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고강(高崗): 숨겨진 진실의 일면

중은우시 2010. 5. 2. 18:20

글: 정동(丁東)

 

이미 잊혀져버린 이름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바로 전 중공중앙정치국위원, 중화인민공화국부주석인 고강이다. 원인은 바로 홍콩대풍출판사에서 책을 하나 출간했는데, 제목이 <<절반으로 잘린 묘비 아래의 옛일: 북경의 고강>>이다. 제1작자는 2007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조가량(趙家梁)이다. 그는 1952년 고강의 비서가 되었고, 1954년 고강의 자살미수사건이후 고강의 관교조 조장이었다. 8월 17일 고강이 다시 자살하여 목숨을 잃을 때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 제2작자는 고강의 '오호상장(五虎上將)'중 하나로 분류되었던 장명원(張明遠)의 딸 장효제(張曉霽)이다. 그녀도 일찌기 고희를 넘겼다. 이 책은 대량의 1차사료를 가지고 여러가지 의문을 풀어주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첫번째로 중대한 당내투쟁사건의 진상의 윤곽을 드러내준다. 당시의 진상을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은 후에 구름이 걷히는 듯하고, 돌연 깨닫는 바가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일찌기 건국초기에 모택동은 유소기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유소기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했다. 모택동은 고강에게 계속 암시를 주었고, 1953년에는 고강에게 기밀업무를 하나 맡긴다. 그로 하여금 동북의 일본측자료를 조사해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1920년대 유소기가 봉천에서 체포된 후에 어떤 태도를 나타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모택동이 내릴 기밀업무를 고강은 그가 특히 믿고 있던 진운(陳雲)에게 말한다. 고강은 모택동에게 보내는 기밀서신에서 그들간의 담화내용을 싣고 있다.

 

진운은 말했다: "보기에, 주석은 후계자문제를 고려하는 것같다. 이는 당과 국가의 앞날이 관련되는 큰 일이다. 또한 그의 마음 속에서 가장 큰 일이다. 다만, 그가 스스로 나서기는 곤란하다. 우리가 지금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그의 마음 속의 병을 제거시켜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일은 누가 나서야 하는가? 그들은 이 일을 맡을 수 있을만한 사람을 몇 사람 생각했다. 주덕은 덕망이 높아서 가장 적절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많다; 임표는 젊고 호소력이 있지만, 몸에 병이 많아서, 건국이후 오랫동안 휴양중이었고, 자리에 몸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이같은 중대한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 그 외에는 또 누가 있을까? 고강은 말했다: "진운 동지,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나서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진운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안됩니다. 당신이 나보다 낫습니다. 당신은 기반도 나보다 크고, 당신은 섬서, 감숙, 영하가 있고,모주석이 신임하고 당신을 지지해줍니다. 당신은 군대와 지방에서 모두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으니, 그들의 지지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앞장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뭐가 겁납니까?" 또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먼저 시작하려면 먼저 모주석에게 얘기하고, 확실하게 한 후에 다시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고강은 휴가를 이용하여, 항주, 광주로 가서 임표, 도주(陶鑄)등과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모택동의 유소기축출계획은 당시에 많은 반발에 부닥쳤다. 그리하여 몇달간 교착상태를 보이다가 모주석이 잠시 양보를 하고, 말을 바꾸어 단결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고강이 속죄양이 되고, 버림을 받는다. 그리고 고강에게는 외국과 내통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씌운다. 고강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화를 참지못하고 자살을 해버린다. 그러나, 모주석과 유소기의 은원은 이로써 끝나지 않는다. 십여년후, 모택동은 결국 문혁을 일으켜서, 일거에 유소기를 타도한다. 문혁때 까발려진 유소기의 '죄행'은 대부분 바로 고강이 당시 유소기를 반대할 때 내세운 것들이다. 작자는 이렇게 말한다: "고강은 그저 초망영웅(草莽英雄)이다. 그는 사람을 비교적 가볍게 믿었고, 의리를 중시했다. 그는 모주석에 대하여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치투쟁에서 손바닥처럼 뒤집는 잔혹한 수단을 경멸했다. 그는 모택동과의 관계를 군신, 부자와 같이 생각했고, 깊이 신뢰했을 뿐아니라, 더욱 경외했다. 이들 두 사람은 정치적인 자질이나 성격이 크게 차이가 난다. 이리하여 나중에 고강의 비극을 몰고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1980년대초, 중공11기 6중전회때 <<건국이래 약간역사문제의 결의>>가 통과된다. 이때, 누군가가 고강,요수석사건을 재평가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등소평, 진운등도 이 사건의 당사자이므로, 이 의견은 채택되지 않는다. 단지 고강과 연루되었던 '오호상장'등 고급간부들은 새로 자리를 마련해준다. 지금은 당시 고위층 정치투쟁의 당사자들이 이미 죽은지 여러해가 되었다. 역사의 원래 진면목은 언제나 드러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