하여, 부친 형제중에서 죽고 다친 자가 많으니, 외지인을 남기면서 병사를 남기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오랑캐는 여러번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죄가 큰 줄 알고 있다. 만일 외지인을 남긴다면 서로간에 불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세번째 어려운 일이다. 오늘 나는 병사를 남기지 않기로 했고, 양식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중지역은 우리에게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상하와 존비를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간에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

 

역대이래로 역사학자들은 칠종칠금에 대하여 깊이 믿었고 의심하지 않았었다. <삼국연의>는 더더욱 칠종칠금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러나, 아래의 몇 가지를 자세히 고려해보지는 않았었다.

 

첫째, 냉병기시대에 서촉군대는 절대우세를 점하지 못했었다. 이회부대는 처음에 패배하고 나서 나중에 다시 승리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둘째, 촉의 군대는 먼 길을 와서 피곤했다. 주객이 바뀌기 힘든 것이다. 천리 먼길에 군량미를 운송하고, 낯선 땅에서 싸워야 하므로 촉군이 훨씬 불리했다.

 

셋째, 전쟁은 병장기가 부닥치고, 지혜와 용기가 맞부닥치고, 피가 흘러 강을 이루고, 시신이 쌓여 산을 이룬다.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같은 게임이 아니다. 조금만 실수하면, 우열은 즉시 역전된다. 기존에 쌓은 공은 물거품이 된다. 이런 교훈은 수도 없이 많다. 제갈량처럼 조심스러운 사람이, 어찌 감히 칠종칠금과 같은 일을 벌이겠는가?

 

넷째,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매번 승리의 결과는 서로 다르다. 패배한 측의 사령관은 전쟁터에서 죽는 경우도 있다. 부하에게 살해당하기도 하고, 빗나간 화살에 맞기도 한다. 포위만을 뚫고 나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이렇게 결과가 예측하기 힘든 것이다. 매번 살아있는 상태로 생포하기는 불가능하다.

 

다섯째, 칠종칠금은 고금에 없는 전쟁신화이다. 제갈량의 보기 드문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제갈량전>의 사료는 많은 것이 제갈량 본인 및 부하들의 것이다. 제갈량은 사적을 기록하는 것을 아주 중시했다. 그러나, 전기에서 왜 칠종칠금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일까. 이는 진수가 근거없이 지나치게 칭송하는 것을 믿지 않았던 결과일 것이다.

 

'남쪽 사람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도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와 반대로, <삼국지>에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의 제5차 북벌 이전에 '남쪽오랑캐 유주(劉胄)가 반란을 일으켜, 장군 마충(馬忠)이 이를 평정했다."(<삼국지.제갈량전>). 이를 보면, 소위 칠종칠금은 <한진춘추>가 아무런 전쟁상식없이 길거리에 도는 소문을 역사책에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를 보면, 제갈량이 덕으로 남쪽 오랑캐를 감화시켰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와 정 반대되는 사후처리는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현지 민중의 미신심리를 이용한다.

 

<화양국지>의 기록에 ㄸ르면, 남중의 민중들의 풍속습관은 귀신을 믿고 무당을 믿는 것이다. 저주도 믿고, 인과응보를 믿는다. 그래서 관리들은 자주 그들의 우매함을 이용하여, 오랑캐를 통치했다. 제갈량은 군대를 움직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데, 해와 달 하늘과 땅을 그리고, 다시 신룡을 그렸다. 다시 각급관리가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을 그리고, 민중들이 양을 끌고 술을 지고 금은보화를 바치는 장면을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린 후 '오랑캐'에게 하사한다. '오랑캐'는 이 그림을 아주 중시하여 목숨처럼 아끼겠다고 약속한다. 나중에 서촉이 멸망한 후에도 조정에서 남중으로 관리를 파견하면, '오랑캐'들은 이 그림을 꺼내서 보여주곤 했다.

 

둘째, 분열을 조장하여 역량을 약화시켰다.

 

제갈량은 남정이후, '오랑캐' 청강족(靑羌族) 1만여호를 내지로 이주시킨다. 5개 부족으로 나눈 후, 집안의 건장한 남자 만여명으로 소위 '비군(飛軍)'을 조직하여 선봉에 서도록 하였다. 노약자와 장애인 병자들은 각각 내지의 초(焦), 옹(雍), 루(婁), 찬(爨), 맹(孟), 량(量), 모(毛), 리(李)와 같은 대성(大姓)의 아래로 배속시켜 사가부곡(私家部曲)이 되게 하였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은 남중의 소수민족에 있어서 만여호는 적지 않은 숫자이다. 제갈량이 이렇게 한 것은, 한편으로는 병력이 부족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저추신(釜底抽薪)인 셈이다. 남중의 소수민족의 역량은 분열시켜 약화시킨 것이다. 동한시기에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민보냈는데, 이 시기에는 이를 반대로 하였다. 이는 당시 군벌혼전으로 인구가 격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분이치지(分而治之)

 

이전에 익주군, 장가군, 영창군, 월수군의 4군은 지역이 지나치게 넓었고, 소속된 인구도 많았으며, 그 안의 호족세력간에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가 되어 촉한정권에 위협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고치고, 건녕군과 영창군의 중간에, 운남군을 만든다. 건녕군, 장가군의 두 부의 중간에는 흥고군을 만든다. 이는 분이치지의 전략이다. 이는 서촉정권과 오랑캐간의 불화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대첵이 아니었다. 덕으로 감화시킨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