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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두 명의 제환공(齊桓公)

by 중은우시 2011. 9. 6.

글: 기련해(紀連海)

 

전국시대의 신의(神醫) 편작(扁鵲)을 일찌기 제(齊)나라에 간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제나라의 군주인 제환공(齊桓公)을 진맥한다. 편작은 제환공에게 말한다: "당신은 병이 들었다" 그러나, 제환공은 믿지 않는다. 병과 의원을 꺼리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편작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군주에 책임지는 자세로 반복하여 얘기한다. 그러다가 세번쨀 편작이 제환공을 보았을 때는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었다고 느낀다. 이미 병이 뼛속까지 들어가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바로 진(秦)나라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원전356년에 전씨(田氏) 제나라의 제환공이 사망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것은 <편작이 채환공을 만나다(扁鵲見蔡桓公)>가 아니냐고? 그는 제환공도 또 만났단 말인가? 어떻게 두 사건이 이렇게 똑같은가?

 

맞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것은 확실히 <한비자. 유로>편에 있는 <편작견채환공>이다. 그 안에 기록된 것은 확실히 편작이 채환공을 만난 이야기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중국역사상 "채환공"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채환후(蔡桓侯)"라는 인물은 있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채환후"는 기원전695년에 이미 죽었다. 그가 죽은 시기는 407년에 태어난 편작보다 280년이나 앞선다. 게다가, 이 채(蔡)나라는 그후 기원전447년에 멸망한다. 그 때는 편작이 아직 출생하기도 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판단해볼 수 있다. 편작이 채환공을 만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고대인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면 오차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역사의 진상은 여러가지로 고증을 해서 가려내야 한다. 그렇다면, <편작견채환공>의 채환공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당연히 제나라의 제환공(齊桓公) 전오(田午)일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이미 채나라가 망했고, 제나라는 이때 원래 채나라의 수도였던 상채(上蔡)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얘기했으니, 제환공의 내력도 얘기해보기로 하자. 대명이 자자한 강소백(姜小白) 즉, 제환공이 재위하던 시기에 난민을 하나 받아들인다. 이 난민은 바로 제나라의 이웃나라인 진(陳)나라에서 왔다. 당시 진나라의 군주는 진려공(陳勵公)인데, 진려공이 죽은 후, 진나라는 내란에 빠지고, 진려공의 아들인 진완(陳完)은 강상(姜尙, 강태공)이 건립한 제나라로 피난을 간다. 당시는 바로 제환공이 재위하고 있던 시기이다. 제환공은 진나라의 공자가 피난을 오자 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리하여 진완은 제나라에 자리를 잡게 된다.

 

진완은 역사상 전완(田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중국의 고음(古音)에서는 전(田)과 진(陳)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완을 전완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진완의 4대손에 전환자(田桓子)가 있다. 기원전545년, 그는 포씨(鮑氏), 난씨(欒氏), 고씨(高氏)와 연합하여 제나라의 또 다른 명문거족인 경씨(慶氏)를 멸망시킨다. 당시 제나라에는 칠대가족이 있었다. 각각, 전(田) 포(鮑), 난(欒), 국(國), 경(慶) 고(高), 고(高). 고씨가족은 둘이었다. 그후 다시 몇 해가 흐르고 전씨는 다시 포씨와 연합하여 난씨와 고씨중 하나를 멸망시킨다. 이 때, 전환자는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잘보이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왕공귀족들에 대하여는 누구든지 국왕으로부터 봉지를 받지 못했거나, 노예를 받지 못했으면, 그가 땅을 조금 나눠주거나, 노예를 조금 나눠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에 대하여는 양식이 없으면 양식을 가져다 주었다. 나중에 갚든 말든 그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도 '큰 말로 주고, 작은 말로 받는' 조치를 취한다. 나중에 그가 죽고 아들 전걸(田乞), 즉 전희자(田僖子)가 상(相)된다. 그도 부친과 같은 방법을 계속하여 쓴다. 이리하여 전씨의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당시 제나라는 국씨와 고씨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

 

기원전489년, 제경공(齊景公)이 죽은 후, 전걸이 정변을 일으켜, 국씨, 고씨를 쫓아낸다. 그리고 공자 양생(陽生)을 국군으로 올리니, 그가 제도공(齊悼公)이다. 전걸은 스스로 상이 된다. 이때부터 전씨가족이 제나라의 상(相)의 자리를 영원히 차지하게 된다. 전걸이 죽은 후에는 전항(田恒), 즉 전성자(田成子)가 부친의 정책을 계속하여 집행한다.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할 것은 중국의 고음에서 항(恒), 상(常)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원전481년, 전성자는 제간공(齊簡公)을 죽여버리고, 제평공(齊平公)을 세운다. 이때부터 제나라의 국군은 전씨가족의 허수아비로 되어버린다. 구십년후인 기원전391년, 국상 전화(田和)는 강씨 제나라의 마지막 국군인 제강공을 쫓아낸다. 약간의 토지만을 제강공의 식읍으로 남겨준다. 이렇게 하여 국상 전화는 전체 강씨 제나라의 주인이 된다. 이때부터 강씨 제나라는 끝이 난 것이다.

 

강씨 제나라는 강상이 기원전1046년에 개국한 때로부터 기원전 379년 제강공(齊康公)이 죽을 때까지 모두 32명의 군주, 647년간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주왕(周王)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기원전386년, 주왕실은 전화를 제후(齊侯)로 정식 임명한다. 얼마후, 제강공이 죽고, 강씨 제나라는 후사가 끊긴다. 전씨 제나라가 정식으로 건립된 것이다. 전화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전씨 제나라의 제환공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할 점이 있다. 제나라 역사상 제환공이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강씨 제나라의 제환공이고, 다른 한 명은 전씨 제나라의 제환공이다. 전씨 제환공도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강씨 제환공과 비교하자면 명성에서 손색이 많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대명이 자자하다 바로 전설상의 제위왕(齊威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