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병광(劉秉光)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죽음은 사학계를 괴롭혀온 천년의 미스테리이다. 역대이래로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설이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의 죽음을 후궁의 스캔들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보통사람들은 조광윤이 비명에 죽었다고 알고 있다. 즉, 하룻밤만에 급사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일대의 걸출한 제왕으로서 조광윤의 죽음은 실로 안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정의파 문인들과 호사가들은 의심을 품고 상자를 뒤집어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처럼 온갖 문구를 뒤져서 반드시 흉수를 찾겠다고 덤벼들었다. 조광윤이 죽은 후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은 조광의(趙光義)이다. 즉, 나중의 송태종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에게 의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상산야록>, <진여록>등 내용이 모호한 야사는 그만두고, 정사에도 조광의에게 매우 불리하게 적혀 있다. 예를 들어, <요사.경종기>를 보면 "송나라의 군주 광윤이 죽었다. 그의 동생 경(즉, 송태종)이 스스로 황제가 올랐다(自立)" 여기서, "자립"(스스로 황제에 올랐다)이라는 문구는 그 진상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조광의가 조광윤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조광의는 조광윤의 친동생이다. "진교병변"의 주요기획자이자 집행자이다. 조광윤이 순조롭게 황위에 올라, 송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던 것에 조광의의 공로는 무시할 수 없다. 건륭2년(961년), 즉 조광윤이 황제에 오른 다음해 육월, 생모인 두태후(杜太后)의 병이 위급해진다. 임종전에 유명으로 조광윤이 "죽은 후 네 동생(즉, 조광의)에게 황위를 전하라"고 말한다. 동시에 조보(趙普)로 하여금 "침대앞에서 서약서를 쓰고, 이를 금궤에 보관해두도록" 명한다(<송사.후비전>).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금궤지맹>이다.
두태후가 왜 조광윤으로 하여금 조광의에게 황위를 전하라고 하였을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 원인이 있는 것같다. 첫째, 두태후가 가장 사랑하고 아낀 아들이 조광의이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물려받도록, 즉 조광의가 황위를 계승하도록 하는 것은 그녀의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두태후는 알았다. 오대십국이래로 중원의 황제들은 모두 집권후 단명했다. 재위기간이 가장 긴 경우도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조광윤이 그 뒤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송나라의 세계가 지속되도록 하기 위하여는 어린아들과 과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연부역강한 조광의가 황위를 계승하도록 한 것은 그녀의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다.
조광윤은 똑똑한 사람이다. 후덕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말을 따르겠다고 한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조광윤은 효성이 지극했다. 모친의 명을 어길 수가 없다. 둘째, 당시 송나라의 기반은 아직 공고하지 못했다. 통일대업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조광윤의 아들들은 나이가 아직 어렸다. 확실히 조광의처럼 다재다능하고 장년의 후계자가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조광윤은 모친의 명을 따른 것이다. 두태후가 병사한 후 1개월만에 조광의를 개봉부윤에 임명하고 곧이어 그를 진왕에 봉한다.
개봉부윤은 오대, 송나라때의 주요 관직이다. 즉 수도인 개봉부의 최고장관이다. 오대이래로, 불문의 묵계가 형성되어 있는데, 황족이 개봉부윤을 맡으면, 기본적으로 그의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확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조광의는 이 특수한 지위를 이용하여, 많은 문무막료를 끌어모은다. 이렇게 점점 자신의 세력을 형성한다. 조광윤의 만년에 정권이 안정되고, 아들이 성인이 되자, 황위계승문제에 동요가 일어난 적이 있다. 그러나, 조광의의 위망이 커졌고, 이미 날개가 단단해졌으며, 아들은 동생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보아 태자로 세우지 않는다. <금궤지맹>에 따라 황위는 조광의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금궤지맹>은 조광의 즉위 6년후, "황위를 빼앗았다"는 풍파를 평정하기 위하여 공포된 것이다. 위조의 혐의가 크다. 이런 주장은 성립되기 힘들다. 첫째, 조광의가 등극한 6년후, 시국은 안정되고, 조야는 모두 송태종에게 복종하여, 더 이상의 가치가 없는 <금궤지맹>을 굳이 위조할 이유가 없다. 둘째, 조광의가 황위를 계승한 것은, "태조(조광윤)....이 태후의 명을 받아, 그가 진왕(즉 조광의)에게 황위를 전할 마음이 이미 굳어 있었다." 이는 명정언순(名正言順)할 뿐아니라, 조광윤의 <유조>로 증명된다. <금궤지맹>을 내놓을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송사.태조기>와 <송사.태종기>에는 유조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사에 여러 곳에서 조광윤의 유조를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송나라때 관청에서 만든 <국사.마소전>에는 "태종이 유조에 따라 황위를 이었다"는 내용이 있고, <송사.정덕현전>에는 "내시 왕계은이 말을 타고 와서 말하기를 유조로 태종을 맞이하여 즉위시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송사.예이오>에는 "여러 신하들이 조정에 순서대로 줄을 서 있고, 재신이 제를 선포하여 애도를 마친 후, 태종이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헌통고>에는 "개보9년 태조가 죽다. 유조....태종은 유조를 받들어 즉위했다. 전각의 동쪽기둥에서 통곡하며 여러 신하들을 만났다." 이를 보면, 조광윤의 임종전에 유조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조광윤은 <유조>에서 뭐라고 했을까? <송사.예이오>에는 "개보9년 십월 이십일, 태조가 죽었다. 유조: 하루를 한 달로 쳐서, 황제는 삼일만에 정무를 보라. 십삼일만에 소상을 지내고, 이십칠일만에 대상을 지내라. 여러 도의 절도사, 자사, 지주등은 임지를 떠나 대궐로 오지 말라. 여러 주군부감은 삼일후에는 상복을 벗으라." 이외에, <송회요집고>에도 기록이 있다: "개보9년 십월 이십일, 태조가 만세전에서 붕어했다. 유제(遺制)에서 말하기를, "....황제(皇弟) 진왕(즉, 조광의)는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신께서 기이한 능력을 주어 스스로 왕이 되었다....관 앞에서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라.... 앞으로 협력하여, 안과 밖이 한마음으로, 함께 새 황제를 보필하여 영원히 빛나게 하라." 그 외에 <송대조령집>에는 조광윤 유조의 전문이 실려 있다. 다만 기년에는 잘못이 있다.
<유조>가 있다는 것은 조광윤이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도 사고와 활동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사를 부탁할 여유나 후계자를 지명할 시간조차 없이 돌연 떠나버렸던 것은 아니다. 또한 깊은 밤중에 급사하거나 하룻 밤만에 폭사한 것도 아니다. 그가 조광의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황당무계한 말이다. 그렇다면, 조광윤은 도대체 어떻게 죽었을까? 죽기 전에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아래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조광윤의 죽음에 대하여 <송사.태조기>에는 그저 이렇게 적혀 있을 뿐이다: "계추 저녁, 황제가 만세전에서 붕어하였다. 나이 오십이다." 죽은 원인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조광윤의 죽음이 돌연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때 이도가 저술한 <속자치통감장편.권십칠.개보구년십월>에는 명확히 이렇게 적혀 있다. "상불예(上不豫). 역소수진지궐하(驛召守眞至闕下). 임자(壬子). 명왕계은취건륭관설황록초(命王繼恩就建隆觀設黃籙醮), 영수진강신(令守眞降神)". 그외에 <양억담원>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개보중(開寶中), 유신강어종남도사장수진(有神降於終南道士張守眞), ....언화복다험(言禍福多險), ....태조불예(太祖不豫), 역소수진지궐하(驛召守眞至闕下), 관어건륭관(館於建隆觀), 영하신(令下神)."
<속자치통감장편>에서 언급한, "상"은 조광윤을 가리키며, "불예"는 황제가 병든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임자"는 개보 구년 구월 십구일, 즉 조광윤이 죽기 하루 전이다. "역소"는 역참을 통하여 조서를 전한다는 뜻이며, "수진"은 바로 종남도사 장수진이다. <속자치통감장편>과 <양억담원>의 두 사료는 모두 조광윤이 병든 후, 사람에게 명하여 역참을 통하여 급히 종남산으로 연락해서 도사 장수진을 입경하도록 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초"와 "강신"의 수단을 통하여 병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종남산은 개봉부에서 육백여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역졸은 '육백리가급"이건 "팔백리가급"이건, 왕복하는데만도 3,4일이 걸린다. 이는 결국 조광윤이 발병에서 사망까지, 최소한 4,5일의 시간이 있었다는 말이다. 한동안 '불예'한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니, 폭사이거나 급사는 아닌 것이다.
사실상, 조광윤의 죽음은 그가 뚱뚱하고, 술을 폭음한 것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화상을 보면, 조광윤은 말그대로 뚱뚱보이다. 게다가 그는 평소에 술을 폭음했다. 그리고 자주 술판정치를 벌였다. 예를 들어, "배주석병권, 설야정책(雪夜定策) 등등" 대신들과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예를 들어, 조보, 왕언 등), 걸핏하면 대취하게 마셨다. 심지어 연회에서도 만취했다. 그러한 시간이 길어졌다면 심뇌혈관질병과 간병이 생길 수밖에 없다. 조광윤이 가끔 신체단련(활쏘기, 축국 등)를 했지만, 그는 건국초기에 나라를 안정시키느라 바빴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하고, 몸은 점점 더 버티기 어려워졌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개보구년(976년) 십월 이십일 새벽, 조광윤이 사망한다. 향년 오십세이다. 비록 수명은 짧았지만, 정상적인 사망이다. 그해 여름, 조광윤은 낙양을 한달동안 돌아본 적이 있다. 떠날 때, 조광윤은 부친의 안릉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며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면서, "이 생에 다시 이 곳에 올 수 없겠구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후에 그는 옷을 갈아입고, 활과 화살을 집어, 궐대에 올라서, 서북을 보며 활을 당겨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떨어지자, 좌우에 말했다. 이 곳이 짐의 황당(皇堂, 즉 묘지)이다." (<옥호청화>). 이는 확실히 단명할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징조가 있다. 믿을지 안믿을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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