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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천광뱌오(陳光標): 후안무치한 천사

by 중은우시 2011. 5. 14.

 

: 초위(草威)   

 

 

                

 

천광뱌오가 제기된 의문에 답하는 글에서 첫부분을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전국도덕모범, 전국항진구재영웅모범, 전국오일노동장상획득자 천광뱌오이다.” 그의 말투는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이처럼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말은 혹시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해주어야 더 적합한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 얼마를 기부했는지는 매번 자신의 입으로 떠벌여서는 안되고, 공신력있는 제3자가 공표해야한다고 생갇해왔다. 결국, 내가 아직 그리 많은 자료를 보지 않고도, 이 사람의 일처리방식은 기본적으로 황당형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가 좋은 매체종사자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대부분 시끄러운 뉴스거리도 다 정리된 후에야 약간 알게 되는 정도이다. 언제부터 이런 습관이 길러졌는지는 몰라도, 뉴스를 볼 때는 그냥 스포츠면만 훍어보고, 그중에서도 점수만 살펴보게 된다. 너무 많이 보면 화가 나기 때문에,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는 보면볼수록 화가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의 성격을 통제할 수가 없어서 내 자신이 뉴스를 보는 것을 통제하게 되었다. 이번에 천광뱌오와 필자가 일하고 있는 중국경영보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나중에서야 동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약간의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 나는 이 일의 앞뒤 모든 보도를 보았다. 그후에 과감하게 화를 냈다.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위험한 주제라는 것을. 신뢰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 그것도 대선인(大善人)의 신뢰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분명히 쉽지않은 일이다. 어쨌든 대부분은 신뢰를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상당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사태의 발전도 바로 그러했다.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강렬했다. 도대체 이 매체는 어찌된 거냐. 왜 착한 일을 조금 하는데 그런 사람을 못살게 구는 거냐. 천광뱌오 본인은 선동의 고수이다. 그는 말했다: “내가 자선을 베풀 때, 너희는 뭘 했느냐?” 성공적으로 사람들 내심의 모성보호본능을 건드렸다. 만일 천광뱌오가 텔레비전에서 걸어나온다면 분명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달려가서 악수를 하러 덤빌 것이다. 그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맙다고 인사를 할 것이다.

 

중국사람들은 하나의 사건 혹은 한 사람을 대하면서 왕왕 감정이 이성보다 앞선다. 그리고 이런 판단방식을 영광으로 여긴다. 사람들을 눈물흘리게 하는 사람은 모두 분명한 착한 사람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나쁜 놈이다. 천광뱌오는 바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사랑. 모르는 사람에 대한 사랑. 이건 얼마나 숭고한가. 그리고 숭고한 사람은 반드시 성실하다. 사람은 자연적으로 이런 기부자들에 대하여 신뢰를 가지고 있다. 성실하고, 선량하고, 남을 도우는 사람을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는 하나로 묶여져 있다. 그래서 이런 상황하에서 이치를 가지고 따지는 것은 아주 어렵게 된다. 네가 그의 거짓말을 반대하면, 그건 그의 자선을 반대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대중의 감정은 일찌감치 하나로 묶여져 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나는 자선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공중의 선량과 단순을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5 2일의 <중국경영보>는 거의 4개 면을 써서 아주 재미없는 일을 했다. 사실을 진술한 것이다. , 숫자등 모두가 그다지 보고 듣고 싶어하지 않는 보도형식을 톻하여 천광뱌오의 사기기부의 진면목과 그의 앞뒤가 다른 말에 대하여 보도했다. 만일 핫이슈의 발원지라는 점을 생각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보도들 끝까지 다읽는 독자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보도를 다 읽기도 전에 칼을 꺼내들도 도와주려고 하는 자가 나타난다: “능력이 있으면 증거를 내놔라. 인신공격을 하지 말고!”

 

실제로, 진정 인신공격을 받은 것은 신문사에서 이 사실을 추적보도한 기자들이다. 그들은 인터넷상에서 온가족이 공개되고, 협박이메일과 익명전화를 받았다. 기자가 무슨 차를 타고 취재하는지, 천광뱌오는 스스로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생각해봐라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마터면 정말 그들의 인신을 공격할 뻔했다. 이들 보도를 책임진 기자들은 하나의 대단한 일을 했다. 그들중 대부분을 나는 아직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동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영광스런 일이다.

 

신문사에서 나는 천선생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나는 인격모살을 할 생각은 없다. 그의 기부동기를 의심할 생각도 없다. 그런 소문들은 증거를 내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저 재미로 들으면 된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수집가능한 사실을 얘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천선생이 얼마나 신통광대하고 불가사의한지를 말하고자 한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함께 한 것같다. 이런 기적을 창조하는 것도 아주 쉽게 이루었다.

 

첫째, 보도와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512대지진이 일어난 후 3시간만에, 그는 120명과 60대의 공정기계를 모아서, 장쑤,안휘에서 밤낮으로 가서 두장얜으로 갔다. 그들은 연해지구에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근 2000킬로미터나 달려갔다. 이 호호탕탕한 기계팀은 마치 천사의 날개와 같이 거의 군대와 동시에 재난지역에 도착한다. 이때 재난이 발생한지 36시간도 되지 않은 때였다. 군사전문가들조차도 찬탄을 금치 못한다. 기적은 이렇게 발생했다. 중대재난지역에서, 이 임시로 구성된 기계팀은 휴식도 하지 않고 각각 두장얜, 마오현, 몐양, 베이촨등지에 투입되었다. 이때의 천광뱌오는 호인만이 아니라 신이었다. 나는 이런 경우에 이게 가능한 일인가?”라고 묻는 것이 얼마나 인간성 없어보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계는 네가 좋은 일을 한다고 하여, 상식조차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단 날인가?

 

또 다른 사건은 더욱 기묘하다. 2010년까지, 천광뱌오는 대외에 기부금액총액이 이미 14억위안에 달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최대의 선의를 가지고 그의 행위를 믿는다고 치자. 그래도 한 마디 물어볼 수는 있다. 그는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가? 기자가 조사하여 아는 바에 따르면, ‘황포재생의 손익계산서를 보면 2008 2009년에 그의 회사는 각각 457만위안, 1696만위안의 적자를 나타내고 있다. 영업총수입과 주주권익을 합쳐도 그가 얘기하는 14억위안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들 숫자는 모두 그 자신이 여기저기서 떠벌리고 다닌 숫자이다. “작년에 나의 회사는 영업액이 103억위안에 달했고, 순이익이 4억여위안이다.” 만일 천선생이 거품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뛰어난 재주가 있어서, 쓰레기를 보물로 만든 것인가? 아무 것도 없는데서 돈을 만들어낸 것인가?

 

천광뱌오는 말했다. “나의 사업은 지금 계속 잘되고 있다. 내가 오랫동안 자선을 하는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 자선을 하는 것은 좋은 신뢰가 된다. 내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은 원래 사회에 보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나에게 양호한 보답을 해주었다.” 천광뱌오는 또 말한다. “나 천광뱌오가 돈을 버는 것은 사실 똥을 먹는 것보다 어렵다.” 이것은 모두 그가 한 말 그대로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랐을 뿐이다. 필요가 달랐을 뿐이다. 비록 똥먹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태의 발전은 아주 시끄러웠다. 이전의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는 태도전이다. 천광뱌오찬성파거나 반대파이다. 한마디면 된다. 그리고 각측은 숫자를 헤아린다. 얼마나 되는 사람을 모았는지를 본다. 후기가 되면, 음모론이 등장한다. “천광뱌오가 이렇게 떠들고 다닌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가 기부한 돈들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기자는 도대체 그와 뭐가 어긋났는가?” “그거 누구누구에게 밉보였는가?” 나는 누구를 지지하거나 누구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저 사실을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다. 게임이 일단 정석대로 흘러가면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펑샤오강 감독은 신문보도를 몇 개보고는 미니블로그에 몇 개의 글을 남겼다. 그 핵심의미는 다음과 같다. 일하는데 떠들고 다닌다고 뭐 어떠냐? 떠들고 다닌게 잘못인가? 좋은 일을 할 때는 떠들고 다니면 안되는가? 맞다. 떠들고 다닌게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아무도 떠들고 다닌게 문제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경영보와 남방도시보의 의문은 모두 똑 같은 기준선에 있다. 뭐가 어찌된다고 하더라도 사회공중을 속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선에서 신뢰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펑감독은 또 얘기했다. 그가 좋은 일을 했으면 그가 허풍을 떨게 놔두자고. 여기서 허풍을 떤다는 것은 아마도 장부상의 적절한 허위를 얘기하는 것같다. 그래도 펑감독은 비교적 조심성있다. 그는 예를 들어도 소심하게 들었다: “사람이 10명을 구했다고 하는데, 하나하나 헤아려보니 8명밖에 안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명도 구하지 앟은 것보다 낫지 않느냐.” 듣기에 그럴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기부하겠다고 약속하고 지키지 않고, 언행이 불일치하고, 기부금액을 과장하는 것을 모두 한 가지로 볼 수 있을까? 이런 논리는 아무런 참고가치가 없다. 그냥 쇼와 같다. 왜냐하면 그의 판단출발점은 사실이나 이성이 아니기때문이다. 심지어 감각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이다.

 

기부사기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그가 얼마를 기부하면, 공중을 속여도 된다는 면죄부를 받는단 말인가? 내 생각에 펑감독도 여기에는 답변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더 이상한 사람들도 있다. 계속하여 위선이 무치보다 더 무섭다는 가치관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왜 위선을 옹호하는가? “천광뱌오가 말한 십여억위안의 기부금이 가짜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가짜라 하더라도 다 합치면 수천만은 되지 않겠는가? 너희들처럼 1만위안도 기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 이들이 얼마나 심각한 인격분열을 겪고 있는지 보라. 이들은 아마도 영원히 격언을 암송할 줄밖에 모를 것이다.

 

우리는 공을 찰 줄 모르는 사람도 중국축구가 엉망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방 우리는 보통사람이 거액기부자의 신뢰문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내 생각에 사실과 이성의 기초위에서라면 어떤 의문도 모두 유익하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천광뱌오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 기자들이 이런 걸 조사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여기기도 하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분개하다. “너희는 관리들이 부패나 잘 조사하라.” 정말 이건 난감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우리아이가 앞으로 3년뒤면 대합입시를 치르는데, 어떻게 아이에게 체육수업을 시키느냐고 묻는다면. 이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교장이 그런 학부모에게 자질교육을 이야기 하면 백안시당할 것이다. 매체도 모든 독자의 요구사항을 맞춰줄 수 없다. 그렇다면 서로를 존중해주는 수밖에 없다. 교육에 관해서는 교장에게 맡기고, 뉴스에 관해서는 신문사에 맡겨라. 만일 처음부터 신뢰가 없다면 그 학교에 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그 신문을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현재의 중국은 천광뱌오와 같은 거짓말천사가 어느 저도 적극적인 작용을 발휘한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자선사업을 끌고 간다. 그 안의 어두운 점, 잠규칙을 문제삼지 않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힘들게 갖게 된 선심을 파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이다. 그는 총리가 접견한 사람이고, 네티즌의 환호를 받는 사람이다. 그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예를 들어 신뢰이다. 언제 어느때라도 거짓말이 습관화된 기수가 우리를 이끌고 간다면, 언젠가 사람들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은 새로 시작해야 한다. 상처를 크게 입은 사람들이 다시 선량한 마음을 재건하려면 아마도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랑하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들 머리 속에 있다. 성실함을 배우면서 천천히 가지면 된다. 그러므로 서두를 필요가 없다. 먼저 정확한 방향을 찾고, 다시 앞으로 가면 된다. 그러면 좌충우돌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사람의 성장은 매 순간으로 완성된다. 사회의 진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바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다. 우리가 모두 인류라면, 전지전능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의 입으로 말하는 정의도 다 믿을 수는 없다. 인류사회가 오늘날까지 발전해온 것은, 정의라는 것이 질서와 법칙의 배후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하는 일들이 합리적이고, 합법적이고, 질서있을 때, 신뢰와 선의가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나는 아주 비관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일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믿느다. 나는 우리의 곁에는 천사가 많다고 믿는다. 그들이 체격만 비슷한 게 아니라, 당당하게 시험도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래야 한꺼번에 날개가 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