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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의 혜주의거는 왜 실패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10. 5. 7.

글: 장명(張鳴)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하고, 청나라황실이 도망간 틈을 타서, 손중산의 혁명당은 광동의 혜주(惠州)에서 첫번째 무장의거를 일으킨다. 이것이 혜주삼주전(惠州三洲田)의거이다. 이번 의거는 시국전환의 관건이었다. 이 의거를 통하여 중국인들은 더 이상 그들을 난신적자(亂臣賊子)로 보지 않고 오히려 동정하게 된다. 사실, 손중산은 중국인들이 그들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은 이 의거와 크게 관계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청나라정부가 경자지변때 보여준 형편없는 모습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든간에, 혜주삼주전의거는 혁명당인들의 의거계보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의거는 다른 혁명당의 많은 의거와 마찬가지로, 방회(幇會)의 역량을 이용했다. 구체적으로는 혜주의 홍문삼합회(洪門三合會) 혹은 삼점회(三點會)의 무리들을 이용했다. 원래, 홍문은 정치성이 강하지는 않다. 소위 반청복명의 목적은 조정의 압박을 받은 후에 추가된 것이다. 사회에서 토지를 잃고 유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고향과 친족을 떠나서 생활하자면 조직이 있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방회도 좋고, 민간종교도 좋고,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탄압하였다. 그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고대의 조정은 약한 정부였고, 통제력이 강하지 못했다. 탄압한다고 해도 탄압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방회는 살아남았다. 정치적으로 반정부세력을 꿈꾸는 자들이라면 자연히 이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태평천국도 이들을 이용했다. 무술유신이 진압되면서 급진적인 유신파도 이들을 이용했다. 마지막으로는 혁명당이다. 일찌기 흥중회가 만들어질 때부터, 손중산은 해외의 홍문에 가입한다. 그리고 방회를 이용했다. 국내에서 총칼을 휘두르며 반란의 깃발을 들 때 원래 조정에서 불법단체로 규정지은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했다.

 

혜주라는 곳은 광동에서 자체적인 계통을 갖추고 강인한 기풍을 지닌 곳이다.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많았고, 홍문세력이 큰 편이다. 여기는 반란을 획책하기 이상적인 장소이다. 혁명당은 신해무창혁명이전에 모두 10번의 의거를 일으키는데, 그중 두번이 혜주에서이다.

 

방회를 책동하여 의거를 일으키더라도, 방회는 리스크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 죽기를 무릅쓰고 살아가고 있었고, 국가의 법률을 어기고 살아가는 유민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일에는 첫째는 돈이 들고, 둘째는 무기가 필요하다. 방회에 있어서 이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엇이 혁명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거래였다. 칼에 묻은 피를 핥는 거래였다. 평소의 자잘한 사건들과 비교하면 이번이 좀 더 큰 것일 뿐이었다. 돈은 혁명당이 가지고 있었다. 매번 의거때마다, 그들은 해외에서 자금을 모았다. 자금이 충분히 모이면 의거를 발동한다. 의거를 발동시킨 후엔는 매일 돈을 지급한다. 길거리를 지나면 곳곳에서 의거를 일으킨 자들이 돼지를 잡고 술을 따르고, 먹고 마시고 있다. 물건들은 빼앗은 것이 아니다. 이를 보면 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총도 구하기 쉽다. 혜주는 복건에 가까운데, 복건의 건너편은 일본이 점거하고 있는 대만이다. 복건도 일본의 세력범위에 들어갔다. 대만에서 하문으로 총포가 밀매되었기 때문에 보통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는 홍문의 손에는 최신식의 총이 쥐어져 있었다.

 

의거의 발동은 시기가 중요하다. 북경이 팔국연합군에 점거되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웠다. 동시에 대만의 이론총독인 고타마 겐타로(兒玉源太郞)는 손중산을 직접 지원했다(이는 일본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항상 중국정부의 반란자를 지원한다). 그리하여, 의거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 일본인들도 있었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궁기인장(宮埼寅藏), 평산주(平山周), 복본성(福本誠), 원구문일(原口聞一), 원등융부(遠藤隆夫), 산하도(山下稻), 이동정기(伊東正基), 대기(大埼), 이등암기(伊藤巖埼)등 십여명이다. '국제종대'라고 할 수 있다. 계획은 먼저 정사량(鄭士良)등이 혜주삼주전(三洲田)에서 먼저 조직하고, 손중산이 일본동지들을 데리고 함께 의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사량이 몰래 혜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손중산등은 홍콩영국당국에 의하여 저지당한다. 정사량은 자금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흩어지려고 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의거를 일으켰다. 만일 성공하면 해변의 지방을 점거하고, 대만에서 올 원조를 기다리려고 했다.

 

의거를 일으킬 때, 의거군들이 지닌 총기는 훌륭한 것들이었다. 그린대포와 모젤총이었다. 그리하여 잠시 우세를 점하고, 청나라군대를 몇몇 물리친다. 청나라병사를 포로로 잡은 후, 그들의 변발을 잘라버리고, 그들을 일꾼으로 썼다. 비록 후세의 역사에는 이들을 혁명의거군이라고 부르지만, 현지인들은 여전히 이들을 홍두적(紅頭賊)이라고 불렀다. 이들을 태평천국의 난 때의 홍건군과 똑같이 본 것이다. 의거군은 허리에 붉은띠를 두르고, 머리에 붉은 수건을 매고, 붉은 기를 휘둘렀다. 우두머리는 머리에 새깃털을 꽂았고, 가슴에는 붉은 수구(繡球)를 꽂았다. 의거가 실패한 후, 청나라군대에 맞아죽은 우두머리의 몸에는 여전히 붉은 붉은 비단으로 마든 수구가 붙어있었다. 혁명당인들이 일으킨 의거이지만, 참가한 홍문은 여전히 다른 반란을 일으킨 농민과 가찬가지로 희극에서 하는대로 따라했다.

 

비록 중국조정이 한동안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지만, 광동의 지방관리들은 의거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도망을 쳐버렸다. 그러나, 현지의 민간조직들은 방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전히 청나라군대를 도와서 의거군에 대항했다. 비록 의거군이 한때 이만명에 가까워지기도 했고, 세력이 적지 않았지만, 바로 이때 일본내각이 교체되고, 새로운 총리대신은 정책을 바꾸어 손중산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상했던 대외원조는 오지 않았다. 돈도 떨어졌다. 탄약도 없다. 그러자 삼합회 무리들은 일거에 흩어져 버린다. 의거에 참가했던 두 명의 일본인이 사망했다. 정사량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의거는 실패한 것이다.

 

홍문은 혁명이나 이데올로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의거는 용병의거라고 할 수 있다. 돈이 있으면 사람들도 모이고, 돈이 없으면 사람들은 흩어져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