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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의 후계자는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09. 12. 22.

글: 김만루(金滿樓)

 

1916년 6월 6일 새벽 6시, 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해있던 원세개가 여러가지 스트레스 속에서 조금은 쓸쓸하게, 조금은 불만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겨우 57세때의 일이다.

 

옛말에 틀린 것이 없다. "만반개시명, 반점불유인(萬般皆是命, 半點不由人, 모든 것은 운명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게 없다)" 원세개가 죽지 않고 버텼더라면, 재기를 하거나, 중국역사를 다시 쓸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신체는 혁명의 밑천이다" 건강한 신체가 없다면 모든 것은 0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일대효웅 원세개는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원세개의 죽음은 가장 절박한 문제를 촉발시켰다. 그것은 바로 누가 원세개 대총통의 빈 자리를 메운단 말인가?

 

호국전쟁이 발발한 후, 원세개는 이미 퇴위를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중화민국의 대총통이었따. 만일 1915년의 <<총통선거법>>에 따른다면, 후임 총통은 전임 총통이 추천하며, 추천명단은 "가화금간(嘉禾金簡)"에 쓰고, 그 가화금간은 "금궤석실(金櫃石室)"에 보관한다. 전임 총통이 죽은 후에야 열어볼 수 있다.

 

도대체 "금궤석실"과 "가화금간"이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다: 원세개가 죽은 날, 단기서(段琪瑞), 여원홍(黎元洪), 서세창(徐世昌) 및 몇몇 정부요인들이 함께 "금궤석실"을 열어서, 원세개가 도대체 어떻게 안배해놓았는지 보려고 했다.

 

소위 "금궤석실"은 사실 청나라의 옹정황제의 비밀건저제도(秘密建儲制度)를 모방한 것이다. 단지 청나라의 건저밀조는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아래에 놓아두었는데, "금궤석실"은 중남해 만자랑(卍字廊) 내에 설치했다. 단기서등 일행은 금궤를 열었고, 그 안에는 황금색 천에 쌓인 것이 있었다. 그 안에는 금박을 입힌 종이가 있었는데, 종이의 길이는 1척가량이고, 위와 아래에는 각각 "조민탁명(兆民托命)"과 "민국만년(民國萬年)"이라는 큰 글자가 쓰여 있고, 중간에는 몇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모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위에는 "여원홍, 서세창, 단기서"라는 세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 명단은 원세개가 처음에 쓴 것이 아니라고 한다. 호국전쟁이 발발한 후 국면이 바뀜에 따라 고친 것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에 따르면, 원세개가 처음에 쓴 이름은 그의 장남인 원극정(袁克定)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호국군이 계속 밀고 들어오고 그의 부하 장수들이 그의 명을 잘 따르지 않자, 원세개는 원씨집안이 천하를 다스릴 운명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원극정 몰래 "가화금간"의 이름은 "여원홍, 서세창, 단기서"의 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다.

 

"금궤석실"에 대하여, 당사자들은 대부분 입을 닫고 말하지 않으려 했다. 정말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 여원홍은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물을 때마다, 그저 웃기만 하고 답을 하지 않았다. 소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내버려둬도 된다. 그러나 대총통을 정하는 것은 화급한 일이고, 반드시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중국의 전통에 따르면, "나라에는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는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후속일들은 추진할 수 없을 뿐아니라, 국가마저도 사분오열의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건 장난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원세개의 지위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가? 이것을 얘기하자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하고, 결정하기 쉽지 않다. 만일 실력, 영향력으로 따진다면, 당시의 국무총리인 단기서가 당연히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자격과 명망으로 따진다면, 청나라의 내각협리대신(내각부총리에 상당함)까지 지낸 서세창이 가장 높다. 사실상 서세창은 원세개와 오랫동안 교분이 있었을 뿐아니라, 계속하여 원세개의 오른팔 왼팔이었다. 원세개 그룹내의 제2인자라고 할 수 있다. 원세개가 은퇴한 기간동안, 북양계는 주로 그가 돌보았다.

 

다만, 북양계 이외의 한 중요한 인물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무창의거의 혁명공신 여원홍이다. 여원홍은 비록 실력이나 자격이야 모자라지만, 그는 법통이나 명분상으로는 독보적이다. 그가 총통을 이어받는 것이 가장 순리에 맞는다.

 

이를 보면, "가화금간"에 "여원홍, 서세창, 단기서"의 세 사람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고, 이 세 사람의 실력과 명망이 그럴만한 것이다.

 

만일, "가화금간"의 소문이 진짜라면, 위의 세 후보자중에서 도대체 누가 맡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도 처리하기 쉽지가 않다.

 

만일 원세개가 아직 살아있다면, 아마도 그는 서세창이 물려받기를 바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세창은 원세개의 오래된 친구이고, 한림 출신이며, 경륜이 많고, 정치에 오래 몸담았으므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단기서는 비록 오랫동안 그의 부하였지만, 어쨌든 무인출신이고, 정치적인 입장이 원세개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두 사람과 비교하자면, 여원홍은 확실히 좀 뒤떨어진다.

 

다만, 중국인의 전통은 "명분"을 가장 많이 따지는데 있다. 소위 "명분이 없으면 말이 순리에 맞지 않고,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원홍은 바로 여기에서 장점이 있다. 그것은 서세창이나 단기서가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역사의 발전은 왕왕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정말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서세창은 비록 북양의 원로이지만, 글을 많이 읽어 여러해동안 유가전통에 깊이 물들어 있다. 그는 확실히 명분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한동안의 침묵끝에, "수정호리(水晶狐狸)"라는 별명을 가진 서세창이 교착상태를 타개한다. 그는 먼저 자신은 총통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이 경쟁에서 빠져버린다. 서세창은 마음 속으로 분명히 알았다. 비록 자신이 북양집단에서 명망이 가장 높지만, 수중에 병졸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아서, 대총통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북양의 장군들과 지방실력자들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멀리까지는 볼 것도 없고, 현임 내각총리 단기서만 해도 만만치 않지 않은가?

 

이때의 단기서는 머리 속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눈앞에 놓고 주는대로 받아가질 것인가 아니면 한두번 양보할 것인가? 이것은 잃어서는 안되는 기회이고,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정말 선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일 실력으로 보면, 단기서는 총통의 자리에 오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현재 여원홍은 부총통이고, 자신은 내각총리이다. 명분에 맞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강제로 총통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남방의 호국군들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북양내부에서도 말들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남경에 있는 풍국장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서세창의 뜻은 단기서가 총통을 맡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단기서는 북양사람으로 자기 사람이지만, 전체 국면을 고려한다면, 여원홍이 대총통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여원홍의 부총통의 명의로 총통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가장 명분에 맞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방의 호국군과 혁명당을 끌어안는데도 유리하다. 국가가 분열에 빠지지 않을 수 있어, 일거양득의 방법이었다.

 

서세창의 의견에 대하여, 단기서는 처음에는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한동안 생각해본 후, 서세창의 말이 맞다고 느끼게 된다. 원세개가 금방 죽었고, 국가도 분쟁에 휩싸여있는데, 여기에 명분싸움까지 벌어지다면, 총통의 자리가 안정되지 않을 뿐아니라, 현재의 내닥총리도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럴 바에야 자연스럽게 명분보다 실질을 택하여, 실력이 없는 여원홍을 명목상의 대총통에 앉히고, 실권은 자신이 장악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은 명성까지도 좋게 얻을 수 있으니, 굳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단기서가 생각을 바꾸게 되니 일처리가 쉬워진다. 원래, 여원홍은 총통자리를 물려받는 문제에 대하여 발언권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북경에 온 후에 기본적으로 원세개에게 연금되어 있었다. 아무런 병권이 없을 뿐아니라, 자신의 계파조차 없다. 무엇을 가지고 북양계와 싸우겠는가? 만일 자신이 정말 대총통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면, 그것은 실로 요행이고, 북양계가 자신의 체면을 봐주는 것이다.

 

여원홍의 걱정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따. 당시의 북경은 북양계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실권은 단기서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만일 그가 정말 자신과 싸우려고 마음먹는다면, 대총통은 아예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여원홍은 계속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으려 한다. 단기서가 북경의 질서를 유지하겠다고 보증하고, 북양계의 사나운 장군들도 제어하겠다고 하고나서야 비로소 여원홍은 대총통에 오르는 것을 승락한다.

 

당시의 북양계는 이미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기서와 서세창이 여원홍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물러받게 하기로 했다는 것을 듣고, 모두 불쾌해 했다. 여원홍은 어쨌든 북양계가 아니지 않은가? 불확실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원세개의 유골이 마르기도 전에 단기서를 따르면 북양계의 문무관료들은 국무원에 모여서, 단기서가 옛날 송태조 조광윤의 황포가신을 본받아 대총통의 자리에 올라야한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단기서는 분명히 거절하고, 서세창을 불러서 설명을 하도록 한다. 그제서야 이들이 설득되었다고 한다.

 

1916년 6월 6일 오후, 단기서는 국무원에서 여원홍이 대총통을 승계하는 통전에 서명한다. 다음 날 오전 10시, 동창후통의 저택에서 여원은 부총통에서 중화민국 제2대 대총통에 오른다. 그날의 취임식은 아주 쓸쓸했다. 그저 단기서와 소수의 내각 구성원만이 참가했다. 신임대총통 여원홍은 군복을 입고, 몇몇 막료와 의전관이 모시고 취임식장에 들어선다. 그리고 간단한 연설을 하고 취임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원세개는 일찌기 여원홍이라는 사돈(여원홍의 딸이 원세개의 아들에게 시집간다)에게 농담처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오늘의 나는 장래의 너를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재주있다고 칭송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의 복만 못하다." 원세개의 이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보살'이라는 별명을 지닌 여원홍은 확실히 운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