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법제일보
민국사공자에 관하여 여러가지 서로 다른 버전에 전해져 내려온다. 4공자중 하나로 불리던 장백구(張伯駒)는 <<속홍헌기사시보주>>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근대사공자는 첫째가 한운(寒雲, 袁克文을 가리킴)이고, 둘째가 나이며, 셋째가 장학량(張學良)이며, 넷째는 일설에는 노영상(盧永祥)의 아들 소가(小嘉)라 하고, 일설에는 장건(張謇)의 아들 효약(孝若)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첫째가 홍두관주(紅豆館主) 부동(溥侗), 둘째가 한운, 셋째가 나, 넷째가 장학량이라고 한다"
장백구는 실제로 민국사공자에 대한 3가지 버전을 얘기했다: 하나는 원극문, 장백구, 장학량, 노소가, 다른 하나는 원극문, 장백구, 장학량, 장효약, 마지막으로 부동, 원극문, 장백구, 장학량이다.
이들 인물들중,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장학량일 것이다. 장학량을 제외하고는 원세개의 아들인 원극문의 지명도가 아마도 가장 높을 것이다. 원극문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원세개의 아들중에서 남달랐던 인물이다. 원극문 본이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스스로를 삼국시대의 조자건(曹子建, 즉, 曹植)에 비유하곤 했다. 원극문은 정치적인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고, 원세개가 황제에 오를 때, 그는 부친이나 형과는 의견이 달랐다. 그가 황제제도를 반대한 시가 당시에 널리 퍼질 정도였다: 마지막 구절은 "절련고처다풍우(絶憐高處多風雨), 막상경루최상층(莫上瓊樓最上層)"(높은 곳은 비바람도 많은 법이니, 옥루의 가장 높은 층에는 오르지 말라)
원세개가 죽은 후, 원씨자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원극문은 북경, 천진, 상해등지를 오갔고, 수장, 서화, 전사, 작시, 찬문, 창곡등의 명사활동을 계속했다. 1931년 음력 정월 원극문은 천진에서 성홍열로 사망한다. 평생동안 돈을 물쓰듯이 한 그는 죽은 후에 단지 20위안의 재산을 남겼을 뿐이다. 후사는 청방의 그의 제자와 제자의 제자들이 처리했다. 장례식에는 그와 여러해동안 교분이 있던 일부 승려, 도사들이 참가했고, 심지어 일부 기녀들까지 머리를 흰색으로 묶고 나타나서 곡을 했다. 풍류재자 원씨 둘째공자의 장례는 당시 천진의 큰 구경거리였다.
장백구는 하남도독 장진방의 아들이다. 그는 원씨집안과 관계가 밀접했다. 1950년대말, "홍헌태자' 원극정이 그의 집에서 사망한다. 후사도 그가 모두 처리했다. 어떤 사람은 장백구의 일생동안의 직업이 '놀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노는데는 재주가 많았다. 그는 시사영련, 금기서화, 희곡연구, 문물감상등에서 뛰어났다. 그는 옛날 소설에서 보통 말하는 '시사가부를 모르는 것이 없고, 금기서화를 못하는 것이 없다"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장백구는 이처럼 수장감상가, 서화가, 시사학가, 경극예술연구가로 평생을 보낸 문화기인이다.
1956년, 장백구와 그의 부인 반소는 평생동안 수장해오던 서진 육기의 <<평복첩>>, 수나라 전자건의 <<유춘도>>, 당나라 이백의 <<상양대첩>>, 두목의 <<증장호호시>>권, 송나라 범중엄의 <<도복찬>>, 황정견의 <<제상좌첩>>등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진귀한 서화들을 국가에 기증한다. 만년에 그는 중앙문사관 관원, 민맹중앙 문교위원등 여러가지 직위를 가진다. 1982년 2월 26일 북경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나니, 향년84세이다.
노소가는 절강독군 노영상의 아들이다. 상해에서 유명한 플레이보이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장거는 황금영과 한 여자예인을 놓고 싸운 일이다. 1940년대후반, 노소가는 대만으로 이주하여 사업에 종사한다. 1960년대말에 사망한다.
장효약은 청나라말기의 장원이자 유명한 실업가인 장건의 아들로 미국유학을 다녀왔다. 일찌기 북양정부에서 일한 바 있다. 장건이 죽은 후, 장효약은 부친이 남긴 여러가지 사업을 물려받는다. 1935년에는 부하인 보안요원에게 암살당하니, 나이 37세때의 일이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부동은 청나라말기의 유명한 양무파 영수인 공친왕 혁흔의 손자이다. 그는 사공자중 유일한 소수민족이자 황족이다. 부동의 문화적 소양은 심후했고, 곤곡과 경극을 아주 좋아했다. 당시 경극의 유명한 배우인 언국붕, 이만춘등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부동은 한때 혼자서 <<군영회>>의 주유, 노숙, 장간, 조조, 황개의 다섯 명의 역할을 한 적도 있다. 그의 재주는 출신입화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1950년 6월, 부동은 상해에서 병사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는 곤곡의 발원지인 소주에 묻힌다.
그외에 또 하나의 '민국사공자'에 대한 버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바로 손중산의 아들인 손과(孫科), 장작림의 아들인 장학량, 단기서의 아들인 단굉업(段宏業), 노영상이 아들인 노소가라는 것이다.
손과는 손중산(손문)의 외동아들이다. 남경정부의 행정원장, 입법원장등을 지내고, 나중에 해외로 이주한다. 1956년에는 대만으로 갔다가 1973년 9월에 병사한다.
단굉업은 '북양의 호랑이'로 불리던 단기서와 원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장남이다. 어려서부터 친척집에서 자랐고, 10여세가 되어서야 단기서의 곁으로 간다. 그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바둑을 좋아했다. 당시 바둑계에서 유명한 고수이다. 자녀와 친척에 대하여 단기서는 아주 엄격했고,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그는 단굉업을 아주 사랑했으나, 그를 위하여 앞길을 닦아주지는 않았다. 그를 최하층부터 일하도록 하고, 능력에 따라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도록 했다.
이들 '민국사공자'는 부친이 모두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의 유명한 고관대작들이다. 그들은 명실상부한 고관자제이다. 그들 각자의 운명은 그러나 완전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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