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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남경 자금산 중산릉(中山陵)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9. 5. 11.

글: 예방육(倪方六)

 

사람들은 다 이렇게 알고 있다. 손중산이 남경에 묻힌 것은 손중산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고. 1925년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손중산은 북경(당시 명칭은 北平) 철사자후통(鐵獅子胡同)의 행관에서 서거했다. 손중산의 병세가 위급해졌을 때, 송경령(宋慶齡, 손중산의 처), 손과(孫科, 손중산의 아들), 그리고 왕정위(汪精衛), 하향응(何香凝)은 병석의 한 귀퉁이에서 기다리면서, 후사를 논의하였다. 왕정위가 손중산이 죽은 후에 북경의 경산(景山)에 묻자는 의견을 내놓자, 이미 혼미상태에 빠졌던 손중산이 이때 돌연 깨어나서, "안된다. 안된다. 나는 자금산에 묻어달라." 이것이 바로 손중산이 죽기 전에 스스로 남경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경위이다.

 

일찌기 민국초기(1912년)에 손중산이 남경에서 임시대총통으로 있을 때, 여러번 자금산에 가본 적이 있다. 국민당의 공식자료에 따르면, 이해 3월 10일, 이미 46세가 되고, 임시대총통의 직위를 사임한 손중산은 국민당원로이며, 초기의 주요지도자중 하나이자, 일찌기 국민당 중앙상우위원회주석을 역임한 적이 있는 호한민(胡漢民)등과 자금산으로 가서 사냥을 하면서 논 적이 있다.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손중산은 이곳이 푸른 산을 등지고, 넓은 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기세가 웅혼한 것을 보고, 웃으면서 좌우의 막료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국민들에게 이 땅을 달라고 해서, 내 몸을 묻고 싶다."

 

이것은 손중산이 가장 먼저 남경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 기록이다. 그러나, 자금산은 아주 크고, 손중산은 장래 어디에 묻어달라고까지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서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그가 병사한 후, 능의 위치가 문제로 떠올랐다. 현재의 능의 위치는 자금산의 제2봉인 소모산의 언덕에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정해진 것인가?

 

원래, 이땅은 손중산의 부인인 송경령이 친히 산을 올라가서, 손중산을 위하여 정한 것이다.

 

경과는 이렇다. 손중산이 남경 자금산에 묻어달라고 한 유언을 받들어, 장례준비위원회가 성립되기 전에, 북경의 치상처(治喪處)는 일찌기 국민정부 주석을 역임한 적이 있는 임삼(林森)을 보내어, 남경에서 장지를 물색하도록 하였다. 임삼은 북경에 되돌아운 후 치상처에 그 결과를 보고했고, 치상처의 대표는 당시의 단기서(段琪瑞) 정부와 협의하였다.

 

손중산의 장례준비위원회가 성립된 후, 제일먼저 가족과 장례준비위원회 준비처 대표인 임환정, 섭초창등과 남경의 현지를 답사하고, 업무순서를 확정했다. 4월 21일 아침, 송경령, 손과등은 상해에서 남경으로 왔고, 오전에 남경각계의 손중산추도대회에 참석한 후, 오후에 자금산으로 가서 땅을 보았다.

 

송경령일행은 먼저 '호산(虎山)'으로 갔다. 이곳은 명효령(명태조 주원장의 묘)의 서쪽에 있는 작은 언덕이다. 지세가 비교적 낮아서 묘지로 삼기에 부적절하여 그자리에서 부정된다. 곧이어 산을 동쪽으로 오르다가 소모산에 이르렀는데, 도중에 두 곳의 작은 언덕을 발견했다. 그날은 결정을 내리지못하고 내려온다.

 

다음 날, 다시 산을 올라서 살펴본다. 송경령은 험준한 북쪽언덕으로 자금산 꼭대기에 올랐다. 산꼭대기에서 소모산 만복사(이 절은 지금 중산릉 동북의 평탄한 곳에 있다)로 갔다. 산꼭대기에서 남쪽으로 보니, 자하호 부근에 편평한 곳이 있었는데, 면적이 작아서 쓸만하지 못했다.

 

당시 어떤 사람은 이렇게 건의했다. 묘지를 산모산(山茅山)의 꼭대기로 정하자고. 암중으로 손중산의 공적이 산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송경령은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소모산(小茅山) 남쪽의 햇볕을 받는 곳이 대충 괜찮을 것같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묘지위치이다. 당시에는 현지고찰을 한 후에, 최종적으로 확정짓지는 않고, 송경령이 상해로 되돌아간다.

 

4월 23일 저녁, 장례준비위원회는 제2차회의를 개최한다. 송경령의 의견을 내놓고, 자금산의 두번째 높은 봉우리인 소모산의 남쪽언덕을 장지로 하자고 확정하고, 주임간사인 양행불을 남경으로 보내어, 토지확보, 측량, 사진촬영등을 하도록 하여, 묘를 만드는 사전준비작업을 벌이게 한다.

 

송경령이 풍수를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녀가 정한 위치는 풍수가들이 보기에도 '풍수길지'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강남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듯이 자금산은 남경동쪽교외의 조양문밖에 동서로 약 14킬로미터, 남북으로 약 7킬로미터로 총면적이 약 20여평방킬로미터가 된다. 산위에는 자색의 바위층이 있는데, 햇볕에 비치므로, 멀리서 보면 자색이 황금빛으로 비치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자고이래로 사람들이 묘지의 명당으로 생각해왔다.

 

남경의 산맥은 기복과 굴곡이 있다.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같다. 그리하여 고인들은 남경을 "종부용반(鍾阜龍蟠)"이라고 불렀다. 현재의 자료를 보자면, 자금산은 모두 세개의 큰 봉우리가 있다. 제일 높은 봉우리 즉, 주봉은 북고봉(北高峰)으로 해발 468미터이다. 두번째 높은 봉우리는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데, 이름이 소모산이다. 해발 360미터이다. 이곳이 바로 중산릉이 있는 곳이다. 세번째 높은 봉우리는 서남쪽에 치우쳐 있는데, 태평천국때 산꼭대기에 천보성(天堡城)을 쌓았다. 그리하여 천보산(天堡山)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유명한 자금산천문대는 바로 이 산꼭대기에 세워져 있다.

 

왜 소모산 일대가 자금산에서 가장 좋은 묘지인가? 원래 근대에 이르러, 대망왕조의 개국황제인 주원장의 효릉에 있던 왕기가 이미 쇠약했고, 소모산 일대는 용맥이 모여있는 곳이 되었다. 고대에는, 자금산에 종산(鍾山), 장산(蔣山)등의 별명이 있었는데, 자금산으 ㅣ지리형세를 대표하는 것은 용산(龍山)이라는 명칭이다. (동남쪽 수십리 떨어진 곳에는 청룡산이 있다)

 

자금산의 '용맥'은 강남의 소룡이다. 대룡은 '모산산맥(茅山山脈)이다.

 

모산은 도교의 제일승지로 여겨져 왔고, 제8동천으로 유명하다. "용신(龍身)"은 지금의 강소성 구용시이고, 용수(龍首)는 바로 자금산이다. 주원장이 당시 궁성으로 선택한 자금산의 서남록, 죽은 후에 묻힌 자금산은 바로 명나라때 풍수대가인 유기(劉基)의 이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현재 중산릉이 소재한 산맥은 왜 소모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 바로 모습이 모산과 같고, 승경이 모산과 겨룰만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곳은 도가의 성지이다. 현재 조사결과에 따르면, 자금산은 확실히 모산의 여맥이고, 고대 풍수가들의 '일맥상승'이라는 설을 입증해준다.

 

주원장의 효릉은 자금산 남록의 "독룡부(獨龍阜)"에 있다. 이곳은 중산릉에서 아주 가깝고, 소모산의 서쪽이다. 당시 유기등 명나라때의 풍수가들이 가장 좋게 본 부지이다. 주원장도 좋아했다. 주원장은 지금 손중산과 이웃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송경령이 소모산의 언덕을 손중산의 장지로 선택한 것은 너무나 우연한 일치라고 한다. 미신자들은 이것이 일종의 '인과'라고도 한다.

 

당시 손중산이 혁명의 길로 들어섰을 때, '복명'사상을 지니고 있었고, 명나라를 중화민족의 정종으로 보았다. 만청왕조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직위를 사임했을 때, 손중산은 '근대민주엘리트'를 이끌고 주원장의 효릉을 배알하였다. 손중산을 직접 <<제명릉문(祭明陵文)>>을 읽었다.

 

근래에 또 다른 새 발견이 이루어졌다. 손중산이 자금산에 묻히기 희망한 것은 또 하나의 우연이 겹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남경의 '풍수사'를 언급하기로 하자. 남경은 잘 따져보면 '십조고도(十朝故都)'이지 '육조고도(六朝故都)'가 아니다. 가장먼저 남경이 제왕의 패업과 수성을 이룰 수 있는 땅이라고 인정한 사람은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육국을 통일한 후, 동남방 남경이 소재한 지방에 '천자의 기운'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동쪽으로 남경으로 와서 이 기운을 제압했다. 당시 그는 남경부근의 한 산을 올랐는데, 그 산이 아주 특이했다. 산꼭대기는 관인(官印)처럼 편평했고, 곁에 있는 술사는 이곳이 '천인(天印)'이라고 말했다. '천자의 기운'은 바로 이 곳에서 솟아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인산(天印山)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 산은 현재 남경 강녕구에 있는 방산(方山)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천인산의 '목'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한다. 이 강이 바로 '진회하(秦淮河)'이다. '진회'라는 이름은 바로 진시황에서 유래한 것이다.

 

남경은 삼국시대에 흥성한다. 당시 남경의 풍수를 가장 높이 평가한 사람은 촉나라의 승상 제갈량이었다. 그는 배를 타고 동쪽으로 와서 오나라의 손권에게 '형주를 빌려달라'고 할 때, 서쪽의 청량산부근의 부두에서 내리면서, 말을 타고 나간다. 청량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말을 멈추고 주변을 바라보면서 '좋다'고 감탄을 한다. "이곳은 진정 호거용반(虎距龍蟠)의 땅이로다' 나중에 제갈량이 말을 세우고 감탄했던 장소를 "호유관(虎遺關)", "용반리(龍蟠里)"라고 부른다. 이 지명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강소성 인민의원 서쪽이다.

 

손권은 금릉이 제왕의 도읍지라는 설을 믿고, 금릉에 수도를 정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동오대제(東吳大帝)'이다. 남경은 이때 비로소 처음으로 황제를 배출한다. 중국장강유역에서 처음으로 황제를 배출한 곳이 된다.

 

손권이 죽은 후, 어디에 묻을 것인가? 바로 자금산이다. 이것은 손중산과 관계가 있는가? 관계가 크다. 원래, 새로 발견한 손씨가족족보를 보면, 손중산은 바로 손권의 후예이다. 이것은 바로 '조상을 찾아간 것'이 아니겠는가?

 

손권은 춘추시대의 저명한 군사가 손무의 후예이다. 손무는 오자서의 추천을 받아, 오왕 합려에게 중용되고, 일대의 명장이 된다. 오나라가 멸망한 후, 손무의 후손은 강남의 부춘 일대에서 은거한다. "부춘손씨"는 중국의 일대 명문거족이 된다. 1980년대, 손중산의 족보가 광동에서 발견되는데, 족보의 명칭은 <<부춘손씨종보>>였다.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손중산의 조상은 바로 부춘손씨이다.

 

사실 일찌기 1930년대에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객가문화연구의 개척자인 나향림(羅香林, 1906-1978) 교수는 손중산의 집안내력을 고증해본 바 있다. 그리고 1933년 <<국부가세원류고>>라는 책을 펴낸다. 여기서 손중산의 조상은 절강에서 복건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광동으로 이주했다고 확인했다.

 

손권의 묘는 나중에 발견되는데, 바로 중산릉 부근이었다. 구체적인 지점은 명효릉의 왼쪽 앞의 언덕위였다. 중화민국의 대매국노 왕정위의 파헤쳐진 묘의 근처이다. 이것은 사서에서 주원장이 묘를 만들 때, 손권은 사나이이므로 그의 묘를 지켜주라고 하여 묘가 훼손되지 않았다는 설과 완전히 일치한다. 손권묘는 당시에는 중산릉처럼 컸을 것이다. 십여년전에, 강소성의 관련부서에서 손권묘의 탐색을 과제로 하여 찾았는데, 강소성 지진국의 공정연구원의 연구인원들이 자기측정방법을 써서 이 묘를 찾아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손권묘의 지궁(地宮)은 "갑(甲)"자 모양을 하고 있고, 묘도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모두 산을 파고 바위를 깨어서 만든 것이다. 공사량이 엄청났다. 당시에 많은 인력을 동원했을 것이다. 손권묘가 도굴되었는지 여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고대인들은 "조상묘는 후손들에게 복을 주고, 자손은 선조를 빛나게 한다"는 말을 믿었다. 손권은 기원전 252년에 죽어서 일찌감치 잊혀졌다. 이천년이 지난 후, 손중산이 이 곳에 묻히면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동오대제를 떠올렸다. 이는 정말 "자손은 선조를 빛나게 한다"는 말이다. 이름도 잊혀졌던 묘지도 이름을 갖게 된다: "매화산(梅花山)". 이 산은 확실히 손중산의 덕을 보았다. 손중산이 묻힌 후에, 국민정부는 이 곳에 매화를 많이 심었다. 매화가 온 산을 뒤덮자 매화산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다.

 

손중산이 자금산에 묻혀서 조상을 찾은 일을 제외하고도 또 하나의 우연의 일치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 남경에 묻힌 제왕은 손권이다. 현재까지 가장 나중에 남경에 묻힌 제왕은 임대대총통 손중산이다. 이것도 인과의 윤회가 아닐까?

 

실제로 손중산이 자금산에 묻힌 것에는 너무나 많은 우연이 겹쳐 있다. 자금산은 한나라때는 "종산(鐘山)"이라고 불린 적이 있다. 2천년후에는 "중산(中山)"을 묻는다: 근대인들은 손중산을 주원장보다 뛰어나다고 믿는데, 중산릉의 위치는 명효릉보다 살짝 위에 있다; 손중산이 제일 처음 자금산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 3월 10일인데, 병으로 사망한 날이 3월 12일이다. 바로 앞뒤로 이어진다; 제왕릉을 만들면 반드시 사람이 죽는다. 중산릉의 설계자인 여언직은 능묘가 완성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다만 유감스러운 점도 있다. 송경령은 자기 스스로 손중산의 묘지를 선정하고도, 자신은 죽은 후에 자금산에 묻히기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