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예방육(倪方六)
무측천(武則天)의 이름이 무엇일까? 이렇게 물으면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기괴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무측천의 이름이야 무측천이지 뭐겠느냐는 식으로. 역사애호가들은 아마도 무측천의 이름은 무측천이 아니라 무조(武曌)라고 얘기할지 모른다. 그리고, 조금 더 파고 들어간 역사연구자라면 아마도 이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른다. <<신당서. 측천황후본기>>(권4)는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측천순성황후 무씨의 휘(諱)는 후(珝)이다”
무측천은 적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무화고(武華姑), 무미낭(武媚娘), 무후, 무조. 무측천까지 포함하면 5가지나 된다. 실제로 무측천의 칭호는 그녀가 황제로 있던 때의 연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헷갈리도록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5가지 이름 이외에 “무재인(武才人)”, “무소의(武昭儀)”, “무명공(武明空)”, “무신비(武宸妃)”등으로도 불리웠다.
“무측천”은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칭호이다. 신룡원년(705년) 무측천이 강제로 퇴위당한 후, 당중종이 그녀에게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는 존호를 올린다.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겨, “황제로 예로 하지 말라”고 하여, 시호를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한다. 당시 사람들은 “측천후(則天后)”라 불렀다. 나중에 당현종이 그녀를 “측천순성황후”로 존칭하고, 사서에서는 그녀를 “무후(武后)”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그녀를 ‘무측천’으로 부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광원도서관의 관장인 진양의 견해에 따르면, ‘개략 100년이내의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측천’이 그녀의 이름일 수는 없다.
“무조”, “무후”는 무측천이 사용했던 이름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모두 아는 일이다. 그러나, 무조이건 무후이건 모두 무측천이 원래 사용하던 진짜 이름은 아니다. 무후의 ‘후’는 욱일승천의 ‘욱(旭)’과 같은 발음이고 원래 뜻은 아름다운 옥이라는 의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무후’는 나중에 황제가 되고나서 붙인 이름이라 할 것이다.
무측천 자신이 인정한 이름은 “무조”이다. “조(曌)”는 무측천이 스스로 창제한 글자이다. “해와 달이 하늘에 떠서 천지를 비춘다”는 의미를 지녔다. 이는 무측천이 ‘무주혁명’을 실행한 것을 의미하고, 그녀가 황제에 올랐다는 것을 표시하는 특수한 기호인 것이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녀가 당태종 사후에 절에 들어가 비구니로 있었던 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무측천이 감업사에 있을 때의 법호가 ‘명공(明空)”이어서 황제가 된 후에 아예 두 글자를 붙여서 “조”자를 만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했다고 본다.
무측천에게 이렇게 알려진 것을 제외하고 다른 이름은 없을까? 진양선생은 좋은 아이디어를 주었다. 진양 선생에 따르면, 무측천의 이름에 분명히 ‘원(元)’자가 들어갈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무측천의 동부이모의 오빠들의 이름에 “원(元)”자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무측천의 부친인 무사확(武士彠)은 일찍이 산서성 문수의 고향집에서 상리씨(相里氏)를 부인으로 맞이했고, 4명의 아들을 두었다. 무사확이 장안에서 장군으로 있을 때, 그중 두 아들과 상리씨가 문수에서 차례로 병사한다. 나중에 황제 이연이 친히 중매를 서서, 무사확은 양씨(楊氏)를 후처로 맞이한다. 양씨가 바로 무측천의 생모이다. 양씨는 봉건시대에 드물게 보는 노처녀였다. 그러나 결혼후에 남편과의 사이에 딸을 셋 낳는다. 그중 차녀가 무측천이다. 무측천의 삼자매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동부이모인 두 오빠는 이름을 남겼다. 하나는 무원경(武元慶), 하나는 무원상(武元爽)이다.
무측천의 이름에 “화(華)”자도 들어갈 것이라고 본다.
무측천이 황제로 있을 때, 화원(華原), 화주(華州), 화음(華陰), 화정(華亭), 화용(華容), 강화(江華)등 “화”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모조리 고쳐졌다. 예를 들어, <<구당서.지리삼>>의 “강남도”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화용(華容), 한나라 잔릉현(潺陵縣) 땅이며, 무릉군에 속한다. 유표가 안남으로 고쳤고, 수나라때 화용으로 고친다. 수공2년 ‘화’자를 없애고, ‘용성’이라고 부른다. 신룡원년에 ‘화용’으로 복원된다.” 명된 원인은 ‘무씨의 이름을 피해서(避武氏諱)”라고 되어 있다. 신룡원년에 다시 회복되는데, 이것은 바로 이 해에 ‘오왕지변’이 발생하여 무측천이 강제로 퇴위당했고, 곧이어 죽었으며, 중종이 당나라를 복국시키고 무주왕조는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기하여 진양 선생은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무측천의 진실한 이름은 분명히 “무원화(武元華)”일 것이라고. 무조의 ‘조’는 그녀가 출가한 후의 법호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그녀의 부모가 그녀에게 붙여준 이름인 ‘화’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본다. 나중에 무측천으니 그녀의 아들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홍(弘), 현(顯), 단(旦)으로 하였는데 모두 해와 달과 관련있고, ‘화(華)’자에서 파생된 것이다. 무사확은 둘째 딸이 태어났을 때, 얼굴에 빛을 발하고, 해와 달처럼 찬란해서 ‘원화’로 이름지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런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필자도 무측천의 진짜 이름에는 최소한 ‘화’자가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름에는 약간의 의문도 있다. 왜냐하면, 무사확의 부친, 즉, 무측천의 할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무화(武華)”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손녀가 같은 이름을 쓴다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다. 다만, 무측천이 입궁하기 전까지는 이름이 없었고, 그저 아명인 ‘화고(華姑)’가 있었는데, 무측천이 황제가 된 후에 ‘화’자가 들어간 지명을 모조리 없앤 것이라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진양 선생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무화’이기 때문에, 무측천의 이름이 3글자라고 추측한 것이다. 만일 그저 ‘무화’라고만 했다면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무측천의 이름이 ‘무원화’일 것이라는 것은 그저 한 사람의 견해일 뿐이다. 무측천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이었을지를 모두 추측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역사수수께끼풀이가 될 것이다.
송경령은 생전에 ‘무측천은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고, 봉건사회의 걸출한 여정치가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남존여비의 굴레속에서, 역사는 그녀에게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 그녀가 황제로 있었던 때를 ‘암탉이 울었다(牝鷄司晨)”고 폄하하기도 했다.
심지어, 무측천의 진실한 이름마저도 기록해놓지 않았다. 이는 유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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