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발불(梁發芾)
1851년, 중국남방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한다. 전쟁경비를 마련하는 것은 청나라조정의 초미의 급선무가 된다.
이때 어느 모사(謀士)가 당국에 “상고연리(商賈捐厘, 상인이 1/100을 기부한다)”의 계책을 내놓는다. 이것이 채택된 후, 양주(揚州)에서 시행되었다. 주로, 쌀장수들이 자금을 출연하여 군자금을 마련했고, 그 기준은 판매액의 1%였다. 이런 방식은 외견상 자발적인 기부이다. 그리고 기부액은 영업액의 1%이다. 그래서 “연리(捐厘)” 혹은 “이연(厘捐)”이라고 불렀다.(厘의 원래 의미가 100분의 1이라는 것이다.)
함풍4년(1854년), ‘이연’을 주재한 관리가 함풍제에게 보고하여, 그들이 시행한 ‘이연’의 방식을 소개하고, 이 경험과 모범사례를 전국으로 보급하기를 요청했다. 글에서는 전쟁지간중 군자금을 조달하는 임시적인 방법이며, 전쟁이 끝나면 ‘이연’으 즉시 중단된다고 하였다. 함풍제는 마침 군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하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이 그의 우려사항을 덜어주는 제안을 받자, 즉시 호남, 강소, 강서등지에서 실시하게 한다.
“이연”은 지방에서 담당했고, 지방정부는 근수루대선득월(近水樓臺先得月, 물에서 가까운 누각이 달을 먼저 얻는다)이라고, 이 기회를 틈타서 자신의 배를 불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방에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이를 시행한다. 태평군과 전투를 벌이는 성에서 추진할 뿐아니라, 태평군과는 멀리 떨어진 신강, 길림, 감숙등지에서도 속속 시행하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함풍11년(1861년), 호부에서는 <이금장정(厘金章程)>을 반포한다. 전시재정명목으로 자원하여 기부하는 ‘이연’제도가 정식의 국가세수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연’은 ‘이금(厘金)’으로 명칭이 바뀐다. 이는 더 이상 자발적인 기부가 아니라, 강제적인 징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금은 원래 임시적인 전쟁재정이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나면 즉시 징수를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역사상 자주 볼수 있는 상황은 일단 징수를 시작하여, 정부에서 그 단맛을 보게 되면, 적극저긍로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후, 이금은 이미 지방정부의 주요수입원이 되어버렸다. 취소가 불가능할 뿐아니라, 갈수록 강화되고 더욱 악독해진다.
이금은 본질적으로 말해서, 일종의 상품 혹은 영업에 대한 세율이 1%인 비례세이다. 만일 엄격하게 이 기준에 맞추어 거둔다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왜냐하면 어쨌든 청나라말기에 중국의 상품경제가 번성하여, 상품에 대한 세금징수도 할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징수수단이 낙후되고, 특히 각 지방에서 이 기회를 틈타서 관문이나 징수소를 만들어 스스로 배를 불리기 시작한다. 이금은 이렇게 하여 백성과 상인을 괴롭히는 악덕세가 된다. 이금은 생산지에서 징수할 수도 있고, 경유지에서 징수할 수도 있고, 판매지에서 징수할 수도 있다. 만일 엄격하게 한 곳에서만 징수하게 한다면, 하나의 상품에 한번만 납부하면 된다. 세금부담도 그다지 무겁지 않다. 그러나, 사실상 이금은 생산지에서도 징수하고, 경유지에서도 징수하고, 판매지에서도 징수했다. 특히 상품을 장거리운송해야 하는 경우에는 많은 지방을 지나야 하고, 많은 관문과 징수소를 지나야 한다. 매번 관문과 징수소를 지날 때마다 납부해야 하니, 이금은 통행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외에, 이금은 세율의 1%짜리 상품세인데, 실제로 어떤 지방은 세율을 20%까지 올려받기도 했다. 명확한 세율을 제외하고, 이금의 징수자는 무수한 누습과 협박갈취수단이 있었다. 하나의 상품이 여러 지방을 지나면서 여러 관문과 징수소를 지나는데, 납부하는 이금만도 상품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경우가 생긴다.
원래, 청나라정부는 엄격한 중앙집권제도를 시행했다. 지방정부는 독립재정이 없었다. 이금의 징수에 따라, 지방정부는 이금의 80%를 지방에 남겨서 사용할 수 있었다. 지방은 이금에서 가장 큰 이익을 취하게 되므로, 지방당국 혹은 관리들은 자신의 지방에 여러 관문과 징수소를 설치하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렇게 되니 이금의 수입은 갈수록 높아졌다. 1911년 선통3년의 예산에서, 이금수입은 4300만냥에 이르러, 지정(地丁), 관세(關稅)와 함께 삼대수입중 하나가 된다.
관문을 만나면 세금을 내고, 징수소를 만나면 이금을 낸다. 이는 중국의 아직은 유치한 상품경제의 발전에 거대하 장애가 되었다. 중국의 상인과 백성들 심지어 외국열강들까지도 이금제도에 대하여는 분통을 터뜨렸다. 청나라말기에 이금을 폐지하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금제도는 그대로 존속한다.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 군벌들이 지방에 할거하게 된다. 군벌들도 이금의 수입에 의존하게 되므로, 이금을 폐지하는 것은 여러가지 반발에 부닥치게 된다.
1930년이 되어, 국민정부가 비로소 이금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대체하는 ‘통일세’를 교환조건으로 했다. 소위 ‘통일세’는 즉 국내에서 영업세 혹은 소비세를 통일적으로 징수하는 것을 말한다. 상품에 대하여 1회적으로 징수하고, 전국에 통용하는 것이며, 더 이상 관문이나 징수소를 만들어 징수하지 않는 것이다. 관문이나 징수소에서 거두는 이금에 지나치게 의존해왔던 지방을 고려해주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지방의 손실을 보조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렇게 하여 70년간 실행되고, 모두가 분통을 터뜨리던 이금제도는 영업세, 소비세로 대체된다. 도로에 관문과 징수소를 설치하여 이금을 거두던 시절은 이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종종 아이러니하다. 이금을 폐지하기 위하여 중국인은 70년간 분투했는데, 70년후에, 중국대지에는 다시금 각종 관문과 징수소가 설치되고 있다. 다리를 지날 때, 도로를 지날 때 통행료를 내야 하다. 비록 건설자금대출금을 상환하려는 이유는 있으나, 비용징수는 법적 근거도 없고, 사용처도 불투명하다. 도로 다리는 지방정부와 이익집단의 돈나무가 되어 버렸다. 비용징수가 부족하면, 벌금으로 벌충한다. 1년에 도로에서 거두는 걸금이 4000억위안이 넘는다. 이는 매년 징수하는 개별세만큼 크다. 이렇게 지방정부의 꿀단지로 변신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옛날 곳곳에 관문과 징수소를 설치했던 것과 뭐가 다른가?
도로의 남발되는 비용징수와 벌금징수를 근절하려면, 우리는 다시 70년을 분투해야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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