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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일대명군(一代明君)은 어떻게 주왕(紂王)으로 요마화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1. 4. 5.

글: 월초(越楚)

 

 

 

지금으로부터 3100년전인 은상(殷商) 말기에 키가 크고, 힘이 세며,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는 고대의 '수퍼맨'이 나타난 적이 있다.

그의 재지는 복잡한 사물에 대하여 순식간에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사서에는 그의 힘에 관하여 '아홉 마리의 소를 끌어당길 수 있는 위력이 있고, 서까래를 들어 기둥을 옮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아홉'은 많다는 의미이지 꼭 아홉마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일찌기 동이를 함락시키고, 강역을 장강유역까지 확장했으며, 동남지역을 경영하며 중원문명을 전파한 바 있다.

이 지용쌍전(智勇雙全)의 고대 수퍼맨은 바로 후세인들이 '주왕'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제신(帝辛)이다.

제신은 장남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친인 제을(帝乙)이 총애하여, 후계자가 되고 군주의 자리를 이었다.

제신이 즉위한 후, 노예를 살륙하는 구제도를 폐지하여, 노예를 사회에서 부를 창조할 수 있게 해주고, 노예들에게 국가공무에 참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도경화종(刀耕火種)의 생산방식을 바꾸어 대규모으 집단생산을 실행하였으며, 소를 사용하여 경작하는 것을 시작하고, 관개배수등 농경기술을 시작하여, 농업생산력이 급속히 발전하게 한다.

동시에, 수공업을 대거 일으켜, 상왕조는 다시 한번 중흥기를 맞이한다. 그리하여, 맹자는 제신에 대하여 '고가유속, 유풍선정(故家遺俗, 流風善政)"이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의 동이(東夷)는 비교적 강대한 부락이었다. 자주 은상의 땅을 침입했고, 서민백성을 약탈했다. 무정(武丁) 때부터 제을에 이르기까지, 여러번 토벌하였지만, 철저히 제압하지 못했다.

제신은 웅재대략을 지녀, 대량의 청동기무기를 주조하여, 친히 대군을 이끌고 동이를 정벌한다. 동이의 각부족을 연합하여 저항하였지만, 상나라 대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었다. 제신은 장강하류까지 치고 내려가고, 많은 동이부락을 복속시켜, 대승을 거둔다.

이때부터, 중원과 동남은 통일되고, 중원문명이 동남일대에 전파된다.

그러므로, 제신은 역사상 큰 공적이 있는 일대명군이라 할 수 있다.

곽말약 선생은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신이라는 사람은 우리 민족발전사상의 공로가 그냥 덮어둘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상나라말기에 큰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남을 정벌한 것이고, 동남연해를 경영한 것이다. 이 일은 주나라이래의 역사학자들이 모두 말살해버리고 있다. 이 사건은 내가 보깅 주나라사람들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보다 우리 민족에 대한 공헌이 더욱 위대하다."

모택동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신은 그때 명망이 높았다. 상나라의 백성들이 그를 옹호했다. 제신은 자살하였다. 그는 죽을 지언정 항복하지는 않았다." "주왕은 재주가 뛰어났다. 문,무에 모두 능한 사람이었다. 주왕이 서주의 오랑캐를 정벌하면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손실도 컸다. 포로는 너무 많았다. 소화할 수가 없었다. 주무왕은 빈틈을 타서 공격했고, 대량의 포로들은 창을 거꾸로 겨누었다. 결국 상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사실상, 상나라의 멸망은 확실히 우연성이 있다. 당시 상나라군은 이미 전차를 사용했고, 청동병기도 갖추었다. 출병한 병력이 많을 때는 1.3만명에 달하였을 정도로 황하와 장강유역에서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나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서주는 딴마음을 품은 제후들과 연합하여 돌연 '무왕벌주(武王伐紂)'의 전쟁을 일으킨다. 제신은 주력군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황급히 노예인 이민족 포로들을 데리고 수도인 조가(朝歌)를 방어할 준비를 한다.

양군의 교전때, 주로 동이에서 온 노예들이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전쟁터에서 창을 거꾸로 겨누는 바람이 상나라군대가 궤멸한다. 제신은 스스로 강대하다고 자부하였으므로 수도에 방어시설을 갖추지 않았다. 조가에는 성벽을 쌓지도 않았고, 그저 호구(壕溝)만 하나 파놓았을 뿐이다. 수도의 안전은 모조리 공격에 의존했다.

이는 무왕이 기습을 하여 성공할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제신은 성이 함락된 후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한다. 일대명군인 영웅의 말로는 이렇게 비장했다. 이점은 나중의 초패왕 항우와 유사하다.

그렇다면, 각종 고서적에나오는 제신이 포악했다는 기술을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곽말약은 이를 '후인들이 주나라사람들이 선전한 독을 깊이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누가 역사를 왜곡했는가? 제신은 주나라사람들에게 철저히 왜곡당했고, 심지어 요마화되었다.

사람들은 제신의 본명이 수(受)인데도, 굳이 그를 주왕(紂王)이라고 불렀다. '주(紂)'는 '잔의손선(殘義損善, 정의도 없고, 선도 없다)' 혹은 '천인다루(賤仁多累)'라는 의미이다.

은상을 대체한 주나라의 어용문인들은 명칭에서 제신을 '주왕'으로 요마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마천은 <사기>에서 '천하가 그를 주(紂)라고 부른다'고 적었다.

무슨 '천하'인가 바로 주나라왕실의 취고수(吹鼓手)들일 뿐이다.

이렇게 제신을 폄하한 의도는 바로 세상사람들에게 제신은 포악하고 무도한 자이니, 무왕이 주왕을 토벌한 것은 '정의의 전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주나라왕실이 은상을 대체한 것도 민심이 바라던 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천년이래로, 사람들은 상나라의 멸망을 얘기하면서, 왕왕 고서에 기록된 주왕의 황음무도, 주지육림, 요비총애, 충신살해, 포락형벌등등을 떠올린다.

이 주왕의 죄악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갈수록 늘어났다. 가장 많이 기록한 것은 70여개나 된다.

제신의 역사적 공헌은 절대로 말살될 수 없다. 사치황음, 반란진압, 반대파제거는 역대제왕의 공통점이다. '주왕'에 특유한 일들이 아니다.

명나라때의 소설 <봉신방>은 더더욱 주왕을 유사이래의 포악한 마왕으로 그렸다.

역사소설이 정사를 왜곡시킨 것이다. 후세인들이 자주 문학적 이미지로 역사적 이미지를 대체하는 경우가 있고, 그 뿌리는 깊고 깊다.

소설의 부정적인 영향은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