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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조광윤묘의 도굴에 관한 이야기

by 중은우시 2011. 1. 26.

글: 예방육(倪方六)

 

설날이 가까워졌다. 모두 1년간 바쁘게 살았으니, 좀 쉬어야할 때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 때 쉴 수가 없다. 바로 도굴꾼이다. 고대이건 현대이건, 설날에 발생하는 도굴사건이 평상시보다 훨씬 많았다. 특히 현대는 이런 현상이 더욱 뚜렸하다. 왜냐하면 여기저기서 쏘아대는 폭죽 소리 속에서 완벽하게 도굴꾼의 폭파음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남 안양의 서고혈묘 - 가짜조조묘 - 는 2005년 설날 전날 도굴군이 폭파하여 연 것이다. 당시 어떤 집에서는 창문의 유리가 부서지기도 했는데, 지진인 줄 알았다고 한다. 아무도 그것이 도굴꾼의 짓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늘은 고대의 도굴과 도굴방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가급적 나쁜 짓은 적게 할 지어다.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필자가 <<중국인도묘사>>에 쓴 적이 있는 것인데, 송나라말기 원나라초기에 발생했다. 당시에 주(朱)씨성의 도굴꾼이 있었는데, 그는 북송의 개국황제 조광윤의 황릉을 도굴하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도굴에는 성공했으나, 목숨을 잃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우선 배경부터 얘기해보도록 하자.

 

중원일대는 자고이래로 도굴사건이 빈발하는 지역이다. 송나라말기, 아황제(兒皇帝) 유예(劉豫)와 금나라사람이 북송황릉을 도굴한 일이 있다. 그렇게 되자 도굴꾼들도 간이 커졌다. 하남 경내의 관도(官盜), 민도(民盜)가 사방에서 일어났고, 도굴이 유행처럼 행해지게 되었다. 농민도굴꾼들은 농사짓듯이 바닥을 파헤쳤고, 오대(五代)때 북망산을 모조리 도굴했던 것과 같은 광경이 하남지역에서 다시 한번 벌어지게 된다.

 

주칠검(朱漆臉)이 조광윤의 영창릉을 도굴한 사건은 바로 금나라사람들과 유예의 북송황릉도굴후에 발생한다.

 

과거 하남의 민간에는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회곽의 배추, 맹진의 배, 낙양에는 도굴꾼이 많이 난다" 사실, 낙양뿐아니라, 개봉, 안양에도 도굴꾼은 많다. 공의 부근에 살고 있던 도굴꾼 주씨는 집안대대로 도굴을 업으로 삼아왔고, 그의 주위에는 도굴전문가들이 같이 있었다. 업계내에서는 그를 "주노대(朱老大)"로 불렀다. 주노대가 어떻게 하여 조광윤의 황릉을 도굴하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원래, 주노대의 이웃은 북송의 황릉을 지키는 묘지기였다. 한번은 이웃이 주노대의 앞에서 영창릉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광윤이 죽어서 부장된 옥대(玉帶)가 아직도 능안에 있다는 것이다. 금나라병사들이 황릉을 도굴할 때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세심하지 못해서 그랬는지, 조광윤의 허리에 있는 옥대는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옥대는 귀중한 보물이다. 내력도 비범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광윤이 후주(後周) 황제로부터 받은 것이다. 위에는 칠칠 마흔 아홉개의 야명주가 박혀 있고, 칠칠 사십구개의 보석, 칠칠 사십구개의 비취도 박혀 있다. 조광윤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국가가 막 건설되었고, 해야할 일이 많으니, 장례식은 간소하게 하며, 후장하지 말라고 한다. 다만, 옥대는 같이 묻어달라고 한다.

 

말한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었겠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주노대는 마음 속으로 도굴해서 조광윤의 그 옥대를 차지해야겠다고 결심한다. 하룻밤에, 주노대는 동료를 속이고 혼자서 영창릉으로 간다. 이때 영창릉에는 이미 지키는 사람이 없었고, 황량한 상태였다. 주노대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측면으로 굴을 파서 영창릉 지궁에 이르는 굴을 판다.

 

지궁은 깊었다. 굴로 들어가기 전에, 주노대는 굴안으로 바닥까지 닿을만한 밧줄을 늘어뜨린다. 끈은 능 곁에 있는 나무에 묶어두었다. 그리고 나서 지궁으로 들어간다. 왜 밧줄을 늘어뜨리는가? 이는 경험많은 도굴꾼이라면 모두 하는 일이었다; 첫째는 보물을 밧줄에 묶어서 끌어올리기 위함이고, 둘째는 자신이 오르내리는데 편리하기 위함이다. 기어올라오지 못하면 지궁내에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지궁에 들어가서 주노대는 가져간 등을 켰다. 지궁은 넓었다. 가운데에 조광윤의 금칠을 한 큰 관이 놓여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주노대는 관두껑을 연다. 등으로 비춰보니, 관안의 조광윤시체는 여전히 썩지 않았고, 잠을 자는 것같았다. 주노대는 많은 시신을 봐왔지만, 이번에는 깜짝 놀란다. 조광윤이 묻힌지는 이미 삼백년이 지난 때였다.

 

주노대는 어쨌든 도굴로 먹고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시신이 사람을 놀래킬 수는 있어도, 사람을 잡아먹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손을 뻗어 조광윤의 허리에 있는 옥대를 집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원래 덩치가 큰 사람이었고, 아무리 해도 옥대는 끌려나오지 않았다. 혼자서 지궁에 있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추어가 보기에는 어려운 일이지만, 전문가에게는 쉬운 일이다. 방법이 있는 것이다.

 

"첩면도(貼面盜)"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굴꾼들이 도굴과정에서 찾아낸 방법이다. 보물을 꺼내는데 아주 편리했다. 그것은 고대 도굴꾼들이 도굴시에 시신의 아래에 놓인 보물을 꺼내는 통상적인 수법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이렇다: 끈 한쪽을 자기 목에 묶고, 끈 반대쪽을 시신에 묶은 다음에 힘을 주어 고개를 들어, 시신을 들어올린 다음에 허리사이에 놓은 보물을 꺼내는 것이다.

 

주노대는 끈을 더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허리띠를 꺼집어내어, 한쪽을 자신의 목에 걸고, 다른 한쪽을 조광윤의 목에 걸었다. 힘을 주어 목을 들어올리자, 시신이 끌려올라왔다. 조광윤의 시신은 졸지에 앉은 모양이 된 것이다. 바로 이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조광윤의 입에서 검은 색의 물이 화락 뿜어져 나온 것이다. 주노대는 원래 조광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그 검은 물은 모조리 주노대의 얼굴에 쏟아졌다. 주노대는 이번에는 진짜 놀랐다. 한번도 이런 일은 겪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대충 닦고는 옥대를 끄집어내서, 굴에 늘어뜨린 밧줄을 잡고 바깥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주노대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고는 무슨 일인지 알았다. 얼굴이 흑칠을 한 것과도 같았다. 마치 가마솥의 검댕이같았다. 물을 가지고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 일이 금방 소문나게 된다. 소문은 갈수록 살이 붙었고, 나중에 사람들은 그를 '주노대'라고 부르지 않고, 아예 그를 '주칠검'이라고 부르게 된다.

 

원래 주노대는 도굴방지조치에 당한 것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광윤은 '촉광부영'의 가운데 미스테리하게 죽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황실은 급히 방법을 강구했다. 의원집안출신인 사람이 '방부탕'의 비방을 올렸다. 이를 체내에 주입하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탕은 도굴방지장치로도 쓰일 수 있었다. 만일 사람의 피부에 닿는다면, 영원히 씻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중에 도굴을 저지르면 금방 알아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후임황제 조광의는 그 말을 믿고는 사람을 시켜 조광윤의 입안에 방부탕을 넣었다. 누가 생각했으랴. 바로 주노대가 여기에 당한 것이다.

 

여러 날이 지나고 나서, 주노대는 옥대를 개봉으로 가지고 가서 팔고자 한다. 안목이 있는 사람 하나가 이것이 바로 조광윤의 묘에 부장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이를 바로 개봉지부에게 일러바친다. 관청에서는 주노대를 체포하여, 엄히 추궁한다. 주노대는 이실직고한다. 당시 원나라는 막 안정을 찾은 상태여서, 송황릉의 도굴을 엄격히 금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하여 중원의 한족들의 인심을 안위시키려 한 것이다.

 

주노대는 장형을 당하여 맞아죽고, 도굴로 얻은 옥대는 몰수당한다. 개봉지부는 원나라황제 쿠빌라이에 잘보이기 위하여 옥대를 쿠빌라이에 바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