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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송미령(宋美齡)의 그림

by 중은우시 2009. 1. 23.

 

 

 

 

 

송미령(1897-2003)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중화민국의 전 퍼스트레이디이고, 20세기 중국정계의 풍운인물이다. 20세기에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가진 여성중 하나이며, 유명한 서화가이기도 하다. 해남 문창현 사람이며, 어려서 미국에 유학했고, 미국 웨슬리여자대학을 졸업했으며,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17년에 귀국하여 상해로 갔고, 1927년에 장개석과 결혼한다. 일찌기, 중국국민당중앙평의위원회 주석, 중국국민당중앙부녀공작위원회 지도회의지도장, 보인대학동사회 동사장 겸 명예동사장을 역임했다. 1975년 4월, 장개석이 서거한 후 미국으로 가서 은거했다. 2003년 10월 24일, 향년 106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사망한다.

 

송미령의 일생은 근현대중국역사발전과 대미관계와 깊은 관계가 있다. 동시에, 송미령은 그림의 고수였다. 다만, 정치적 명성이 너무 높아서 가리워졌을 뿐이다. 그녀는 천부적인 재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항일전쟁시기에 장대천(張大千)은 고향사람 장군(張群)의 소개로 중경으로 가서 한때 송미령의 그림스승이 된다. 송미령은 이때 배운 것이 적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장씨집안은 장대천과 송미령이 합작해서 그린 산수도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1949년 송미령이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간 후에, 송미령은 취미생활을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것은 그림그리기였다. 주로 중국화를 그렸다. 송미령은 원래 부심사(溥心畲)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했지만, 부심사는 거절했다. 부심사는 만주족 황족출신으로, 왕야(王爺)의 후예이니, 조상에 부끄러운 짓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송미령은 그 말을 듣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으며, 할 수 없이 다른 스승을 찾았다. 그리하여, 사림관저에서는 특별히 당시 대만에서 가장 유명했던 황군벽(黃君璧)과 정만청(鄭曼靑)의 두 명인을 초청한다. 황군벽은 산수화에 뛰어나고 정만청은 화조화에 뛰어났다.

 

처음에 장개석은 그녀가 그저 심심해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고집센 그녀는 그림에 더욱 빠졌고,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그림의 수준이 날로 높아졌다. 장개석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자주 부인의 그림을 외국친구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재미있는 일은, 한때는 송미령의 그림에 대하여 외부에서는 정만청이 대신 그린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을 바꾸기 위하여, 송미령은 대만의 유명한 화가를 불러서 사림관저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그리고 정만청은 모두 그림을 그리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송미령은 담담하게 그림을 그렸다. 이때부터 아무도 송미령이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장대천이 대만으로 온 후에, 장군은 장대천에게 송미령을 마지막 제자로 받을 것을 권한다. 만년에 송미령은 자주 그녀의 거처에서 개인화전을 열고, 장대천, 정만청, 황군벽등의 저명한 화가를 사림관저로 불러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평을 해달라고 하였다. 식탁에서는 화가들의 고담준론이 오갔고, 식후에는 함께 그림을 그렸다. 1975년 미국으로 가서 은거한 후에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회화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수시로 작품을 꺼내서 감상하곤 했다. 송미령이 죽은 후, 향항문화교류중심이 "세기의 사람 - 장부인 송미령 여사평생회고전"을 개최했는데, 아주 성황을 이루었고, 출판된 <<송미령화전>>은 국내외의 독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송미령은 산수와 화훼에 능했다. 특히 산수화를 가장 좋아했다. 그녀의 산수는 초기에는 역대의 명작을 임모하는 것이었고, 대만에 도착한 후에는 그녀가 자주 고궁박물원으로 가서 고대의 명화를 빌려 임모했다. 송미령의 회화는 배치, 색깔사용, 의경(意境)을 중시하였다. 송미령의 회화예술에 대하여 스승인 황군벽은 송미령의 회화작품은 호매하면서도 개성이 있다고 칭찬했다. 일반규수와 같이 유약하지 않았고, 그녀는 솔잎과 흐르는 물을 가장 잘 그렸다고 한다. 1970년대이후 대만의 우정총국은 3차에 걸쳐 송미령의 산수작품을 우표로 만들었다. 각각 1975년, 1977년, 1987년이다. 매번 4매를 1조로 하였다. 그중 <<쌍송도>>우표는 1975년 대만섬의 <<우표선미>>에서 최우수우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의 회화예술의 수준을 이로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감인 것은 이 3조의 우표는 <<송미령산수화>>로 명명되지 않았고, <<장부인산수화>>로 명명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시장에서 송미령의 작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의 작품중에서 바깥으로 흘러나간 것이 아주 적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에 시장에서는 거의 그녀의 그림을 볼 수가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선 후, 중국서화붐과 가격의 상승으로, 시장에서 우연히 송미령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2004년, 북경한해에서는 송미령의 2개의 <<산수>>를 내놓았다. 크기는 아주 작았고, 그림의 수준도 보통이었는데, 낙찰가격은 6.6만위안과 1.98만위안에 달했다. 2005년 광동 보리경매에서 송미령이 1934년에 그린 <<홍매도>>가 나왔다. 크기는 2평방척이 안되었는데, 5.72만위안에 팔렸다; 같은 해, <<비파>>는 상해보리에서 4.4만위안을 받았다. 2008년 홍콩부득경매회에서는 송미령이 스승 황군벽에게 준 <<화람>>이 나왔다. 평가금액은 2.6-4.4만위안이었는데, 낙찰가격은 마지막에 20.47만위안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