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신중국 국가주석(國家主席)제도의 변천

by 중은우시 2012. 2. 1.

글: 이계화(李桂華)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시, 국가기구체계에 국가주석에 관한 조항은 없었다. 그저 '중앙인민정부주석(中央人民政府主席)'을 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중앙인민정부주석은 독립한 국가기관이 아니었다. 그저 중앙인민정부위원회의 구성원이었다. 그러므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시로부터 1954년 9월까지는 중앙인민정부위원회가 실질적으로 국가주석의 직능을 행사했다.

 

1954년, 신중국의 최소 헌법을 초안할 때, 중공중앙은 국가의 기구설치를 고치기로 결정하고, 국가주석 직을 설치한다. 이에 대하여 모택동은 이렇게 생각했다. "중국은 대국이다. 옥상가옥으로 주석직을 두는 것은 그 목적이 국가를 더욱 안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국가주석직을 설치한 후, 당연한 일이지만 모택동이 중국의 초대 국가주석에 오른다. 그러나, 그후 몇년간, 국사가 번잡하고 바쁘며, 외교상의 복잡한 예절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모택동은 국가주석을 사임한다. 그리고 성명을 발표한다. 1959년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유소기가 신중국의 제2대 국가주석에 취임한다.

 

1966년, 사상유례없는 '문화대혁명'이 발발한다. '문혁'이 시작된 후 얼마지나지 않아, 국가주석 유소기가 타도된다. 그후, 중국의 국가주석직은 장기간 비워둔다. 이로 인하여 중국의 국제업무처리에 영향을 미치고, 중국의 국제적인 이미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제도설치상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70년 3월, 모택동은 중앙에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수정할 것을 건의한다. 그리고 국가주석을 폐지할 것도 건의한다. 그러나, 국가정치운영의 필요상, 중공중앙의 내부에서는 다수가 국가주석직을 보류하기를 희망했고, 모택동이 국가주석직을 맡아줄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당시는 개인숭배시대이다. 모택동의 결정은 최고의 권위를 지녔다. 결국 중앙정치국은 국가주석직을 두자고 더 이상 제의하지 못한다. 그래서 1975년에 반포시행된 신중국의 두번재 헌법인 "75헌법"에서 정식으로 국가주석직을 취소한다. '중화인민공화국주석'이라는 절이 헌법에서 모조리 삭제된다.

 

1976년 9월, 중공중앙주석 모택동이 서거한다. 같은 해 10월, 중앙은 일거에 사인방을 분쇄하고,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을 끝낸다. 그후, 화국봉의 주재하에, 신중국의 세번째 헌법인 "78헌법"이 1978년에 통과된다. "78헌법"은 "75헌법"에 대하여 일부는 승계하고 일부는 부정하는 기초위에서 제정된 것이다. 그중 일부 내용은 큰 변동이 있었다. 다만 이 헌법은 국가주석에 대한 내용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국가주석직을 두지 않는다.

 

1978년이후, 국가정치생활이 정상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주석직을 둘 것인지 여부가 논쟁에 오른다. 1980년 8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제5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회의 주석단에 <헌법수정 및 헌법수정위원회성립에 관한 건의>를 제출하여, 정식으로 헌법수정임무를 제안한다. 이번 헌법수정과 의견징구과정에서, 참가대표, 전문학자, 각계군중이 각자의 의견을 내놓아서 각자의 헌법수정에 대한 견해를 내놓는다. 그중 국가주석직을 둘지 말지에 대하여는 대체로 3가지 의견이 형성된다. 첫째, 국가주석을 둔다. 둘째, 국가주석을 두지 않는다. 전인대 위원장 혹은 국무원총리를 주석으로 개칭하고 국가원수의 직권을 행사한다. 셋째, 전인대 상무위원회를 "상무주석단"으로 개칭하고, 위원장을 이 주석단의 주석이 되어,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한다. 이상의 3종 의견중 첫째 의견이 압도적 다수였다. 그리고 등소평이 명확히 지지한다. 그런데, 등소평이 여러번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은 국가주석을 맡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국가주석을 두면, 등소평 동지가 맡아야 한다. 그러나, 등소평 동지가 맡기를 원치 않으니, 국가주석을 두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후, 국가주석을 둘 것인지 여부에 대한 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가 된다. 일시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국제, 국내 각계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는다. 이 관건적인 순간에, 등소평이 지적한다: "나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맡으면 된다." 동시에 그는 추가로 강조한다: "만일 국가가 필요로 하면 설립해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의 고려로 우리의 국가체제를 확립할 수는 없다." 최종적으로 등소평의 견지하에, 국가주석을 두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고 더 이상 바뀌지 않는다. 1982년 12월 4일 신헌법이 통과된다. 그후 "82헌법"은 비록 4번이나 수정되었지만, 매번 국가주석제도는 견지된다. 이리하여 국가주석제도가 진정으로 확립되게 된다.

 

1993년이래,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주석, 중공중앙총서기가 '삼위일체'로 되는 국면이 나타난다.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은 더이상 '허직'이 아니고, 국가주석, 당중앙총서기 및 중앙군사위주석의 삼중신분을 이용하여 그 직권을 통합하여 행사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실권'원수가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