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1915년 12월, 원세개는 돌연 중화제국의 건립을 선포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하고, 총통부를 신화궁(新華宮)으로 개칭했다.
원세개의 사인에 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비교적 권위있는 주장은 홧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전국정협문사및학습위원회가 출판한 <<문사자료선집>> 제74기에 원세개의 딸 원정설의 글 <<나의 아버지 원세개>>를 실었다. 거기에는 부친이 죽은 진정한 원인을 적어놓았는데, “안과 밖에서 공격을 받아 홧병이 들어 죽었다.”
그렇다면, 누가 원세개에게 홧병이 들게 하였는가? 도국은(陶菊隱)은 <<북양군벌통치시기사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세개는 마지막으로 이진탕(二陳湯)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이 세 사람이 그에게 독립을 선언한 것은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홧병이 나서 죽었다.”
“이진탕”는 세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진수번(陳樹藩), 진환(陳宦) 및 탕향명(湯薌銘)이다. 그들은 원래 원세개의 심복이었고, 원세개가 ‘금란전’에서 황제에 오르도록 기획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중에 전국인민의 성토 속에 원세개는 곤경에 처한다. 그들은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보고는 반원세개로 돌아선다. 각각 안휘, 사천, 호남에서 독립을 선포한다. 이 거동은 원세개로 하여금 심복들까지 마음을 돌렸다고 느끼게 만들고,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후 얼마지나지 않아 황천길을 간다. ‘이진탕’은 원세개를 죽음으로 몰고간 탕약이었다.
진환은 원세개가 서남지역에서 믿는 장군이었을 뿐아니라, 원세개의 장남인 원극정의 결의형제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감정이 돈독했다. 원세개가 진환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사천으로 보낼 때, 진환은 원세개를 향하여 황제를 대하는 예절인 삼궤구고의 예를 행했었따. 그리고 원세개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등극하여 황제가 될 때, 신은 멀리 사천에 있어 아마도 참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예를 드립니다.” 그리고는 다시 라마들이 활불을 만날 때의 최고의 예를 행하여 항성의 발에 세번 코를 가져다 대고는 물러났다.
당시 원세개는 진환을 아주 좋아했다. 진환은 심복일 뿐아니라, 황제제도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였다. 진환이 성도에 있으면 서남은 걱정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원세개는 진환이 사천에서 독립했다는 전보를 받고는 반나절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원세개는 이에 대하여는 아무런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진환의 배반은 그에게 홧병을 가져다 준다. 원세개의 황제등극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이는 진환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기를 거꾸로 든 것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
장태염(章太炎)은 진환을 처음 만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제일인물, 중국제일인물이다. 나중에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이 자일 것이다.” 다음 날 이 말을 북경에 널리 퍼진다. 처음에 사람들은 장태염이 너무 편집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장태염이 혜안을 가졌음을 알았다. 재미있는 것은 장태염이 죽은 후, 진환은 자주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장태염이 죽으니, 세상에 나 진환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태염은 정말로 나를 알았고, 나도 정말로 태염을 알았다. 육건장은 태염의 글 한편은 10만군마에 필적할만하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태염의 한 마디 말이 천하의 안위를 결정지을만하다.”
진환이 원세개를 배반한 1주일후인 5월 29일, 원세개가 믿던 호남장군 탕향명이 호남독립과 반원세개를 선언한다. 당초 탕향명은 황제제도를 고취하는데 가장 열심인 지방관료였다. 그는 호남에서 문인재자를 한무더기 끌어모아, 그들을 호화로운 곳에 연금하고, 그 안에는 좋은 술, 좋은 담배, 그리고 기녀를 넣어준다. 이들로 하여금 호남인민들이 원대총통을 황제로 옹립한다는
진환과 탕향명이 연이어 독립과 반원세개를 선언하는 동안에, 원세개에 충성을 다하던 섬남진녕사 진수번도 공공연히 원세개가 임명한 관리를 쫓아내고, 5월 26일 섬서독립과 반원세개를 선언한다.
원세개가 죽은 후, 북경의 한 중약점포에는 이런 대련이 걸렸다.
기병육군자(起病六君子)
송명이진탕(送命二陳湯)
‘육군자’ ‘이진탕’은 모두 중약의 두 탕약의 명칭이다. 대련의 작자는 이를 교묘하게 대련에 넣어, 원세개를 풍자한 것이다. 원세개가 신해혁명의 과실을 빼앗은 후, 황제가 될 꿈을 꾸었다. 1915년, 양도(楊度)가 나서서, 손육균, 엄복, 유사배, 이섭화, 호영과 함께 ‘주안회(籌安會)’를 만들어 나라의 평안을 도모한다고 하면서, 원세개를 황제에 앉히는 작업을 수행한다. 세상에서는 이들 여섯명을 ‘육군자’라고 불렀다. 위의 ‘육군자’로 병이 생겼다는 것은 이를 뜻하는 것이다.
‘이진탕’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수번, 진환, 탕향명을 가리킨다.
이 대련은 교묘하게 중약의 탕약명칭을 넣어서 10개의 글자 속에 원세개가 병을 얻어 죽기까지를 절묘하게 풍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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