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위(王偉)
“황포가신”이라는 고사성어는 북송의 개국황제 조광윤(趙匡胤)에게서 유래되었다. 내용인 즉슨 이렇다: 조광윤의 부하가 그에게 황제에 오르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조광윤은 황제가 되고싶어하지 않았다. 부하는 황제가 입는 황색의 곤룡포를 강제로 그에게 입혔따. 조광윤은 어쩔 수 없이 부하들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이를 보면 조광윤이 황제에 오른 것은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인 것같다. 그러나 사실이 이러할까? 사실상 조광윤이 황포를 입은 것은 그가 스스로 감독하고 주연한 아주 성공적인 일막의 연극이었다.
이 연극은 역사상 유명한 “진교병변(陳橋兵變)”이다. 조광윤은 원래 주세종(周世宗) 휘하의 심복장수였고, 주세종이 살아있을 때는 조광윤을 아주 신뢰했다. 그는 주세종을 따라 남북으로 전투에 참가했고, 적지 않은 전공을 올렸다.
현덕6년(959년), 주세종은 요나라를 정벌하는 도중 불행히 병을 얻는다. 그는 정벌전쟁도중에 주운 적이 있는 “점검작(點檢作)”이라는 목패(木牌)를 떠올린다. 당시의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은 장영덕(張永德)이었다. 그가 정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세종은 병석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조광윤으로 장영덕을 교체한다. 이렇게 하여 조광윤은 전전도점검으로 승진하고, 최정예부대인 금군부대를 지휘하게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주세종은 이렇게 사람을 잘못 보고, 자신의 아이를 ‘사나운 외할머니’에게 맡긴 꼴이 된다. 현덕6년 유월, 주세종이 병사한 후, 6살된 아들 시종훈(柴宗訓)이 황제에 오른다. 후주왕조는 황제의 나이가 어려서 나라의 상황이 불안정한 국면이 초래된다. 인심이 흉흉해지고, 당시 사람들은 모두 천하에 주인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유언비어가 사방에서 퍼져나가 후주에 충성하는 대신들은 이러한 유언비어가 조광윤이 장악하고 있는 금위군에게서 퍼져나온다는 점을 민감하게 느꼈다. 어떤 사람은 즉시 조광윤의 병권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직접 조광윤을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일찍이 주세종이 재위할 때부터, 조광윤은 이미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군대를 이끌고 남당(南唐)을 정벌하러 갈 때부터 그는 문사(文士), 무장(武將)들과의 교분을 중시했다. 조보(趙普), 왕인첨(王仁瞻), 초소보(楚昭輔)등이 모두 이때를 전후하여 그의 휘하에 들어와서 심복막료가 된다. 조광윤은 일부 지방의 절도사, 장군을 회유하는데 힘쓰고, 조정의 관리들도 여러방법으로 매수, 회유하였다. 이때부터 황제자리를 차지할 준비를 한 것이다. 특히, 주세종이 죽은 후 반년동안, 금군의 고위장수들은 거의 모두 조광윤의 세력범위내에 들어가는 심복들이 장악한다. 조광윤이 후주정권을 대체할 준비업무는 이미 마쳤다고 할 수 있다. 후주정권을 탈취할 객관적인 조건은 이미 성숙되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그를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조광윤은 이들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조광윤이 먼저 패를 내놓는다. 현덕7년(960년) 정월 초하루, 후주의 황제와 신하들이 새해를 축하하기 위하여 모이는데, 조광윤의 지시하에, 진주(지금의 하북성 정정), 정주(지금의 하북성 정주시)는 조정에 북한(北漢)과 거란이 연합하여 남침한다는 거짓보고를 올린다. 진주, 정주의 2주는 조정에 신속히 병력을 파병하여 증원해달라고 요청한다. 후주의 재상인 범질, 왕부는 서생이었다. 진위를 판별하지 못하고, 황급한 와중에 조광윤에게 금군을 이끌고 가서 포위를 풀어주도록 요청한다. 조광윤은 이렇게 하여 가볍게 후주의 최정예부대인 금군을 이끌고 경성을 나선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조광윤이 하고싶은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사태의 발전은 이미 조정이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현덕7년 정월 초이틀, 조광윤은 대군을 이끌고 개봉성을 나선다. 초사흘, 군대는 개봉성의 동북 사십리밖에 있는 진교역의 역참에 멈춘다. 대군이 주둔을 마치자, 조광윤은 즉시 동생인 조광의, 장서기 조보 및 심복장수들에게 군내에서 활동하고 선동하도록 지시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서쪽의 태양을 가리키며,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싸우는 중이다. 하나의 태양이 다른 태양을 이겨야 한다. 이것이 천명이다.” 졸지에 ‘하나의 태양이 다른 태양을 이겨야 한다”는 말이 군영으로 퍼져간다. 일부 심복장수들은 도처에 이런 소문을 퍼트리며, “지금 황제는 나이가 어리고 약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적을 무찌르는데, 누가 알아주는가? 먼저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한 후에 다시 출발하여 북방을 정벌하는게 옳다.” 어떤 장수들은 역참의 문앞에서 “점검을 천자로 세우자”는 구호를 외친다. 그날 밤, 조광윤은 심복 곽연빈을 보내어 비밀리에 경성에 들어가도록 한다. 성을 지키고 있던 석수신, 왕심기와 연락하여, 대군이 회군할 때 호응하도록 준비시킨다.
다음날 아침 일찍, 조광의, 조보는 장수들을 데리고 조광윤의 장막 밖에서 크게 소리친다: “여러 군대가 주인이 없으니, 태위께서 천자에 오르소서.” 조광의, 조보등은 조광윤을 장막에서 밖으로 나오게 청한다. 그후 어떤 장수가 황제등극을 상징하는 황포를 조광윤의 몸에 입혀준다. 모든 사람은 바로 무릎을 꿇고, 한 목소리로 외친다: “만세” 조광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면서, “너희들이 스스로 부귀를 탐하여, 나를 천자에 앉히려는 거냐. 나의 명을 듣겠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다. 모든 장병들은 다 함께 맹세한다: “천자의 명령을 오로지 따르겠습니다.” <송사. 태조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여러 군대가 주인이 없으니, 태위께서 천자에 오르소서’ 그러나 바로 답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황의를 태조의 몸에 걸쳐주었다. 사람들은 절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조광윤의 곤용포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떡처럼 그의 몸에 걸쳐진다. 그의 관할지역에서 그의 통제범위내에서, “피동적으로” 그는 황제에 오른다. 그는 역사상 가장 겸손한 황제를 연기한 것이다.
황포가신의 조광윤은 즉시 대군을 이끌고 개봉성으로 되돌아온다. 호호탕탕하게 개봉으로 몰려온다. 개봉성의 아래에 도착하자, 석수신, 왕심기등이 즉시 성문을 열고 조광윤을 맞이한다. 이때가 되어서야, 후주의 대신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진주, 정주 2개주의 군사보고는 조광윤의 쿠데타를 위하여 만들어낸 거짓보고라는 것을. 재상 범질은 왕부에게 말한다: “황급히 조광윤을 출정하도록 보내다니, 우리가 너무 멍청했다.” 당시 조정에는 시위친군부지휘사 한통(韓通)만이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조광윤의 심복인 왕언승에게 피살당한다. 범질등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병졸 하나도 쓸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문무대신을 이끌고 성을 나가서 투항하게 된다.
한림학사 도곡은 주공제의 명의로 된 일찌감치 준비해놓은 ‘선위조서(禪位詔書)’를 읽는다. 조광윤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장병들이 밀어부쳐서 황제가 되었다고 말한다. 조서를 다 읽고나자, 조광윤은 즉시 숭원전으로 가서 황제를 칭하고, 동경(개봉)을 수도로 정한다. 그가 바로 송태조이다. 후주정권은 이렇게 음모가에 의하여 전복된다. 180여년동안 계속되는 북송왕조는 이렇게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건립되었다.
사마광의 <속수기문>에 따르면, “북정에 나서려 할 때, 경사에는 소문이 돌았다. 출병하는 날에 책점이 천자가 될 것이라고. 그래서 부자들은 가족을 데리고 외지로 피난갔다. 오직 궁중에서만 몰랐다.” 이를 보면, 당시 군대는 진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황포가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황제가 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도, 진교병변이 우연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리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송사.두태후전>에는 이런 말도 있다. 두태후는 아들이 황포가신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은 원래 큰 뜻을 품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과연 그렇다.” 또 이런 말도 한다: “내 아들은 평생동안 기이했고, 사람들이 모두 고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뭐 걱정할 게 있는가?” 이를 보면 우리는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포는 일찌감치 내 아들이 입어야 할 것이었다.’
조광윤의 황포가신에 대하여 후세인들은 이렇게 싯구를 지어 풍자했다:
“황포는 보통 물건이 아닌데, 군대내에서 우연히 얻었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黃袍不是尋常物, 誰信軍中偶得之)
“모친은 일찌감치 아들에게 뜻이 있는 줄 알았다는데, 외인들은 오히려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阿母素知兒有志, 外人反道帝無心)
“진교역의 사건은 천고에 의심스러운 사건이다. 황포를 입자마자 군대를 되돌렸다.”
(千秋疑案陳橋驛, 一着黃袍便罷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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