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위(王偉)
속담에 '호독불식자(虎毒不食子, 호랑이가 악독하지만 자식은 잡아먹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를 훑어보면 후금(청)의 개국황제 누르하치는 자신의 아들을 최고권력까지 끌어올린 후, 다시 그를 그 자리에서 잘라내고, 그의 목숨을 제거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누르하치는 자식을 잡아먹을 정도로 악독한 호랑이였던 것이다.
추잉(褚英)은 누르하치의 장남이다. 만력8년(1580년)에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혈우성풍(血雨腥風) 속에서 자랐다. 누르하치를 따라 남북으로 전투를 하러 다니면서 욤맹한 무적의 장수로 성장한다. 만력26년(1598년), 18세가 된 추잉은 처음으로 1천명을 이끌고 다른 부락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개선한다. 누르하치는 그의 첫출전에서의 뛰어난 전적에 만족을 표하며 그에게 "홍바투루(洪巴圖魯, 만주어로 왕성한 용사라는 뜻임)"라는 칭호를 내린다. 그리고 그에게 패륵(貝勒)의 작위도 내린다. 우라부락과의 전투에서, 추잉은 용감하게 선봉에 서서 전공을 세운다. 누르하치는 그에게 "아르하투투먼(阿爾哈圖土們, 만주어로 널리 경략한다는 뜻)"의 칭호를 내린다. 만력36년(1608년), 추잉은 다시 단독으로 5천명을 이끌고 출정하여 적군 3천을 죽이고, 대량의 전리품을 획득한다.
말타고 활쏘는 것을 첫번째 생존수단으로 삼던 부락에서, 그리고 활과 말을 가지고 천하를 다투던 시대에, 추잉의 용맹함과 전투력은 누르하치를 기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장남의 뛰어난 전적에 흥분했다. 그는 추잉이 대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력40년(1612년), 53세의 누르하치는 최초로 후계자를 결정한다. 그 후계자는 바로 추잉이다. 추잉은 건주여진부락의 2인자가 되어, 1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른다.
추잉이 후계자가 된 후, 그는 즉시 자신의 신분에 맞는 권위를 세우고자 한다. 그는 다이샨, 아민, 멍구얼타이, 홍타이시등 '4패륵'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을 선서하게 한다. 그러나, '4패륵'은 부친이외에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더구나 추잉이 그들에게 말과 재물을 요구하는 횅위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속속 저항한다. 일찌기 누르하치를 따라 전투에 참가했던 페이잉동, 어이두, 후얼한, 허허리, 안페이양구의 '오대신'도 모두 각자 공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추잉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고 광망자대하는 것을 눈꼴시리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대신'도 추잉의 지시에 미적지근하게 대응한다.
추잉은 후계자의 신분을 얻은 후에 철저히 고립된다. 원래 서로간에 사이가 좋지 않던 '사패륵'은 공동의 목적을 향해서 결집한다. 그들은 공동으로 새로운 후계자 추잉에 대항한다. '오대신'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장래 추잉에게 주살되지 않기 위하여 각자 추잉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모두 추잉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추잉은 칼 끝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모두 무력으로 해결하라고 배웠다. 그는 정치모략과 권모술수에는 거의 백치였다. 그는 '사패륵'과 '오대신'이 자기에게 고개를 숙이게 하려면 무력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공공연히 얘기한다: "내가 즉위한 후 나를 반대한 동생과 대신들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추잉은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이치를 몰랐고, 봉망필로(鋒芒畢露)하고 살기를 사방에 뿌렸다.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부치고, 살기등등한 말을 하자, '사패륵'과 '오대신'은 모두 위기를 느낀다. 공동의 안위, 공동의 이익은 그들을 결합시킨다. 그리하여 암중으로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공동으로 누르하칭게 추잉을 고발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추잉의 3대죄상을 고발한다: 하나는 '사패륵' '오대신'이 서로 단결하지 못하게 한 것이고, 둘은 각 동생들에게 말과 재물을 강제도 달라고 한 것이고, 셋은 그가 즉위한 후,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과 대신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추잉을 고발하는 문서를 추잉에게 보여준다. 추잉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전혀 감추려 하지 않았다. 추잉을 후계자로 임명하자마자 이렇게 큰 갈등이 생길줄은 누르하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추잉의 후계자 지위를 지켜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편을 들어 후계자 지위를 박탈할 것인가? 누르하치는 아주 난감했고, 고통스러웠다. 추잉은 용맹하기 그지없었으나, 지모가 부족했다. 자신이 얻은 강산을 그에게 넘겨준다면, 안심하기 힘들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사패륵'은 모두 기주패륵이다. 모두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누르하치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초석이었다. '오대신'은 일찌기 그와 생사를 함께 한 것이 수십년이다. 그들은 그를 위하여 부탕도화(赴湯跳火)하여 강토를 개척했다. 그의 고굉심복들인 것이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건주부락의 생존과 발전도 없었다. 또 한가지, 추잉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하고 기다리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불측한 일을 저질러 그의 지위를 빼앗으려 할 가능성도 있었다.
'두 가지 해로움을 비교해본 후에 손해가 적은 쪽을 선택했다(兩害相權取其輕)" 여진의 기업을 위해 누르하치는 인심이 향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는 추잉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가진 재물을 회수하여 공평하게 분배해준다. 이렇게 하여 추잉의 세력을 약화시킨다. 누르하치는 추잉을 멀리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여러번의 전투에 추잉을 참가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건주를 지키는 책임도 그에게 맡기지 않는다. 이는 세상사람들에게 추잉은 이미 실질적으로 후계자의 지위를 상실했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부친의 이러한 선택에 추잉은 분노한다. 한번은 누르하치가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였을 때, 자신의 심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부왕은 원래 내 것인 사람을 여러 동생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었다.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 나는 차라리 죽고 싶다. 이번 건주의 출병이 실패하면 좋겠다. 만일 그들이 패배하고 돌아오면 나는 그들이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
이때의 추잉은 이미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때였다. 그의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바로 누르하치에 이 내용을 고발한다. 만력41년(1613년), 누르하치는 높은 담장을 한 집에 연금하기 시작한다.
<구만주당안>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의 누르하치는 정권을 건립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만일 추잉을 남겨두고, 계속 존재하게 하면, 대국이 불안정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만력43년(1615년), 누르하치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추잉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36살된 후계자는 이렇게 정치투쟁의 희생양이 된다. 후금정권 혹은 청나라역사에서 최초의 공개된 후계자는 이렇게 실패로 끝난다. 최초의 후계자는 그 자리에서 쫓겨났을 뿐아니라, 목숨까지 잃게 된다.
만력44년(1616년), 누르하치는 칸이 되고, 연호를 천명으로 하며,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한다. 이때는 추잉이 처형된 때로부터 반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추잉의 비극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말해준다. 정치권력이 서로 다툴 때는 정치적성숙이 아주 중요하다. 무엇이 갱몽기편(坑蒙欺騙), 살황저뢰(撒謊抵賴), 사불인장(死不認賬), 무중생유(無中生有), 재장함해(栽贓陷害), 전도흑백(顚倒黑白), 이것들은 모두 정치인들이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을 중상비방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는 수단들이다. 정치적으로 천진하고 솔직한 것은 자신을 팔아먹는 것과 같다. 이런 '지혜'는 정치권력의 혼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다.
명나라 숭저제는 자신의 딸 장평공주에게 칼을 휘두르면서, 망국지군의 가장 큰 인륜의 아픔을 말한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단 말이냐" 누르하치에게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후세인들이 역사를 보면 역사는 항상 놀랄만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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