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휘(林輝)
1950년대, 자주 범람하는 황하(黃河)의 치수를 위하여, 중국정부는 소련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대책을 마련했다. 1954년 10월, 소련전문가의 지도하에, 수리부와 연료공업부가 주도하여 성립한 황하규획위원회는 <황하종합이용규획>을 완성한다. 이것은 아주 아름다운 미래를 보여주는 계획이었다. 황하의 간류(幹流)에 46개의 댐을 만든다. "500톤의 운반선이 황하의 바다입구에서 란저우(蘭州)까지 항해할 수 있고, 장비총용량은 2300만킬로와트가 되며, 연평균발전량은 1100억도가 된다. 이는 1954년 중국의 총발전량의 10배에 해당하고, 관개면적은 원래의 1659만무에서 1.16억무로 확대된다." 이 계획으로 만들어지는 댐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삼문협댐이다.
1955년 4월, 수리부는 학자와 수리엔지니어 70여명을 소집하여 삼문협 수리규획방안에 대하여 토론을 진행한다. 토론회에서 여러 전문가들은 모두 소련전문가들의 계획에 대하여 입이 마르게 칭찬한다. 오로지 미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당시 청화대학 교수로 있던 저명한 수리공정학자인 황만리(黃萬里)만이 반대발언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나온다(黃河淸, 聖人出)'이라고 말하는데, 황하는 맑아질 수가 없다. 황하를 맑게 하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죄이다." 강직한 황만리가 보기에, '황하청, 성인출'이라는 말은 정치적 아부에서 나온 것이고 최소한의 과학정신도 결핍된 것이다. 이해에 한 독일의 수리전문가가 현장을 조사한 후 이렇게 단언했다고 한다: "삼문협에 대형댐을 건설하는 것은 관중에 해를 미치는 사고(死庫)를 건설하는 것이다."
1956년 5월, 황만리는 황하유역규획위원회에 <황하삼문협댐현행계획방법에 대한 의견>이라는 글을 제출한다. 이 글은 <중국수리> 1857년 제8기에 실렸고, <삼문협수리중추토론회자료회편>(1958년 4월 수리전력부 인쇄)에 실려있다. 의견서는 소련전문가의 삼문협댐에 관한 계획을 전면 부정한다. 이것은 개별문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은 그가 나중에 '우파'로 규정되는 죄증중 하나가 된다.
1957년 6월 10일, 삼문협수리중추토론회가 다시 소집개최된다. 이때, 삼문협수리공정의 부지는 이미 공사를 시작했다. 삼문협댐의 건설에 대한 유일한 반대자로 회의에 참석한 황만리는 다른 전문가들과 회의상에서 7일간 논쟁을 벌인다. 황만리는 황하의 퇴적구간에는 댐을 건설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황하하류의 수해가 중류의 관중평원으로 옮겨올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도의 니사(泥沙)는 상류의 땅을 삼키고, 하류에 육지를 만드는 자연작용을 하는데, 댐을 만들어 니사를 막아버림으로써, 황하를 맑게 하는 것은 자연규율에 어긋나는 것이고, 비현실적이다. 그는 또한 지겆한다. 댐이 완성된 후에 땅이 매몰될 것이고, 도시의 재해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7일간의 변론도 다른 전문가들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했다. 황만리는 할 수 없이 차선책을 강구하게 된다. 그는 6개의 배수동을 막지 말아달라고 건의한다. 나중에 니사를 배출하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의견은 전체의 동의로 통과된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공때 소련전문가들은 원래의 의견을 견지하여 6개의 구멍을 막아버린다.
1958년 11월 25일, 삼문협공사가 시작되고 황하의 흐름이 끊긴다. 1960년 6월, 댐은 340미터까지 쌓아서, 홍수방지작용을 시작한다. 같은 해 9월에는 갑붐을 닫아 물을 막고 모래의 흐름을 막는다. 동관상류의 위하에는 진흙모래가 쌓여 좋은 밭 80만무가 묻혀버린다. 현성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이사간다. 서안도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 진흙모래문제는 날로 심각해진다. 1972년부터 황하는 흐름이 끊기기 시작한다. 1990년대에는 매년 평균 100여일간 흐름이 끊긴다. 황만리의 분석과 예견은 하나하나 확인된다.
1962년 3월, 수리부는 정저우에서 회의를 소집개최한다. 삼문협댐의 운영방식을 당초에 정한 '상류의 모든 진흙모래를 막는 것'에서 ''체홍배사(滯洪排沙)'로 바뀐다. 비록 진흙모래의 퇴적이 약간 완화되기는 했지만, 배수구멍이 너무 높은 위치에 있어서 배수량이 여전히 너무 적었다. 그리하여 위하, 낙하, 황하의 퇴적연쇄반응을 가져온다. 삼문협공사는 할 수 없이 여러번 재시공하게 된다.
재시공후의 삼문협은 댐을 만들기 전의 자연상황과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 삼문협은 회복하려고 노력했고, 댐으로 들어오는 모든 진흙모래를 모조리 내보내고자 했다. 최초에 삼문협공사를 할 때의 원 뜻인 '상류의 모든 진흙모래를 막아서, 아래로는 맑은 물을 내려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바뀌어버렸다. 30여년간 애를 먹으면서 얼마나 많은 인력, 물력, 재력을 쏟았는가? 그러고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댐이 없는 자연상황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바로 삼문협공정때문에 이것이 건설된 후 40여리의 수십만인구는 원래의 부유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토지가 척박한 변방지역으로 이주한다. 그중 일부는 수십번을 옮겨다녔고, 결국은 거의 알거지가 된다. 나중에 국무원에서 시찰하도록 보낸 고관마저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국가는 여러분을 볼 면목이 없다."
독일에 사는 수리전문가 왕유락은 한번 계산해본 적이 있다. 삼문협공정이 정산할 때 비용은 40억위안이었다. 이는 무한의 장강대교 40개를 만드는 돈이다. 그후에 재시공비용(댐하부 구멍을 하나 만드는데 1000만위안으로 보면)과 이로 인하여 재해를 입은 지역의 손실을 합하면 더욱 천문학적 숫자가 될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모택동의 '대약진'으로 인한 대기근이 전국에 만연하였는데, 만일 이 돈으로 양식을 샀더라면 아마도 수천만명이 굶어죽는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상의 거대한 손실을 제외하고, 삼문협공정은 환경에 회복할 수 없는 위해를 끼쳤다. 예를 들어, 댐의 주위에 있는 지하수의 높이가 올라가서 50여만무의 경지가 알칼리화된다. 댐의 저수로 대량의 경작지의 둑이 무너져 손실을 입는다. 대량의 문화발상지의 진귀한 문화고적이 사라진다.
더욱 가슴아픈 일은 삼문협공정이 가져올 위해를 정확하게 예측하였던 황만리 선생이 '반당반사회주의의 우파분자'로 타도대상이 된 것이다. 1961년, 그는 명에 따라 밀운으로 가서 노동을 하고, 창려의 민공들과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일한다. 그는 반지하에 땅을 파서 살았다. 1959년 그는 강서 파양호로 보내어져서 노동을 한다. 1974년에는 청화대학으로 끌려와서 비투를 당한다. 1980년 2월 청화대학 당위는 그를 명예회복시킨다. 1998년, 청화대학은 그의 대학원강의를 허용한다. 일찌기 상부의 뜻에 영합하여 삼문협공정을 지지했던 소위 수리전문가들은 모두 승승장구한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사실 삼문협댐을 건설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유가 '황하를 맑게 한다'는 것이지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성인이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자고이래로 누가 황하를 맑게 만들 수 있겠는가? 공산당이다. 위대한 영수 모택동이다. 그렇다면, 누가 성인인지는 분명해지지 않겠는가? 확실히 '황하를 맑게 한다'는 것은 하나의 표지이다. 모택동 신격화에 필수적인 일이다. 황만리는 그 속에 숨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지만, 삼문협댐을 지지했던 전문가들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역사의 교훈은 항상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수십년후, 장강삼협에 다시 자연규율에 위반하는 댐이 건설된다. 황만리가 여전히 반대했지만. 그러나, 삼협댐은 최근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다시 한번 황만리의 예언이 적중할 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 삼협댐을 결국 철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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