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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무인황제 조광윤은 어떻게 문화왕조를 개창했는가?

by 중은우시 2011. 5. 16.

 

: 정계진(丁啓陣)

 

당대거인 모택동은 송태조 조광윤에 대하여 초손풍소(稍遜風騷, 문화수준이 약간 떨어진다)’는 조롱섞인 평가를 했다. 그가 당연히 받아야할 평가인 것같다 군사쿠데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문학사가의 눈에는 띌만한 시사가부를 남기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비록 그 본인은 문화예술분야에 조예가 있지 않았지만, 그가 개창한 송왕조는 수천년 화하문명사의 전성시기였다. 그리고, 이 전성기를 형성한 것은 그게 제정한 송왕조의 치국방략과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필자는 조광윤의 한문화에 대한 공헌은 그 자신이 약간의 문장력을 지니고, 문화수준도 쳐지지 않던 사람들이 개창한 왕조들이 오히려 문화는 만마제암(萬馬齊暗)하고 거의 문화사막이라고 할 정도인 것보다는 훨씬 위대하다고 볼 수 있다.

 

송나라는 화하문명사의 전성기이다. 이것은 필자가 만들어낸 견해가 아니라, 여러 사학자들이 컨센서스를 이루는 점이다. 송나라사람 주희(朱熹)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국조의 문명이 성한 것은, 전왕조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사요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송나라 이백여년은 문물의 성함이 백대에 걸쳐 뛰어나다.” 육유도 이렇게 말한다. “송나라가 흥하고 여러 유가들이 서로 마주하는 것은, 한나라 당나라보다 위이다.” 송나라사람들만 이렇게 얘기했다면 자화자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 평가한다. 원나라사람 탈탈(脫脫)등은 이렇게 썼다. “….삼대이래로 문화로 다스리고 도덕인의의 기풍을 따지자면 송나라는 한, 당에게도 밀리지 않는다.”(<송사.태조본기>). 근세인인 왕국유는 이렇게 말한다. “천수일조(天水一朝) 사람들의 지적활동은 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앞의 한당, 뒤의 원명이 모두 미치지 못한다.” 진인각은 이렇게 말한다. “화하민족의 문화는 수천년동안 변화를 거듭했으며 양송때 최고조에 이른다.” 당대학자 등광명은 양송시기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도달한 높이는 중국전체 봉건사회역사시기에서 공전절후라고 할 만하다.”

 

송나라가 화하역사상 이처럼 숭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문명사 자체의 법칙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고, 한당 양왕조에서 쌓여온 것이, 송나라문명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왕조의 기초는 후대의 폐허가 될 수도 있다. 전조의 높이는 후대의 미끄러지는 기점이 될 수도 있다. 송나라가 문화분야에서 백척간두진일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국황제 조광윤이 만든 문인사대부를 보호하는 서약과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육유가 편찬하였다고 하는 <피서만초>(송나라 섭몽득이 편찬했다고도 하다)의 기록에 따르면; 등극한지 삼년째 되던 해, 조광윤은 비밀리에 석각을 새겨서 태묘침전의 협실에 둔다. 그리고 이를 서비(誓碑)라 불렀다. 서비는 황금만(黃金幔)으로 덮여 있고, 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다. 관련 관리에게 명하여, 그 서비를 만든 후, 제사나 새로운 천자가 등극하면서 태묘에 배알하는 예의를 끝낸 후에, 황제가 공손하게 서사를 읽도록 했다. 글을 읽을 때는, 글을 모르는 어린 태감만이 따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멀리 서 있어야 한다. 황제가 서비의 앞에 서면, 다시 절을 한 후 꿇어앉아 다 읽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절을 하고 물러나야 한다. 대신, 시종은 모두 서사의 내용을 알지 못하다. 나중에 매번 황제들마다 다 따르는 행사가 된다. 정강지변때, 벽에 구멍이 나고, 사람들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석비는 높이가 7, 8척되며너비는 4척여이다. 서사는 모두 3행으로 되어 있는데, 첫 행은 시씨(柴氏)자손은 죄가 있더라도 형을 가하지 말라. 설사 반역의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감옥 내에서 자진하게 하고, 공개적으로 형을 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다른 일족에게 연좌시켜서도 안된다.” 또 한 행은 사대부와 상소하여 간언하는 자를 죽여서는 안된다.” 또 한 행은 자손중 이 말을 어기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능지처참할 것이다.”

 

서비의 진실성에 대하여 약간의 현대학자는 의문을 나타내거나 부정하기도 한다. 의문과 부정을 나타내는 이유는 주로 두 가지이다: 첫째는 송나라황제는 서사에서 약속한 것처럼 사대부를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대신을 죽였다. 둘째는 그런 서사는 공표되는 것이 송나라에 더욱 유리하지, 태묘에 감춰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 두가지 이유는 모두 부족한 점이 있어, 서비의 존재를 부정할만한 근거로 되지는 못한다고 본다.

 

먼저, 둘째 사항을 보자, 그런 서사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송왕조의 통치에 유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광윤이 등극할 초기를 보면 조씨정권에 불리한 내용이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조광윤을 황제의 보좌에 올려준 주요 역량은 군인이다. 사대부가 아니다; 군인들은 막 배주석병권당했는데, 마음 속으로 원망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하에서 사대부에 경도된 입장을 밝힌다면, 군인들의 불만정서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여 재난이 발생할 수 있었다. 후계자에게 시씨자손을 법안에서 은혜를 베풀하고 하는 것은 조광윤이 일처리에 있어서 강약을 잘 조절했고, 아주 조용히 처리하는 방식을 나타낸다. 이런 은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방식은 송왕조의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위엄에 불리할 뿐아니라, 조광윤의 등극을 옹호한 군인들의 반대에 부닥칠 수도 있다.

 

다시 첫째 사항을 보자. 송나라황제는 조광윤을 포함하여 적지 않은 사대부를 죽였다. 그러나 신분을 따진다면, 이들 대신은 기본적으로 사대부’, 즉 어느정도 명성이 있는 지식인은 아니다. <송사.태조본기>에 기록된 피살된 대신들은 기본적으로 부패, 모반자이다. 저명한 문인은 한 명도 없다. 송나라왕조를 통틀어, 비교적 이름있는 지식인이 조정에 의하여 처결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소동파도 오대시안에 걸려들었지만, 역시 나중에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송사.태조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건덕(963-968) 개원전에, 조광윤은 재상들에게 말한다. 연호는 반드시 전왕조에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골라야 한다고. 건덕3, 후촉을 평정한 후, 조광윤은 후궁에 편입된 궁녀들이 쓰는 동경의 뒷면에 건덕4년주(乾德四年鑄)’라는 글을 보고, 재상 두의(竇儀)등에게 물어본다. 두의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분명히 촉국의 물건입니다. 촉주는 예전에 이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조광윤은 아주 기뻐하며 말한다. “재상을 하려면 글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유학자를 아주 중시한다. 이를 보면 조광윤은 글읽은 선비를 아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광윤이 사대부를 가까이하고 군인을 멀리한 것은 그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때문이다. 그의 황제자리는 자신의 진교병변으로 얻었다. 군인에 대하여 그는 경계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의 이런 경험에 따른 조치는 장단점이 모두 있었다. 장점은 위에서 이미 얘기한 바와 같이 송나라가 사상유례없는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것이고, 단점은, 송나라가 군사적으로 계속 강성하지 못한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자주 받아서, 대부분의 기간동안, 송나라는 나라를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애국지사 육유는 임종전에 왕사북정중원(王師北征中原)”의 그날이 오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조광윤이 태묘밀실에 서비를 세운 것중, 두번째의 사대부를 죽이지 말라는 것은 송나라문인들에게는 하나의 보호산(保護傘)이다. 이는 송나라때 문인학자의 인신안전을 보장해주었다. 송나라 300여년의 문화예술의 발전에 양호하고 관대한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이다. 생각해보라. 진시황처럼 유생을 대거 죽이고, 제자백가의 저작을 불태워버린다면, 아니면 주원장처럼 걸핏하면 말안듣는 문인을 요참해버린다면, 아니면 만청황제처럼 문자옥을 벌이기 좋아했다면, 아니면 당시처럼 십년간의 문화대혁명을 발동했더라면, 송나라는 절대로 시사가 전면적으로 번성하고, 구양수, 소동파, 육유, 이청조, 신기질 등 여러 문학의 거성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주이학(程朱理學), 영가학파(永嘉學派)등 학술유파도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고서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조광윤이 성공하기 전에, <()>이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욕출미출광랄달(欲出未出光辣達)

천산만산여화발(千山萬山如火發)

수유주향천상래(須臾走向天上來)

간각유성간각월(赶却流星赶却月)

 

해가 나오려고 하나 아직 나오지 않았을 때 빛이 번져가면서

온 산들이 마치 불붙은 것같다.

순식간에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니,

유성도 쫓아내고 달도 쫓아내네.

 

국사관의 전문가들은 이 시에 사용된 글이 우아하지 못하다고 여겨서, 국사에 수록할 때는, 앞의 두 구절을 수정했다.

 

미리해교천산흑(未離海嶠千山黑)

재도천심만국명(才到天心萬國明)

 

고인이 지적한 것처럼, 수정후의 싯구는 오히려 기세가 약해져서 원작만 못하다. “초손풍소의 조광윤도 약간의 시가예술은 알았던 것이다. 최소한 그의 시가예술에 대한 이해능력은 일반적인 어용문인들보다 낮지는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