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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왜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의 적수가 되지 못했는가?

by 중은우시 2011. 5. 27.

 

 

: 정만군(程萬軍)

 

 

 

위안스카이는 재능있는 인물이다. 이는 당대는 물론 후세인들도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어쩐 인재였는가? 내재(內才)인가 외재(外才)인가? 그가 일본인과 겨룬 결과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일본과 중국이 처음으로 겨룬 것은 조선문제를 놓고 다툰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위기는 청국, 일본 양국의 실력을 시험할 기회였다. 양국 공사의 수준을 가늠할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대청의 조선주재공사는 위안스카이이고, 일본의 조선주재공사는 오토리 케이스케였다.

 

공사의 지위는 국가의 실력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외교의 마지막 성패는 왕왕 전쟁으로 판가름난다. 그러나, 공사의 개인능력과 판단력도 무시할 수는 없다. 공사는 한 국가의 대외전략과 방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리홍장을 이어, 청나라정부내에서 가장 우수한 관리라면 위안스카이를 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의 자질을 일본관리와 비교했을 때는 어떠할까?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청나라정부의 진짜 실력이 아직 부속국 조선에게 드러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조선은 청국에 고분고분했고 말을 잘 들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 모든 권력을 농단했다. 그는 감국(監國)과 같은 역할을 한다. 조선국왕이 궁내의 신하 한명을 갈아치우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권력지위를 스스로 설정하여 각국의 조선주재공사들보다 위였다. 각국공사회의등을 할 때는 통역 당소의를 대신 보냈다. 가마나 시종등은 아주 화려했다. 조선의 궁중과 정부행위는 크고 작은 일 할 것없이 모두 간섭했다. 조선에서 혼자서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위안스카이가 손님들 중에서는 왕이었다. 그으ㅣ 자리는 조선관리의 주인석보다 높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위안스카이의 조선에서는 호시절은 이 전쟁으로 끝이 난다.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위안스카이의 적수인 오토리 케이스케는 독사와도 같은 영민함과 공격력을 나타낸다. 원래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던 위안스카이공사는 반응속도나 과단성에서 한참 떨어졌다. 먼저 상사의 명령을 기다리다보니 국면을 처리하는 자체판단을 하지 못한다. 그 후에 형세가 좋지 않게 되니, 그냥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다.

 

임오군란 초기에, 오토리 케이스케는 외상인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의 지시를 받아 도광양회의 계책, 명수잔도암도진창의 계책을 쓴다. 일관되게 전횡하고 광망했던 위안스카이는 도광양회의 수단을 쓰는 적의 앞에서, 기본적인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는 과연 함정에 빠진다. 전보로 리홍장에게 보내어, 일본측은 병력을 출동시켜 간섭하려는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잘못된 정보를 받은 청나라조정은 담이 커진다. 그리하여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여 난을 평정하려고 준비한다.

 

평상심으로 말하자면, 위안스카이는 군사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문화수준은 높지 않다. 그러다보니 시국에 대한 판단에는 한계가 있었다.

청나라조정은 위안스카이가 잘못 인도하는 바람에 병력 천오백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간다.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외무성에 조회를 보낸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은, 청나라병사가 조선에 들어가자, 일본은 조선의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9천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진입한 것이다. 조선의 국면은 급속히 악화된다. 일본의 대병력이 조선을 압박하고, 이는 위안스카이로 하여금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든다.

 

위안스카이도 오토리가 한성으로 온 것에는 그런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초 오토리와 전임 조선주둔공사가 교체될 때, 위안스카이는 조선왕실에 극력 반대의견을 나타낸다. 오토리가 조선에 공사로 오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위안스카이가 오토리의 한성부임을 막고, 일본병력의 한성진주를 막는데 많은 외교노력을 기울인 것을 보면 그가 스스로 자신없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토리 케이스케는 일본의 저명한 주전파이다. 그가 오는 것은 위안스카이에게는 천적이 온 것과 같았다. 위안스카이는 오토리의 앞에서, 자신감부족을 드러낸다. 중일양국이 동시에 조선에서 철병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는 일본에 스스로 겁을 낸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고,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은 조선에서 철병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각국 공사의 조정을 거절하고 조선내정개혁안을 내놓는다. 이를 통하여 청국과 조선의 종주국 번국관계를 완전히 부정한다. 이렇게 하여 충돌은 가속화된다.

 

오토리등이 나중에 이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것을 보면,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많다. “청국은 내가 병력을 출동시킬 줄 몰랐다.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군대를 정비하고 기다린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본은 전쟁준비를 한지 오래되었다. 시기가 도래하기만 기다린 것이다. 일본은 조선으로 출병하기 전에, 수년간의 시간을 들여서 이를 준비했다. 그들은 정한파를 보내어 중국의 상황에 대하여 조사하고, 일본정부의 의사결정에 기초로 삼았다. 이들은 유학 혹은 고찰의 명목으로 중국에서 조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썩어빠진 제국의 실상을 알고난 후, 중국에 대하여 무시하게 된다. 전후로 <두청책안> <청국정토책안> <인방병비략> <진인방병비략표> <군비의견서>등이 세상에 나온다. 이들은 청일전쟁을 극력 고취한다.

그리하여, 일본이 조선에 진주하고, 청군을 쫓아낸 후, 고개를 돌려 중국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1894 7, 조선이 일촉즉발인 상황하에서 위안스카이는 리홍장에게 병가를 신청하여 황급히 귀국한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의 십이년 정치생애를 이렇게 마치고 천진으로 돌아간다. 전쟁발발전에 먼저 도망친 공사대인은 당연히 붙잡혀 포로가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위안스카이가 조선에서 귀국한 후,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이전의 주전파에서 신중파로 바뀐 것이다. 마지막에는 의화단의 주요골간이 된다. 아마도 이를 스스로 똑똑한 것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청국은 일본의 적수가 아니다. 자신은 오토리 케이스케의 담략에 미치지 못한다. 일본인의 앞에서는 그저 고분고분한게 좋다.

 

왜 국내에서는 우수한 관리가, 국외에서는 그렇게 형편없어지는가. <낭토템>의 작가는 중국군신은 오랑캐를 무서워하는데 기 이유를 낭도(狼道)와 양도(羊道)”의 차이로 본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중국의 군신이 국내에서 실시하는 것은 여전히 낭도이다. 다만 그들은 양떼속의 늑대이다.

 

역대 중국봉건통치자들은 명목상으로는 유가의 신도이지만, 실제로는 법가의 신도이다. 그들은 법가의 잔혹한 수단으로 서민을 유가의 양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늑대이다. 서민들은 양으로 기른다. 그리하여 국가를 양목장으로 만든다. 그들은 양목장의 안에서는 마음대로이다. 양떼들 속에 들어있는 늑대는 양을 잡아먹고 싶으면 잡아먹는다. 사냥을 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오래 지내다보면 야생늑대와 싸울 담량이나 실력은 가지질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랑캐의 낭도는 늑대무리 속의 늑대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냥을 하면서 성장한다. 야성이 죽지 않았다. 오히려 강화된다. 양떼들 속에서의 늑대왕과 늑대무리 속에서의 늑대왕은 다르다. 그들이 시행하는 낭도도 다르다. 결국 둘은 종류가 다른 늑대인 것이다. 청일전쟁때, 광서제와 서태후, 그리고 리홍장과 위안스카이는 사실 모두 한편에 섰다. 그러나 결과는 말해준다. ‘황제당이던 태후당이건 합쳐서도 자그마한 섬나라의 오랑캐왕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두 종류 늑대의 싸움은 바로 양떼 속의 늑대와 늑대무리 속의 늑대와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오토리 케리스케로 대표되는 일본의 매파는 중국에 대하여 멸시하는 심리를 지니고 있었다. 청나라조정은 자감우루(自甘愚陋)’하고, ‘마목불인(麻木不仁)한 관리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이 묘사는 양떼 속의 늑대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위안스카이는 자감우루한 조정의 산물이다. 그러니, ‘마목불인한 관리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 그도 양뗴 속의 늑대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임오군란을 통하여 본모습이 드러난 위안스카이 대인은 오토리 케이스케와의 다툼에서 일패도지한다. 양떼 속의 양이 늑대무리속의 무리를 만나면 그 고하가 분명한 법이다. 위안스카이의 재능은 청나라라는 영토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어쨌든 안에서만 힘을 쓰는 양뗴 속의 늑대에 불과하다. 얻기 힘든 인재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