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명(張鳴)
충언역이(忠言逆耳)라는 성어는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댓구이다: 충언역이이어행, 양약고구익어병(忠言逆耳利於行, 良藥苦口益於病). 댓구가 정교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세상사람들이 처세하는데 잠언으로 삼을 만하다. 단지, 역이의 충언과 고구의 양약은 사실 경우가 다르다. 약이 아무리 쓰다고 하더라도, 병이 있기 때문에, 일부 병원에 가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먹게 되는 것이다. 먹을 때 이마를 찌푸리거나 코를 붙잡는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귀에 거슬리는 충언은 꼭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실의에 빠져 있거나 운이 좋지 않을 때는 그가 듣기 거북한 충고라고 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이 관계만 가깝다면 아마도 그냥 듣고 넘길 것이다. 그러나, 잘나갈 때, 특히 대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을 때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귀에 거슬리는 충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도 충언을 하는 사람이 자신을 시기하거나 질투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원세개가 황제를 칭한 것은 그의 일생에서 최대의 실패작이다. 그가 홍헌황제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원세개는 그렇게 빨리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떠나는 가운데 병으로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말하기 쉽지 않다. 원세개가 이렇게 한 것은 단순히 황제가 되고 싶다는 허영때문만은 아니었다. 황제제도는 확실히 당시의 현실적인 필요가 있었고, 권위를 새로 세워야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당시의 중국에서 황제는 총통보다 더욱 권위가 있어 보인다고 할 수 있으니까. 일본인들이 ‘21조”를 체결하도록 핍박하고, 국내 각지의 군대와 장군들은 갈수록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상황하에서, 권위를 재수립하는 것은 아주 시급했다. 당연히 황제에 오른 후, 권위가 세워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신속히 추락하였으며, 복벽의 죄명을 뒤집어쓴 황제가 되었고, 다시 총통으로 되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원세개가 황제를 칭한 것은 전체 과정을 보면 아주 조심스러웠다.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그러나, 자신의 속셈을 일단 간파당한 후에는 아부하는 자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귀에 들리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그의 뜻에 따르는 것뿐이었다. 원세개가 나중에 탄식을 하면서 ‘지금 반대하는 자들은 예전에 모두 옹호하는 자들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홍헌황제의 황제놀이가 한창일 때는 전국각지에서 옹호하는 소리밖에 없었다. 심지어 나중에 반기를 들게 되는 운남에서도 옹호하는 전보를 보내었다. 거의 전국이 일치하여 원세개를 화로 위로 밀어올려서, 그대로 구워버린 꼴이다.
거국적으로 일치하여 옹호하는 가운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의를 제기한 자들은 바로 원세개의 몇몇 옛친구들이었다. 한 사람은 단기서이고, 한 사람은 서세창이었다. 원세개의 황제등극에 대하여 이 두 사람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하게 저지하지는 않았고, 그저 소극적인 행동으로 그들의 불만을 표현했을 뿐이다. 또 한 사람은 원세개의 고향친구로 당시 실업계에서 활약하던 왕석동(王錫彤)이다. 그도 맞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바로 만나서 우려를 전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두 명의 원세개의 옛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황제놀이가 한창일 때, 직접 원세개를 만나서, 그들이 생각을 전달한다. 원세개에게 황제에 오르지 말라고 권한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은 한 명은 장건으로 한때 원세개의 기요비서를 지냈고 당시 정사당의 기요국 국장으로 있으면서 원세개의 막료중에서 비교적 서열이 앞선 심복이었다. 다른 한 명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름은 엄수(嚴修)인데, 청나라말기에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무술변법때는 귀주학정을 지냈고, 변법을 지지하다가 관직을 잃는다. 조정의 신정기간동안 다시 학부시랑으로 기용되어, 청나라말기에 과거를 폐지한 중견인물중 하나이다. 서태후가 죽은 후, 섭정왕이 정권을 장악하고, 원세개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때, 조정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섭정왕이 원래는 원세개를 죽여서 광서제의 복수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원세개가 떠날 때 그를 전송한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엄수는 갔다. 원세개를 전송해주었을 뿐아니라, 다음 날 상소를 올려서, 조정이 이렇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하며,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한다. 그 결과 조정은 명을 거두지 않았을 뿐아니라, 엄수의 관모까지 벗겨버린다.
이처럼 죽기를 각오했던 지기를 평생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까? 원세개가 다시 기용되자, 엄수에게 보답할 방법을 계속 궁리했다. 그러나, 엄수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에 들어가서 관직을 얻지도 않았고, 그냥 민간의 신분을 유지하며, 교육사업에 종사한다. 이런 오랜 친구지만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북경으로 가서 진언을 한다. 이치대로라면 웒세개가 그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듣지 않는다. 왕석동이 나중에 황제를 칭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직접 권하기 힘들어 엄수를 만나서 얘기한다. 그러나, 엄수는 이미 얘기해봤지만, 듣지를 않는다고 얘기한다. 원세개는 그저 공식적인 말만 하고 주안회(籌安會)에 가서 얘기해보라고 하는데, 주안회가 어디 그런 말을 할 곳이던가.
이렇게 하여 황제에 오른다. 그후 채악이 반기를 들고, 각지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원세개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병석에 눕는다. 그제서야 원세개는 탄식을 한다. 장건과 엄수 두 사람은 명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진정한 국사(國士)들이다. 이러한 국사들의 황제에 오르지 말라고 권하는 것을 듣지 않고, 명리를 추구하는 무리들에 의하여 일을 망치게 되었으니,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생쌀이 익어서 밥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후세인들이 홍헌황제를 평가할 때, 원세개의 장남인 원극정이 순천시보를 사사로이 인쇄한 일을 들먹이곤 한다. 사실 원세개가 알려고만 했으면, 진실한 소식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권력을 잡게 되면, 주위에는 고분고분 따르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진다. 귀에 거슬리는 충언은 자연히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원세개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다른 사람은 용인하는 도량은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수와 같이 옛날에 잘 안다는 것을 가지고 반대의견을 제기했다가는 아마도 목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속담에 형세는 사람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사실 지위가 사람보다 강하다. 엉덩이로 깔고 앉은 의자가 왕왕 의자위에 앉은 사람의 머리를 결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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