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의 용모는 어떠했을까?

중은우시 2011. 5. 3. 20:02

 

: 예방육(倪方六)

 

무측천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것은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온 문제이다.

 

현대의 대학자 곽말약(郭沫若) 선생도 무측천의 용모에 아주 깊은 흥미를 나타냈다. 곽말약은 고증을 통하여, 장훤(張萱) <<당후행종도(唐后行從圖)>>의 풍만하게 생긴 당후(唐后)’가 바로 무측천이라고 주장했다. 장훤은 당나라때 화가로 경조(京兆, 지금의 서안)사람이며, 생몰년은 미상이며, 무측천과 겹치는 기간이 있다. 현재 <<도련도>> <<명황납량도>> <<정장도>>, <<위부인상>> <<멱국부인유춘도>> <<당후행종도>>등의 그림이 후세에 전해진다. 궁중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으므로, 장훤이 일찍이 궁중화가로 일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무측천도 보았을 것이므로, 그의 붓에 의하여 그려진 무측천의 모습은 약간의 미화를 거쳤겠지만, 비교적 실제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비교적 자주 나타나는 무측천화상(武則天畵像) <<당후행종도>>당후가 아니라. 머리에 봉관(鳳冠)을 쓴 모습이다. 이것이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무측천에 대한 인상일 것이다. 이 그림은 명나라 홍치11(1498)에 출판된 <<역대고인상찬>>에 수록되어 있다. 이 화상은 비록 가장 많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믿을만한 것은 못된다. 명나라때 사람이 재창작한 것이며 상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무측천은 적지 않은 석상(石像)을 남겼다. 가장 오래된 것은 그녀의 고향인 사천 광원(廣元)에서 발견되었다. 이 석상은 현지에서 유명한 황택사(皇澤寺)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해지기로는 이 석상이 진실한 무측천과 비교적 가깝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진실한 무측천에 가까운 석상은 모 성장의 지시로 인하여 화장을 하게 된다. 해외화교로부터 기부금을 받아서, 온 몸에 금칠을 한 것이다. 이리하여 진귀한 역사문물이 파괴되었고, 이도저도 아닌 꼴이 되어 버렸다. 무측천석상은 현재 이미 불상으로 바뀌었다.

 

불상을 얘기하자면, 무측천은 확실히 불교와 인연이 있다. 그녀가 이치(당고종)과 인연을 맺은 곳도 바로 그녀가 출가하여 비구니로 있던 때였다. 나중에 황제가 된 후에는 불교사찰을 많이 짓고, 불상을 많이 만든다. 아마도 이것은 부처에 대한 감사의 뜻일 것이다. 낙양 용문석굴에는 여러 불상이 있는데, 이것은 무측천시대에 만든 것이다. 용문석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노천 마애대감(摩崖大龕) 봉선사(奉先寺)에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를 무측천의 44세때의 모습이라고 본다.

 

봉선사는 당고종 함형3(672)에 착공하여 4년만에 완공된다. 노사나불은 동방여성의 얼굴특색을 지니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높이는 17.14미터이다.

 

<<조상명(造像銘)>>의 기록에 따르면, 봉선사를 지을 때, 당시 황후이던 무측천이 지분에 쓰는 돈 2만관을 도와주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동시에 노사나불의 개광의식(開光儀式)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노사나불과 무츠건은 일정한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노사나불을 무측천의 화신으로 보았는데 그것이 아무런 근거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이 불상은 무측천의 실제모습과 그리 차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무측천의 용모에 대하여는 문자기록도 풍부한 편이다.

 

그 중의 하나에는 무측천의 모양을 기상월언(奇相月偃, 기이한 용모로 달덩이같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측천대성황후애책문>>에 나온다. 이 책문은 현대의 추도사와 같은 것인데, 국자사업 최융이 쓴 글이다. 거기서 무측천을 지재곤덕(至哉坤德) 침잠강극(沈潛剛克) 기상월언(奇相月偃) 혜심천색(惠心泉塞)…”이라 하였다.

 

둘째는 무측천의 모양을 용정봉경(龍睛鳳頸, 용과 같은 눈동자에 봉황 같은 목덜미)”라고 한 것이다. 이는 관상대가 원천강(袁天罡)이 무씨형제자매의 관상을 볼 때 한 말이라고 한다. 출처는 두 가지 판본이 있다. 하나는 <<구당서.방기>>(권이백일)인데, 무측천이 어려서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원처강이 그 집으로 왔다. 그 모친에게 말하기를 부인의 골상을 보니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식들을 불러서 원천강으로 하여금 관상을 보게 하였다. 무원경, 무원상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 두 아들은 모두 집안을 지킬 사람들고 관직이 3품에 이르겠다라고 한다. 한국부인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 여자아이는 크게 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좋지 않다.” 유모가 무측천을 안고 나왔는데, 남자아이 옷을 입혔다. 원천강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군자의 모습으로 쉽게 알기 어렵다. 다시 보면 좋겠다그리고는 걸어보게 한다. 침상앞으로 걸어가며 여전히 눈을 들고 있는다 그러자 원천강이 놀라서 이 아이는 군자의 용정봉정을 지니고 있어, 아주 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옆으로 보고서는 다시 놀라서 말한다: ‘만일 여자아이라면 실로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나중에 반드시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비슷한 판본은 <<대당신서.기이제이십구>>에 나온다: 원천강은 익주 사람으로, 관상술에 뛰어났다. 정관초기, 칙명을 받아 경성으로 간다. 도중에 이주를 지나게 되었는데, 당시 무사확이 자사로 있었다. 그는 처 양씨의 관상을 보게 하였는데, 원천강이 말하기를 부인의 골상은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을 것입니다그리하여 아이들을 모두 불러서 관상을 보도록 했다. 원경, 원상을 보고는 말하기를 자사에까지 이르나, 마지막에는 막혀서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한국부인을 보고는 이 여인은 크게 귀하게 될 것이나, 역시 불리하다무측천은 당시에 사내아이옷을 입고 있었는데, 유모가 안고서 나왔다. 원천강은 놀라서 말하기를 이 낭군은 모습이 오묘하여 쉽게 알기가 어렵다그리고 걸오보게 한 후에 이 아이는 군자의 용정봉정을 지니고 있어, 아주 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옆으로 돌려서 보고는 만일 여자아이라면, 천자가 될 것이다

 

<<대당신서>>의 작자는 유숙(劉肅)으로 당헌종(778-820) 원화시대 사람이다. 책에는 원화 정해(丁亥)의 자서(自序)가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대당신서>>는 원화2(807)에 만들어졌다. <<구당서>>는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의 후진에서 만든 사서이다. 시간선후로 보자면, <<구당서>>에 원천강이 무측천의 관상을 봐준 것을 기록한 것은 아마도 <<대당신서>>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글자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무측천이 용정봉경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일치한다.

 

세번째는 무측천의 모양이 방액광이(方額廣, 이마가 네모나고 뺨이 넓다)”. 이 내용은 <<신당서.제제공주전>>(권구십육)에 있다. 그중 태평공주조에 이렇게 쓰여 있다: “(태평공주)는 방액광이이고 음모를 많이 꾸몄다. (무측천)은 자주 나를 닯았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앞의 두 가지보다 신뢰성이 높다. 무측천과 태평공주는 모녀간이므로 닮았을 것이다. 이것은 유전학에도 부합한다. 또한 글을 보면 태평공주의 성격도 모친과 비슷했다. 심계가 많고, 수완을 쓰기를 즐겼다.

 

기상월언은 무측천의 용모가 기이하며, 군왕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용정봉경은 무측천의 눈동자가 크고 힘있으며, 목은 가늘고 길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방액광이는 무측천의 이마가 네모나고, 뺨이 비교적 넓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세 가지 모양을 종합하면, 무측천은 현대의 계란형 미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마가 네모나고, 뺨이 크며, 모습은 단정하고 부티가 났으며, 특별한 여기에 원천강이 관상을 본 이야기를 덧붙여보면 무측천은 약간은 사내 같은 얼굴모양을 한 여인 혹은 남자 같은 기운을 풍기는 남다른 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당나라때 여인이 풍만한 것을 아름답게 보고, 양강대방(陽剛大方)한 것을 숭상하고, 날씬하고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던 심미표준과도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