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건릉(乾陵): 당고종과 무측천의 합장묘

중은우시 2009. 11. 23. 20:39

글: 손건화(孫建華)

 

세계에서 어느 황제의 묘가 가장 도굴하기 힘드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의문없이 당고종과 무측천의 "만년수역(萬年壽域)", 건릉을 가리킬 것이다. 건릉은 냉병기시대에 도검으로 파본 적이 있고, 열병기시대에는 기관총과 대포를 동원한 적도 있다. 1200여년동안, 도굴을 시도한 사람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만도 17명에 달한다.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경우는 40만명이 동원되어, 건릉이 위치한 양산(梁山)의 거의 절반을 파들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건릉은 여전히 주인 무측천과 그녀의 남편 당고종의 유체를 잘 보존하고 있다. 우리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무제의 무릉은 일찌감치 텅텅 비어버렸고, 당태종의 소릉에도 하나도 남지 않았고, 강희제는 뼈도 제대로 추리지 못하고 있는데, 왜 무측천의 건릉만이 홀로 도굴당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는가?

 

건릉은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두 황제 즉 당고종과 무측천의 합장릉이다. 또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보존이 잘되고, 문화재가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으며, 도굴을 당해본 적이 없는 제왕릉이다. 그리하여 지하에 묻혀있는 "제9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진다.

 

건릉은 함양시 건현 경내에 있는 해발 1074미터짜리 양산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서에서는 "역대 모든 황제릉중 최고"라고 일컬어진다. 건릉은 당시 서경 장안의 설계배치를 본떠서 만들었다. 내성, 궁성과 외성을 두고, 내성은 240만평방미터였고, 궁성은 둘레가 12리에 이르렀고, 외성은 둘레가 80여리에 이르렀다. 능원내에 지어진 건물만 380칸이었다.

 

사서에는 건릉의 위치를 정할 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고종이 낙양에서 병사한 후, 진자앙(陳子昻)등이 낙양에 능침을 만들자고 극력 주장한다. 그러나 무측천은 당고종의 "장안으로 돌아가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에 따라, 관중 위원고원에서 묘지를 고르기로 결정한다. 금방 조정은 전국에서 두 명의 이름난 풍수가를 고른다. 한 사람은 사천(四川)의 성상가(星相家)인 원천강(袁天)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황궁에서 음양과 천문역법을 관장하던 태사령(太史令) 이순풍(李淳風)이다.

 

원천강은 명을 받은 후 황하(黃河) 양안을 다 돌아다니지만 마음에 드는 장소를 얻지 못한다. 나중에 관중으로 와서 한 밤중에 하늘을 보니, 한 곳의 산에 자기(紫氣)가 충천한 것을 보았다. 마침 북두성과 서로 겹치는 때였다. 원천강은 그곳이 길지라고 생각해서 급히 산언덕으로 가서, 정확한 방위를 찾았다. 그러나, 표기할 것을 찾지 못하여, 동전을 묻어 놓고 흙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산을 내려왔다.

 

또 다른 풍수가인 이순풍은 명을 받은 후, 위수(渭水)의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길지를 찾았다. 하루는 정오에 한창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진천대지에 우뚝 솟아있는 기괴한 석산을 만나게 된다, 남에서 북으로 보니, 마치 한 젊은 부인이 발가벗고 한 낮에 누워있는 것같은 모습이었다. 이 젊은 부인은 오관이 단정하고, 유방이 대칭되며, 유두, 배꼽까지도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더더구나 신기한 것은, 이 젋은 부인이 다리를 약간 벌리고 있는데, 중간에 맑은 물이 하루종일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따. 이순풍은 깜짝 놀라서, 급히 산을 올라간다. 자신의 그림자로 방향을 잡아서, 돌을 깨어 팔괘진을 펼치고, 침을 빱오내서 이어상교(二魚相交)의 지점을 찾아서 흙속에 꽂은 후에 산을 내려와서 조정으로 향했다.

 

무측천이 두 사람으로부터 길지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확인하도록 시켰다. 대신이 양산에 도착한 후, 흙을 파다가 깜짝 놀라고 만다. 원래 이순풍의 침은 바로 원천강이 묻어놓은 동전의 한가운데를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풍수명당이라면 더 이상 기다릴게 무엇인가? 무측천은 바로 착공을 명한다. 건릉이 바로 완공되고, 당고종을 매장한다. 나중에 무측천도 남편을 따라 건릉에 매장된다. 건릉의 지형은 음양이의(陰陽二儀), 천지교배(天地交配)에 완전히 부합한다. 건(乾)은 하늘이요 양이며, 곤(坤)은 땅이요 음이다. 음양교합으로 만물이 생겨난다. <<장서(葬書)>>에는 "장(葬)이라는 것은 생기를 받아야 한다. 바람을 가두고 기를 으며, 물을 얻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장사는 왼쪽을 청룡, 오른쪽을 백호, 앞을 주작, 뒤를 현무라 한다."

 

건릉은 비록 천년세월을 겪었지만, 여전히 비바람에 끄덕없다. 역대 도굴자들이 모조리 건릉의 앞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심지어 건릉의 묘도문(墓道門)조차도 찾아내지를 못했다. 이를 보면 이 명당자리는 확실히 유체를 잘 보봊하는 곳이다. 그러나, 옛사람중에는 이렇게 지적한 사람도 있다. 양산의 풍수는 좋다. 그러나 음기에 이롭고 양기에 불리하다. 무측천이 이 곳을 선택하여 자신과 당고종을 매장한 능묘로 삼은 것은, 무씨의 후손이 잘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든다.

 

첫째, 건릉은 당태종의 소릉과 용맥이 단절되어 있다. 만일 일반 백성을 이곳에 매장했다면, 3대가 흥성하겠지만, 황제를 이곳에 묻는다면, 3대이후에 강산이 위험해질 것이다. 사실도 그러했다. 당나라는 당현종의 이후 쇠망의 길로 들어선다. 이때는 무측천으로부터 헤아려 3대째가 되는 때이다.

 

둘째, 당나라의 용맥(龍脈)의 머리는 구준산(九竣山)이다. 당태종은 이 곳에 묻혔다. 용머리에 위치하여 당나라황실을 흥성하게 했다. 그러나, 양산은 주(周)나라의 용맥의 꼬리에 해당한다. 꼬리는 반드시 쇠한다.

 

셋째, 양산은 북봉이 가장 높고, 앞쪽의 두 봉우리는 유방과 같다. 전체 산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젊은 부인이 누워있는 것같고,유방이 높이 솟았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음에 이로운 지형이다. 음기가 가득하고, 양에 불리하다. 그리고 양산의 주봉은 곧고 빼어나다. 목(木)격에 속한다. 남쪽의 두 봉우리는 둥글어서 금(金)격에 속한다. 세 봉우리는 비록 두드러지지만, 멀리서 보명 편평하므로 토(土)상에 속한다. 금극목(金克木), 토생금(土生金)이므로, 주봉우리 아래에 묘를 쓰면, 반드시 음기가 양기를 누른다. 무측천이 권력을 장악하고 천하를 찬탈한 것은, 그녀가 능묘를 이 곳에 선정한 것과 관련이 있다.

 

당연히 위의 추론은 사실이라고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양산의 지형으로 보면, 두 봉우리가 높이 솟고, 두 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마치 미녀가 조용하게 이 곳에 누워있는 듯하다. 양산이 음에 이롭던 양에 이롭든 확실히 보기드문 명당자리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