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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는 요독증으로 사망했는가?

by 중은우시 2009. 8. 25.

글: 김만루(金滿樓)

 

원세개의 옛 부하들이 속속 반기를 들 때, 집안 사람들마저 그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았다. 홍헌왕조가 문을 연지 이틀도 되지 않아서, 원세개의 동생인 원세동(袁世), 여동생인 원서정(袁書貞)은 신문에 성명을 실어, 황상 원세개와 형제자매관계를 끊는다고 선언해서, 원세개로 하여금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원세동은 원세개의 여섯째 동생이다. 그는 비록 고향에서 집안 일만 처리했고, 한번도 관직에 나간 적은 없지만, 이 동생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수시로 서신을 형인 원세개에게 보내어 이것은 잘못되었고, 저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형이 황제가 되겠다고 하자, 원세동은 기뻐하지 않을 뿐아니라, 도리어 원세개를 "청나라황실의 역신이요 원씨집안의 불효자손"이라고 욕을 해댔다. 그리고 원세동은 집안에서 20여명규모의 "토원군(討袁軍)"을 조직하고, 근왕(勤王)을 한다고 했다. 청나라황실을 위하여 원세개라는 역신을 토벌하겠다는 것이다. 황상 원세개는 이 소식을 듣고 그가 더 이상 소란을 부리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지방경찰국에 명령을 내려 그들을 진압해버렸다.

 

원서정은 일찌감치 전 산동순무 장여매(張如梅)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원래 원세개와는 관계가 아주 좋은 편이었다. 두 집안 사람들은 명절때면 서로 오가곤 했고, 서신도 자주 왕래했으며, 서로 음식을 보내는 일도 잦았다. 이번에 원세개가 복벽하여 황제에 오르겠다고 하자, 원서정은 오빠에게 서신을 보낸다: "원씨와 장씨의 두 집안은 대대로 청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오빠가 청나라를 대신하여 민국의 총통이 된 것은 그래도 민주라고 할 수가 있다. 지금 다시 황제를 칭하겠다고 하니, 나중에 지하에 가서 융유태후의 얼굴을 어찌 볼 것인가? 민의를 들먹이고 있지만, 여동생인 내가 보기에는 사실 바로 반란일 뿐이다"

 

원세개의 집안에서도 편안한 나날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짜 <<순천시보>>사건이 드러난 후, 태자 원극정은 부친이 더 이상 자신을 신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는 '현무문사변'과 같은 것을 일으키려고 계획했다. 그의 둘째 동생과 여섯째 동생을 일거에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신화궁의 첩들도 매일 '비(妃)'에 봉하느니 '빈(嬪)'에 봉하느니 하면서 싸움이 그치질 않았다. 그리하여 원세개의 화를 있는대로 돋구었다(알려진 바로는, 후궁들을 처음에는 이렇게 하려고 했다고 한다. 정실부인 우부인이 황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첩들중에서는 아들이 있으면 '비'에 봉하고, 아들이 없으면 '빈'으로 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원세개를 모신지 오래 되었지만 아들이 없는 첩들이 난리를 치게 된 것이다)

 

퇴위를 선포하기 전에, 원세개는 먼저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생각을 옛친구 서세창(徐世昌)과 단기서(段琪瑞)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서세창이 국무경을, 단기서가 육참총장을 맡아서 자신의 곤경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원세개는 자신이 황제제도를 포기하고, 옛친구들을 불러내서 국면을 유지하면,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남각성은 전혀 굽히지 않고, 원세개가 즉시 하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청나라말기의 "원세개가 아니면 안된다"에서 이제는 "원세개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로 바뀌는데 겨우 몇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천양지차의 분위기였다. 초대 내각총리이면서, 조선에 있을 때부터 원세개의 부하였던 당소의(唐紹儀)는 전보를 보내어 원세개를 비난했다: "황제제도를 폐지하면서, 총통의 자리에 여전히 머무르겠다고 하는 것은 원세개 자신의 뜻이다. 이런 방식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천하인들이 보고 있고, 모두 염치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과 외국의 역사에도 없던 일이다." 오랫동안 해외망명생활을 한 강유위는 원세개에게 "빨리 가족을 데리고 해외에 나가서 놀아라"고 권하였다. 만일 "하루라도 일찍 떠나면, 백성들이 하루라도 더 편안하게 지낸다"고도 하였다: 채악, 당계요, 양계초등은 속속 원세개가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고, 항의의 목소리를 계속 이어지고 쉴 틈도 없었다. 원세개가 총통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전국에서는 계속하여 퇴진권고, 퇴진요구, 퇴진압박, 퇴진청원등을 요구하는 서신과 전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쌓이게 될 것이다. 이는 원래 황제로 옹립할 때의 규모보다 몇 배나 많았다.

 

황제파로 목소리 높이던 무슨 "육군자" 무슨 "십삼태보"는 대부분 무대에 올라가지도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사라질 자는 사라지고, 도망칠 자는 도망을 쳤다. 아직 떠나지 않은 자들도 일찌감치 아뭇소리도 못했다. 그저 원세개만 외롭게 남아있었다. 병든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원래 자신의 자격으로 충분히 국면을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서세창도 다급해졌다. 결국 그도 어려움을 알고 물러났다. 관직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4월 22일, 단기서는 서세창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가 된다. 정무당을 취소하고 원래의 국무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신내각을 조직하였다. 단기서가 대권을 장악한 후의 상황은 예전에 원세개가 청나라황제를 몰아낼 때와 비슷했다. 그저 당시의 원세개가 지금은 단기서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단기서가 자신의 심복인 서수쟁(徐樹錚)을 국무원비서장으로 앉히려 할 때, 원세개는 "총리가 군인이므로 비서장을 다시 군인이 맡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나중에 단기서는 벌컥 화를 내며, 담뱃대로 탁자를 치면서, "오늘날까지도 아직 이러느냐"고 하였다.

 

또 다른 원세개의 고굉 간장(干將)인 풍국장(馮國璋)도 이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당시 청나라황제의 퇴위시의 우대조건을 본받아 원세개를 위한 퇴위우대조건을 내놓았다: 첫째, 지난 일은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 둘째, 공민권은 박탈하지 않는다. 셋째, 개인재산은 몰수하지 않는다. 넷째, 거주의 자유를 가진다. 다섯째, 전국인민은 마땅히 표해야할 존경을 표한다. 여섯째, 민국정부는 매년 세비 10만위안을 지급한다. 이 우대조건은 기본적으로 북양군벌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다. 어쨌든 원세개는 그들의 보스였고, 그에게 지나치게 심하게 하지는 않으려는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것이다.

 

원세개는 이 우대조건을 보고, 비록 마음 속으로 불만은 있었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기로 한다. 원세개가 정말 이 우대조건에 따라 하야했더라면, 원세개에게는 재기의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원세개가 물러났다. 이제는 누가 원세개의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단기서? 풍국장? 아니면 여원홍? 아무도 대체할 수 없었다. 나중의 군벌혼전이 이를 증명한다. 이와 반대로 만일 원세개가 살아있었더라면, 다시 재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많은 군벌두목들이 속속 물러났다가 속속 다시 등장하지 않았던가? 이퇴위진(以退爲進)이 어떤 때는 아주 좋은 전술이 된다.

 

아쉬운 것은 원세개는 결국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제를 칭한 것이 그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사망을 앞당겼다. 원세개의 셋째딸 원정설(袁靜雪)의 회고에 따르면, 1916년 원소절에 온 식구가 모여서 함게 원소를 먹는데, 여섯째, 여덟째, 아홉째 첩이 "비" "빈"의 명분을 놓고 원세개의 면전에서 대놓고 싸웠다. 원세개는 이를 본 후에 장탄식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더 소란피우지 말라. 너희는 모두 창덕으로 돌아가라. 내 관과 함께 돌아가라!" 말을 마치고 원세개는 자신의 사무실로 갔다. 당시 호국전쟁은 이미 발발했고, 원세개는 하루종일 근심걱정이 많았고, 정신이 맑지 못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또 소란이 벌어진다. 원세개는 그 이후 식사량도 줄어들었고, 점점 우울함이 쌓여서 병이 되었다.

 

여러 방면에서 총통퇴위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원세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총통에서 물러나기는 싫고, 계속 싸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고, 그의 몸도 망가졌다. 5월의 마지막 며칠동안, 원세개는 이미 일을 볼 수가 없었다. 6월 5일, 원세개는 쇼크로 혼미상태에 빠진다. 6월 6일 새벽 6시, 원세개는 마침내 숨을 거둔다.

 

원세개가 얻은 병은 방광결석으로 인한 요독이 전신에 감염된 것이었다. 원래 이 병은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원세개는 고집스러운데가 있어서, 양의에게 진료를 맡기지도 않고, 수술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아마도 발병위치가 특수하다보니, 수치심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황제에 오른 후에 여러가지 불쾌한 일이 있다보니 홧병이 들어 그의 병세를 더욱 악화시킨 것같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소변도 제대로 눌 수 없게 되자, 원극정이 극력 주장하여, 원세개는 비로소 프랑스 의사인 패희엽(貝希葉)이 진찰을 하도록 허락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늦었다. 패희엽은 원세개에게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으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면 혹시 살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세개는 이를 거절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패희엽은 그저 원세개의 침실에서 그가 오줌을 눌 수 있도록 조치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오는 것은 모두 피오줌(血尿)이었다. 원세개는 스스로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급히 사람을 시켜 서세창과 단기서를 불러오게 한다. 그리고 총통의 대인(大印)을 서세창에게 건네준다: "총통은 여송경(黎宋卿, 黎元洪을 가리킴)이 해야할 것이다. 나는 괜찮다. 창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겠다."

 

원세개는 6일 새벽 혼미상태에서 깨어난 후, 곁에서 병수발을 들던 오랜 친구 서세창에게 낮은 목소리로 "양도(楊度), 양도가 나를 망쳤다. 나를 망쳤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원세개가 임종시에, "그가 나를 해쳤다"고 했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원세개를 해쳤다는 말인가? 양도인가? 원극정인가? 아니면 그 자신인가? 원세개가 이렇게 죽어버렸는데, 누가 알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