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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과 강청의 결혼을 반대한 3명의 혁명가

by 중은우시 2011. 1. 26.

글: 김산(金汕)

 

모택동과 강청의 혼인에 관해서는 전설이 많다. 예를 들어, 일부 원로급 당내 중요인물들은 이 결혼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심지어 분개했다고도 하고, 당중앙에서는 집단결의를 통하여 '약법삼장'으로 강청의 정치참여를 제한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약법삼장'의 문건은 찾아볼 수 없으니, 정사(正史)에 넣기는 부족하다. 원로급 공상당원들이 이 혼인을 반대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견이나 불안을 느껴서 논의한 정도라면 조직의 결정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원인은 바로 모택동이 당시에 이미 당내에서 숭고한 지위를 확립하였기 때문이다(비록 장문천이 당시의 중공중앙총책임자였지만, 모택동의 권력은 그보다 훨씬 컸다). 원로급 혁명가들이 강청을 싫어하더라도, '중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얼굴을 봐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연안은 자유연애를 주창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더라도 문자로서 모택동의 자유연애를 구속하기는 힘들었다.

 

서면으로 된 문자나 정식으로 건의를 제출한 것은 반대의견을 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진정 이렇게 한 사람은 3명이다: 장문천, 항영, 왕세영.

 

장문천은 당시 당의 총책임자(총서기라고 부를 수 있음)를 맡고 있었다. 준의회의 이후 3년여동안 '낙모합작(洛毛合作, 장문천의 필명이 洛甫이므로 장문천-모택동합작을 말한다)'의 영도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홍색교수'로 불리는 학자형의 인물이고, 이론연구에 몰두했지, 구체적인 업무에는 능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찌기 세번이나 자리를 양보한 적이 있다. 그러니, 그의 인품, 경력은 더 말할 것도 없을 정도이다.

 

항영은 당과 홍군의 초기 지도자중 한 명이다. 신사군의 창립자이며 주요지도자의 하나로 항일명장이다. 일찌기 중공중앙 정치국상임위원, 신사군 부군장 겸 정치위원, 중공중앙 동남국서기등의 주요직무를 맡았었다.

 

왕세영은 비록 유명세가 지위는 위의 두 혁명가에 미치지 못하지만, 역시 1925년 2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원로이다. 그는 광주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으로 임표와 동기이다. 그는 1931년 10월 상해로 사서, 특파원의 신분으로 비밀공작을 수행한다. 국민당 중앙기관내에서 당원을 발전시키고, 대량의 중요첩보를 취득했다. 동시에 강청의 내력도 잘 알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중공산서성 서시 겸 산서성 성장등의 직위를 지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강청의 상해에서의 생활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상해에서 지하공작을 책임지고 있던 왕세영이다. 그는 강청이 상해에서 행한 여러가지 떳떳하지 못한 일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애사실이 이 혼인을 반대하는 주요원인은 아니었다. 강청이 상해에서 진보진영의 일을 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는데, 감옥에서의 태도가 아주 좋지 못했다. 왕세영은 그녀를 구하는 일을 했는데, 강청은 조직에서 도와주어 감옥에서 나온 후에, 조직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두각을 나타내기 위하여, 1936년 장개석의 50세 생일연회에 참가하여 공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왕세영은 모주석이 이런 여자와 결혼하려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의 사업에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모주석이 강청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당중앙과 모주석에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행각했다. 그리하여 일부 동지를 구해서 반대서명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서신은 그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이 혼인을 반대한 사람에 장문천도 있다. 그는 원래 혼인과 같은 사사로운 일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악영향이 너무 컸다. 모두가 강청은 과거가 불투명하여 당의 최고지도자의 곁에 두면 혁명사업에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앙의 몇몇 지도자급 인물들이 장문천에 이런 의견을 전달했다. 장문천은 '여러분의 의견이 확실이 이치에 맞는다. 당의 지도자의 혼인은 아무렇게나 봐넘겨서는 안된다." 장문천은 재삼 생각한 후에 친필서신을 쓴다. 서신은 비교적 완곡하게 썼고, 경호원을 통하여 전달하게 하였다. 나중에 장문천이 부인 유영이 <<유영자술>>에 쓴 바에 따르면, 모택동은 서신을 본 후에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내일 결혼할 거다.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다음날 공소사에 두 테이블의 술자리를 만들어서 결혼하는데, 장문천은 초대받지 못한다.

 

항영의 방식은 더욱 직접적이었다. 그는 내부상황을 잘 아는 양범(揚帆)과 얘기해본다. 주로 강청의 상해에서의 일부 사실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양범은 사실대로 대답한다. 항영은 이를 듣고는 말한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윤지(모택동)이 손해를 보겠다" 항영은 너무 거침이 없었다. 그는 중앙에 전보를 보내어 "이 여자는 주석과 결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라고 쓴다. 나중에 항영은 모주석과 강청이 결합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모택동에게 전보를 보낸다: "만일 국민당 인사들이 이 일에 대하여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러자 모택동은 전보로 이렇게 회신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도 좋다. 이것은 개인의 사생활문제이다. 그다지 크게 떠들 일이 아니다."

 

이후의 사실은 즘명한다. 이 세 명의 원로 혁명가들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그러나 그들 세 사람은 모두 큰 댓가를 치른다. 일찌기 당의 총서기를 맡았던 장문천은 신중국성립후에 겨우 주소련대사를 맡는다. 나중에 여러번의 정치운동때마다 시달리다가 문혁때 연금된 상태에서 사망한다. 왕세영도 관운이 좋지 못했다. 그의 지위나 경력에 걸맞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문혁후에는 아예 죽임을 당한다. 항영은 당을 위하여 희생하였지만, 사후에 우경투항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다. 문혁기간동안 강청은 그를 '반도'라고 욕하여, 죽은 후에도 그냥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