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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과 강호은원

by 중은우시 2011. 9. 7.

글: 남신(南晨)

 

19세기말 20세기초 비록 청나라정부의 통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날로 커져갔지만, 손중산이 사방으로 혁명을 부르짖고 다닐 때, 각종 반청활동은 대부분 홍문(洪門)등 회당(會黨) 조직이 벌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손중산은 회당과의 연합부터 그의 혁명활동을 시작한다. 1886년, 손중산은 광주 박제의학원에 있을 때, 홍문 사람인 정사량(鄭士良)을 알게 된다. 1894년, 손중산은 이홍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개혁을 건의하나, 이홍장은 이 젊은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망끝에, 28살의 손중산은 혁명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해 가을 멀리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다. 대회에서 전체 참석자들은 오른 손을 들어 하늘에 선서한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한다(驅除韃虜, 恢復中華), 합중정부를 창립한다. 만일 두 마음을 먹으면 신명이 살필 것이다." 최초의 회원인 등음남, 양문납은 모두 홍문의 제자들이다.

 

홍문은 명나라말기에 나타났고,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대체로 문(文)으로는 사가법(史可法), 무(武)로는 정성공(鄭成功)을 받들며, 대외적으로 천지회(天地會)라 칭했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종지로 하였다. 나중에 청나라조정이 강대해지자, 홍문은 점차 지하조직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해외로까지 나간다. 태평천국의 난 때 많은 홍문제자들이 참가한다. 난이 실패한 후 많은 사람들이 멀리 해외로 나간다. 미국에서는 치공당(致公堂)을 만든다. 청나라말기에는 홍문의 세력이 다시 커진다. 삼합회(三合會), 소도회(小刀會), 치공당등이 모두 홍문의 분회(分會)이다. 이들을 통칭하여 회당(會黨)이라고 불렀다. 손중산은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청나라말기 광동의 인민중 십중팔구는 홍문의 각 회에 가입했다고. 해외의 홍문세력은 더욱 강대했다. 알려진 바로는 영국화교만 하더라도 치공당에 이름을 건 사람이 십만이 넘었다고 한다.

 

바로 이들 회당의 도움으로 손중산은 신속히 조직을 건립하고 발전시켜갔다. 1895년 2월, 손중산과 정사량등은 홍콩에서 흥중회 총부를 결성한다. 그 회원중 고증이 가능한 사람을 보면 회당분자가 1/3을 차지한다. 일찌기 손중산을 따라 혁명에 투신했던 마초준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국부가 당시 흥중회를 조직할 때, 샌프란시스코 홍문 선배들의 도움이 있었다."

 

1899년 10월, 흥중회, 가로회(哥老會), 삼합회의 우두머리들은 홍콩에서 모임을 갖고, 흥한회(興漢會)를 조직한다. 그리고 손중산을 총회장에 추대한다. 1900년 손중산은 혜주에서 의거를 일으킨다. 이번 의거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삼합회의 우두머리인 황복(黃福)이었다. 그의 호소하에 의거군은 600명의 삼합회무리를 모았고, 삼주전(三洲田)을 점거한다. 그리고 8월 15일저녁에 사만(沙灣)을 급습하여 취한다. 의거가 가장 활발했을 때 참가자는 2만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나중에 총탄이 부족하여 의거군은 해산하게 된다.

 

더욱 효과적으로 홍문의 역량을 집결시키기 위하여, 1904년 1월, 손중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치공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홍곤(紅棍)"의 직을 받는다. 곧이어 미국본토로 가서 치공당의 우두머리인 황삼덕(黃三德)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황삼덕과 함께, 손중산은 각 도시의 홍문 사람들에게 혁명을 선전한다. 동시에 치공당에서 새로 정관을 제정한다. 이때부터 미국의 홍문조직은 혁명의 기치하에 모이게 된다.

 

국내의 회당조직도 마찬가지로, 손중산이 적극적으로 연락하는 대상이었다. 1899년, 손중산은 필영년과 평산주를 호남, 호북일대로 보내어 가로회와 연락한다. 동시에 정사량, 진소백등에게 지시하여 홍콩에서 회당과 연락하는 기구를 만들게 한다. 호남, 호북, 광동등지의 삼합회, 가로회와 흥중회가 연합할 것도 건의했다.

 

같은 해, 호남,호북의 가로회의 저명한 우두머리 수십명이 홍콩으로 가서, 공동으로 흥한회의 설립을 논의하고 세 성의 회당을 통일할 것을 논의한다. 그리고 손중산을 회장에 추대한다. 그후, 황흥(黃興)은 가로회, 삼합회, 청방(靑幇)과 연락하여 화흥회(華興會)를 조직한다; 도성장(陶成章)은 절강, 복건, 강소, 강서, 안휘등 5개성의 회당 우두머리들과 연락하여 항주에서 용화회(龍華會)를 조직한다.

 

손중산은 풍자유에게 일본에서 삼합회를 조직하게 한다. 추근은 바로 삼합회에 속했고, 직위는 "백선(白扇)"이었다(홍곤, 백선은 모두 홍문의 직위이다. 홍곤이 백선보다 높다). 입회의식은 홍문과 같았다. 칼을 목에 놓고, 닭피를 마시며, 화분(火盆)을 넘는다. 이때부터 손중산은 홍문제자를 동원하기 더욱 편리해진다. 그리하여 그후 연속하여 8번이나 의거를 일으킨다. 모두 홍문제자들이 주력이었다. 추근, 서석린의 희생, 왕정위의 귀국후 섭정왕암살사건은 모두 8번 의거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8번의 의거는 모두 실패로 끝난다.

 

당연히, 회당의 성원은 복잡했고, 이는 무장의거의 결말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1909년의 광안의거에서, 의거를 일으키려는데, 의거를 이끌던 사천 가로회의 두목인 여영은 방회분자들에게 차회에서 포위당하여 힐책을 받았다: "우리를 불러서 일을 시키려면, 매일 사백문의 돈을 줘야지, 돈도 주지 않으면서 도대체 뭐하는 거냐?" 이렇게 하여 정보가 새어나가 의거는 실패로 끝난다.

 

1911년 5월, 손중산이 세번째로 방미할 때, 치공당과 동맹회를 합병할 것을 결정한다. 치공당에서 동맹회에 참가하지 않은 구성원들은 일률적으로 동맹회에 가입하도록 한다. 그리고 모든 동맹회의 구성원들도 치공당에 가입하게 한다. 곧이어 손중산은 홍문주향국을 조직하여, 국내의 무장의거를 위한 군자금을 조달한다. 치공당과 홍문주향국의 노력으로, 수개월만에 화교들은 144130위안을 모은다. 이와 동시에 해외 다른 지방에서도 헌금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카나다의 빅토리아치공당은 재산을 저당잡혀 자금을 모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에서도 속속 이를 본받았다...

 

손중산이 해외에서 연락한 회당은 혁명을 지지하기 위하여 주머니를 털었다. 그가 국내에서 연락한 회당은 무장의거때 선봉에 섰다.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고, 신해혁명의 성공에 큰 공헌을 세웠다.

 

신해혁명이 성공하는데 회당의 공로는 지대했다. 그러나, 홍문의 사람인 손중산 대총통은 홍문의 개당위당(改堂爲黨)요구를 단칼에 거절한다.

 

1912년 1월, 손중산은 임시대총통에 부임한다. 곧이어 해외화교들로부터 열정에 넘친 축하전보가 도착하고, 속속 새로 성립된 정부에 대한 지지와 기쁨을 나타냈다. 그중에 가장 적극적인 것은 해외의 홍문조직이었다.

 

당시, 카나다 빅토리아치공당의 전보에서는 먼저 그들의 혁명에 대한 일관된 지지를 나타낸 다음, "우리들은 공공자산까지 희생하여 나라를 위해 쓰게 했다. 대총통이 하루빨리 북벌을 하여 유연(幽燕)을 점령하기를 바란다." 이 서신의 핵심내용은 홍문을 정식으로 등록시켜주고, 귀국하여 합법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장사에서 의거가 성공한 후 회당의 형제들은 편안하고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도독부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시끌벅적했다" 그들은 함께 먹고, 속속 적절하게 조치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도독 초달봉은 이들을 맞이하느라고 공무를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형양이남의 각 회당도 마찬가지였다. 득의양양하여, 일부 회당형제들은 "초대가가 도독을 하니, 이제는 우리 홍가의 천하이다."라고 떠들었다.

 

호남만이 아니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회당이 드러내놓고 아문이나 민가를 점거하여 공구(公口, 회당이 업무를 보는 장소)로 삼고, 산당(山堂)을 건립했다. 어떤 곳은 아예 군정부관아의 앞에 "대한공" "대륙공" "광한공"등 공구의 간판을 내걸었다. 섬서에서, 거의 모든 요직은 글자로 읽을 줄 모르는 가로회의 사람들이 차지한다. 귀주에서, 회당의 공구는 군정부등 각 부서에 들어간다. 사천에서, 이전까지는 암중으로 활동하던 가로회가 돌연 광명정대해졌고, 그들은 공구를 사회에 완전히 공개했고, 시민들도 앞다투어 포가(袍哥)에 참여했다.

 

1912년 3월, 황삼덕과 손중산은 광주에서 만난다. 치공당의 합법화에 대하여 논의한다. 손중산은 입으로는 응락을 하면서도 황삼덕에게 호한민(胡漢民)에게 얘기하라고 한다. 당시 손중산은 이미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했고, 군자금조달등의 업무는 대부분 호한민이 책임을 맡아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호한민은 광동도독을 맡고 있었다. 황삼덕은 바로 도독부에 신청을 올린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황삼덕은 아마도 잘 몰랐을 것이다. 손중산이 귀국한지 2달후, 이전까지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것을. 1912년 1월 29일, 그는 강서의 마육보 및 남창의 각계에 보내는 전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듣기로 회당이 지방을 교란시키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는데, 만일 엄격하게 금지하지 않으면 이는 내가 건설하려는 공화국의 취지와도 위배되고, 민국의 장래 앞날도 문제된다"

 

일시에, 회당을 진압하는 것이 전국의 조류가 된다. 이와 동시에, 전국의 신문에서는 하나도 예외없이 회당에 대한 멸시와 적의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에 대하여 질책한다.

 

얼마후, 손중산은 광동을 떠나 북상한다. 그러나 광주에서 황삼덕은 여전히 홍문의 합법화를 위하여 뛰어다닌다. 손중산은 일을 미뤄버리고, 호한민은 이 일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번은 황삼덕이 호한민을 만나서, "홍문이 혁명을 도왔는데,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지금은 그까지 종이 한장인 등록승인까지 거부한다면, 양심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만일 홍문의 등록을 해주지 않는다면, 홍문사람들이 기부했던 군자금을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각지의 홍문은 혁명을 도우기 위하여 자산까지 팔거나 저당잡혔다. 하나하나 모두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호한민은 이를 듣고는 다시 책임을 손중산에게 떠밀었다.

 

혁명당은 이렇게 생각했다. 홍문은 예전부터 한족통치를 회복하는 것을 취지로 하였다. 지금 목적을 달성했으니, 역사적인 사명은 이미 완수한 것이다. 즉, 국내에서 등록하여 활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수의 혁명당 사람들이 보기에, 당초에 회당과 연락한 것은 미봉책이었다. 혁명이 성공하자, 그들의 태도는 급전직하한 것이다.

 

당연히 개별적으로 회당과 관계가 밀접한 혁명당 사람들은 심각하게 회당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예를 들어, 담인봉은 일부 회당개조에 관한 방안을 만든다. 그리고 일련의 구성원교육, 직업훈련, 사회생계사업추진, 무직인 구성원의 처리방안등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했고, 호남에서 먼저 시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막 길거리에 간판을 내걸려고 할 때, 혁명당인인 유빙농이 협박을 받고 폭약을 던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후 입헌파에서는 "회당의 비적들이 이렇게 날뛰다니"라고 하면서 대거 소탕에 들어간다. 담인봉도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진행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런 배경하에, 1912년 7월 1일, 상해에서 홍방, 청방과 가로회의 세 방회가 연합하여, "중화민국공진회"를 결성한다. 응기승이 회장을 맡는다. 성립대회에서 저명한 가로회의 우두머리인 장요경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 이미 세 집안이 하나로 되었고, 하나의 대단체가 되었다." "동포들이 옛날의 잘못을 회개히고 이제부터 좋은 일을 하며, 법률을 함께 지키고, 자유를 누리자." 그러나, 사방의 회중들은 여전히 사회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론의 성토를 받고, 견책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