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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일본침략군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는 어떻게 무죄판결을 받았는가?

by 중은우시 2011. 5. 21.

글: 중외서적

 

 

 

 

그의 전체 군대생활은 일본의 충국침략사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법률의 엄격한 징벌을 받을 때, 그는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49년 1월 30일 오전 10시, 기적소리와 함께, 미국의 화륜선 빅스호는 상해의 황포강을 떠났다. 여러날의 항해끝에 빅스호는 일본의 요코하마항에 도착한다. 배 위에 타고 있던 65세의 노인은 상륙하기 전에 같이 배에 타고 있던 이발사에게 자신의 머리를 한번 다듬도록 한다. 그리고 깨끗한 와이셔츠와 양복을 입고, 기운을 차려 항구에 내린다. 꽃을 든 초등학생과 그가 중국에서 작전을 지휘할 때의 옛부하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마중나온 사람들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냈지만, 마음은 통곡하는 것보다 더 아팠다. 어쨌든 그는 감옥에서 석방되지 얼마되지 않은 전쟁포로이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1945년 일본이 투항할 때, '중국파견군'총사령관인 오카무라 야스지이다.

 

칠년전 오카무라 야스지를 환송하며 중국에서 전쟁을 벌이도록 한 도조 히테키(東條英機) 등은 이차대전이 끝나면서, 대부분이 이미 재로 되었다. 각종 전쟁범죄를 저지른 오카무라 야스지는 어떻게 하여 2차대전후 4년이 지나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일까?

 

원인은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투항이 임박했을 때이다. 이전에 일본군주력과의 전투를 회피해왔던 장개석의 국민당 중앙군은 대부분 사천, 귀주 일대의 후방에 집결해 있었고, 신속히 남경, 상해, 북평(북경)등 대도시로 진격하여 일본군의 투항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팔로군, 신사군등은 중국공산당이 직접 지휘하는 무장세력이었고, 8월 9일 모택동이 <대일구적최후일전(對日寇的最後一戰)>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후, 이미 전략적인 대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신사군은 대강남북의 십여개 현성을 수복했고, 주력은 상해, 남경, 합비, 무한등지로 진격했다. 장개석은 대도시의 근처에까지 진격한 신사군, 팔로군을 보고는 국민당중앙군이 미치지 못할까봐 우려했다.

 

당시의 국제정세와 국내정세는 미묘했다. 독일은 이미 투항했고, 미국의 육해공군은 태평양에서 일본의 문앞을 공격했다. 일본의 투항을 재촉하기 위하여 미국은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금방 만든 원자탄을 터트려 수십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은 여전히 투항할 의사를 표시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부득이 8월 9일 다시 일본의 나카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한다. 같은 날, 소련홍군은 3방면으로 총 160만의 군인들이 중소국경을 넘어 들어왔다. 어얼구나강, 흑룡강 및 우수리강을 넘어서, 신속히 일본관동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만주의 핵심지역으로 진격했다. 관동군제1제대 30만명은 궤멸하고, 나머지 부대는 종심지대에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에 '대일본황군'은 이미 회복불가능한 지경이 된다. 만일 끝까지 저항한다면 연합군이 일본본토에 진입하고, 독일처럼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은 격렬한 내각의 다툼가운데, 앞에 나서서 주전파를 설득하여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고 무조건투항하도록 한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전쟁승리의 성과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중이었다. 동경대본영은 '중국파견군' 총사령광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비밀전보를 보낸다: "이제 홍색세력이 중국본토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미국측세력과 충돌이 발생하게 하여, 동아시아의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일본이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즉, 동경은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중국공산당의 무장세력이 접수하도록 놔두라는 취지이다. 이렇게 하여 공산당의 실력을 강화시켜서 국민당과 천하를 쟁탈하기 위하여 다투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결국 미소간의 반목을 불러오게 하고, 심지어 제3차세계대전까지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패전국인 일본통치집단의 당시 보복심리를 보여준다.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니 먼저 물을 흐트려 흐려놓은 다음, 다시 기회를 보아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다만, 동경의 지시는 '중국파견군'사령관인 오카무라 야스지의 개인적인 바램과 달랐다. 그는 생각했다. 첫째, 공산당인의 반일정서는 국민당인들보다 훨씬 높다. 둘째, 국민당은 국제적으로 미국과 직접 얘기하고, 중국정부를 대표한다. 국민당의 뜻에 따르는 것이 자신의 전후 재판에서 유리할 수 있다.

 

8월 16일, 장개석은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전통을 보낸다. 그에게 계속 자리를 지키도록 하며, 질서를 책임지고 유지하도록 명령한다. 모든 무기는 반드시 국민당중앙군에게 교부하고, 절대로 다른 군대에 넘겨주지 말라고 한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장개석에게 회신을 보낸다: 명령대로 집행하겠다. 동시에 소속부대에 명령한다 "원래의 주둔지에서 중경정부가 와서 접수할 때까지 기다려라. 공산당군대의 여하한 요구도 분명히 거절하라. 필요하면 무력으로 스스로를 방어해도 좋다." 이틀 후, 오카무라 야스지는 친히 재중국일본군에게 <화평후대화처리강요(和平後對華處理綱要)>를 발표한다. 이 강요에는 "황군은 정전후, 절대로 투지를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계속하여 불요불굴의 기백과 투지를 견지하라. 중경정부를 지지하고, 중경중앙정권의 통일을 촉진하며, 중국의 부흥건설을 협조하고 무기, 탄약, 군수물자등을 교부하는 문제는 중경정부의 명령에 따라 규정한 시간, 장소에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중경정부부대에 교부하라." 일찌기 중국전쟁터에서 불가일세의 인물인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제 개인적인 고려로, 이미 철저히 장개석 위원장의 졸개가 되어버렸다. 1년전까지는, 그가 매일 꿈 속에서까지 국민당중앙군을 일거에 섬멸할 계획을 세웠고, 어떻게 하면 장개석의 중경을 철저히 포격해버릴까 생각했었다.

 

8월 중순, 신사군은 일찌기 풍소백(馮少伯)등을 남경으로 파견하여 일본군총사령부와 연락하여 항복접수에 관한 업무를 상의하게 했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를 들은 후,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끈다. 동시에, 참모주임 교도(橋島)를 보내어 쉬이(盱)현 황화당의 신사군 군사령부에 가서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신사군에 투항하는 것을 거절한다. 팔로군의 협상대표는 북평, 천진, 태원, 석가장 등지에서 마찬가지로 거절당한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공산당에 아주 비협조적이었다. 국민당에는 아주 공손했다. 8월 27일, 국민당의 '육군총사령부' 전진지휘소주임 냉흔(冷欣) 중장이 남경에 도착하자, 오카무라 야스지는 고바야시 센사부로(小林淺三郞) 총참모장으로 하여금 백여명의 고위장교를 거느리고 공항에서 영접하게 한다. 그날 저녁, 고바야시 센사부로는 총사령관을 대표하여 신가구 복창반점에서 냉흔을 위하여 연회를 베푼다. 그 자리에서, 고바야시는 냉흔에게 말한다: "우리는 여러분이 항복을 접수해주기 바란다. 요 며칠 우리 군의 전선에는 팔로군, 신사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그들은 항복하라고 요구했지만, 우리는 부대에 저항하도록 명령했다. 상해중공 지하당은 10만 노동자의 대의거를 준비하고 있다. 신사군 소절군구와 안팎에서 호응하여 상해를 점령하고자 한다. 이 행동은 우리에 의하여 저지당하였다." 냉흔은 이에 대하여 감사를 표시한다. "만일 귀군이 협력해주지 않았다면 많은 크고 작은 도시는 일찌감치 공산당의 천하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곧이어 쌍방은 서로 술을 권하고, 아주 화기애애했다. 더욱 심한 것은 오카무라 야스지는 '대장이 중장에게 인사하지 않는다'는 교만한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대장신분에 불구하고 냉흔 중장을 찾아가서 인사한다.

 

이차대전이 끝난 초기에, 200여만의 일본군, 일본교포는 순조롭게 일본국내로 돌아갔다. 그들은 거의 인신공격을 받지 않았다. 이는 인류전쟁사상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894년 청일전쟁이래, 일본군국주의분자는 중국인민들에게 피의 빚을 많이 남겼다. 여순대학살에서 남경대학살까지, 731부대의 세균전까지..중국인들은 이미 포로로 잡힌 일본인들에 대하여 육체적인 보복을 하거나 가두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첫째는 중화민족의 관후하고 인의를 중시하는 본성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국민당이 내부에서 '중일합작친선'의 조류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투항한 일본군은 포로라고 부르지 않고, 그저 '맨손관병(徒手官兵)'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장개석의 오카무라 야스지 개인에 대한 처리는 도량이 넓다는 요소이외에 강렬한 반공색채를 띄고 있다.

 

9월 9일 항복의식이 거행된 후, 10일, 중국육군총사령관 하응흠(何應欽)은 일부 고급장교를 이끌고 오카무라 야스지와 우호적인 회담을 갖는다. 쌍방은 반공협력문제에 대하여 밀담을 진행한다. 하응흠등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군은 패전한 것이 아니다. 중국군도 승리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분쟁을 종식시키고, 이왕의 일은 흘려보내야 한다. 그리고 중일의 합작에 주력해야 한다." 이때의 소위 "중일합작"은 공동으로 중국공산당을 상대한다는 것이다. 과연 하응흠은 이런 내용을 제안한다: "일본과의 전투가 끝났다. 국공전쟁이 곧 개시될 것이다. 우리는 공산당과 전투하는데 곤란이 적지 않다. 장주석은 귀군의 협조를 요청했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고개를 끄덕여 찬동한다. "나는 천황의 명에 따라 중국에 투항한다. 충실하게 중국정부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중추절의 그 날, 하응흠은 사람을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보내어 월병과 마오타이주를 건네고, 자신의 친척처럼 접대한다.

 

1945년 12월 23일 새벽, 오카무라 야스지는 "돌연 장개석 위원장의 접견을 받고, 총사령부로 가서 짧은 면담을 가진다." 만나자마자, 장개석은 그가 항복접수과정에서 협력해준데 감사를 표시하고, 몸을 숙여 안부를 묻는다: "귀관의 건강은 괜찮은가?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는가, 사양하지 말고 나에게 혹은 하총사령관에게 얘기하라. 일본교민에게 어떤 곤란이 있어도 말해달라. 우리는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나중에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회고한다: "장개석은 온화한 정이 말과 표정에서 나타났다....좋은 말로 위로해주었고, 깊이 감복했다."

 

1946년 6월, 국공양당의 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다. 하응흠, 탕은백등의 건의하에, 오카무라 야스지를 비밀리에 국방부 고급군사고문으로 초빙한다. 그의 소위 '군사천재'를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이전에, 오카무라 야스지는 화북방면군사령관으로 있을 때, 팔로군과 작전을 벌인 경험을 가지고 <초공지남(剿共指南, 공산당소탕가이드)>를 편찬한 바 있다.  이를 중문으로 번역한 후, 대량으로 인쇄하여 국민당군의 각급 지휘관에게 보냈다.

 

이 민감한 시기에,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이미 동경에서 정식으로 열린다. 1946년 8월과 10월, 극동군사법정은 두번에 걸쳐 소환장을 보내어, 중국정부에 오카무라 야스지를 동경으로 보내어 재판받도록 독촉한다. 중국팔로군 연안본부에서 공포한 일본의 중국침략전쟁 전범명단에서 오카무라 야스지는 1호전범으로 열거되어 있었다.

 

국제군사법정의 독촉과 전국인민과 공산당측의 비난에, 국민당도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게 된다. 1946년년말, 오카무라의 종적을 감추기 위하여, 국민당당국은 그를 남경 살가만 전일본군총사령부에서 고루의 서쪽에 있는 금은가4호에 있는 조용하고 은밀한 빌라로 옮기게 한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여기에서 1년여를 머문다. 당연히 그는 그냥 놀지만은 않았다. 그는 국민당으로부터 이렇게 큰 은혜를 받게 되니, 자연히 국민당을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은거기간동안, 오카무라 야스지는 풍부한 저술을 남긴다. 그것은 <모택동의 병법과 대응방법> <위점타원(圍點打援)은 공산군의 작전특징> <적의 대립입장에서 본 중국군대> <병력집중으로 병력집중에 대항하여 공산군을 섬멸한다>등등의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전투에 관련한 글을 남긴다. 동시에, 국민당군사당국이 매번 새로운 작전계획을 만들 때마다, 작전청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오카무라 야스지를 방문하고, 우회적으로 전투에 관한 견해를 전해듣는다. 나중에는 심지어 오카무라 야스지가 무죄석방되어 귀국되기 전에 대상해를 사수하던 탕은백은 그에게 찾아가서 장강방어에 관한 고견을 듣기도 한다.

 

이때의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미 나이 60을 넘긴 노인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이미 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원인은 바로 그가 중국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경험은 국민당 장교들로 하여금 오카무라 야스지에 대한 미신을 갖게 했다. 오카무라 야스지가 방안을 가르쳐주면, 국공내전의 패색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자신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나는 소좌시대에 자주 중국을 왔다. 중국의 내정은 잘 알았다. 그리고 여러번 중국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그 약점도 충분히 알고 있다. 국민당의 촉탁을 받아, 중국군대를 개선하려는 의견이 이미 있었고,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감추지 않았다..."

 

1948년 3월, 극동국제군사법정은 남경정부 국방부로 사람을 보내어, 오카무라 야스지를 데려가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체 일본전범의 재판업무가 곧 끝날 예정인데, 더 이상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국제군사법정도 해산될 것이라는 것이다. 국민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이런 결정을 내린다: 대외적으로 오카무라 야스지는 폐병으로 감시받고 거주하는데, 병이 좋아지면 귀국시키겠다. 그리고 오카루마의 병력에 관한 증명을 내놓는다. 이렇게 하여 파견나온 사람을 일본으로 돌려보낸다. 육월, 국민당당국은 "오카무라가 일본중국침략의 중앙게통조직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행위는 단지 중국전투에서 관련된 사실과만 관련있으므로 동경으로 보내어 처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중국국내에서 오카무라 야스지를 재판하겠다고 선언한다. 7월 7일 오전, 오카무라는 국방부군사법정의 소환장을 받는다. 그는 12일 상해시상회예배당에서 중국정부의 재판을 받는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다시 한번 황공불안해진다.

 

8월 9일, 오카무라 야스지의 재판을 책임진 석미유(石美瑜) 재판장은 국방부에 "오카무라 야스지를 전범감옥에 수감시켜야 하고, 그곳에서 병치료를 받게 해야한다"는 신청을 올리고, 이는 비준을 받는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상해고경묘전범감옥으로 보내어진다. 즉, 항전승리후 3년만에 오카무라 야스지는 비로소 중국정부의 죄수가 된 것이다.

 

오카무라 야스지가 감옥에 보내어진 후, 감옥장 손개군(孫介君)은 친히 감방으로 가서 '위문'을 한다. 그리고 "선생은 당고협정시와 정전투항시 모두 중국인에게 불리한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를 높이 평가합니다. 장총통도 선생을 재판받게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절대 극형에 처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기라도 좋고, 십년이라도 좋습니다. 결과는 모두 같으니, 안심하고 재판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재판을 받을 때, 중국민중이 재난을 입은 점에 대하여 마음아프다는 점을 표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그 뜻을 눈치챘다. 국민당정부의 고충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데, 재판장 석미유는 돌연 남경정부의 전통을 받는다. 오카무라 야스지 사건의 판결을 잠시 미루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렇게 하여 시간을 끌게 된다. 그 동안 탕은백은 장개석을 만나고, 오카무라 야스지가 정전에 공로가 있음을 설명한다. 그러니, 무죄를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장개석도 대체로 동의한다. 원래, 장개석은 오카무라 야스지를 무죄석방하는데 한 가지 우려가 있었다. 국민당내부에 이에 대하여 많은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탕은백이 잘 설득하여, 마침내 장개석은 오카무라 야스지를 풀어줄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장개석이 머리가 돈 것인지 아니면 의리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1949년 1월 26일, 군사법정은 6개월을 미뤄두었다가, 오카무라 야스지 사건에 대한 마지막 공개재판을 한다. 사전에 석미유는 장개석이 서명한 전통을 받았다: "송호경비사령관 탕은백이 오카무라 야스지의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승인한다." 석미유는 감히 이에 항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개정전에 판결서를 썼다. 재판은 그저 형식이었던 것이다.

 

오카무라 야스지에 대한 판결서는 다음과 같다:

 

"피고 오카무라 야스지는 무죄. 이유는 본사건의 피고인은 민국33년 11월 26일, 중국파견군총사령관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모든 장사, 서주의 회전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폭행 및 주정륭(酒井隆)이 홍콩,마카오, 송정석근(松井石根), 곡수부(谷壽夫)가 남경에서 벌인 대학살사건등은 모두 피고인이 부임하기 전의 일이다. 피고인과는 관련이 없다....최근 일본정부가 정식으로 투항하였고, 피고인은 정전에 모범을 보였고, 백만대군을 이끌고 명을 받들어 투항했다....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피고인은 전쟁법규나 기타 국제공법을 어긴 행위가 없다. 무죄를 선고애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재판이 끝난 후 전국의 상하는 격분한다. 어떤 민간무술조직은 전범 오카무라를 손으로 베겠다고 선언한다. 1월 28일, 중공중앙은 신화사의 성명릉 통하여, 남경측에 강렬한 항의를 전한다. 오카무라 얒스지 판결을 질책하며, 그를 새로 구속하도록 요청한다. 이를 남경측과 평화협상을 벌이는 선결조건으로 삼았다. 중공중앙의 성명은 당시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국내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때 장개석은 이미 하야를 선포하고, 대리총통 이종인(李宗仁)은 평화회담을 쟁취하기 위하여 오카무라 야스지를 다시 체포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송호경비사령부 탕은백은 명령을 자신이 눌러놓고 내려보내지 않는다. 신화사가 이 성명을 발표하는 같은 날에, 탕은백은 즉시 부관을 보내어 오카무라 야스지를 상해에 임시로 마련된 거소로 보내고, 그에게 다음 날 새벽 6시 30분전에 전범감옥에서 집합하여, 다른 구금된 일본인들과 함게 미국 화륜선을 타고 귀국하라고 통지한다. 이렇게 하여, 전점 오카무라 야스지는 중국인민의 분노성 속에 일본으로 가는 화륜선 빅스호에 오른다.

 

귀국후, 오카무라 야스지는 1955년에 일본구군인조직 '전우연맹'의 부회장이 된다. 나중에 '향우연맹' 회장 명예회장이 된다. 군국주의부활활동을 하다가 1966년 동경에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