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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석우삼(石友三): 민국군벌중 최고의 카멜레온

by 중은우시 2009. 6. 17.

글: 유계흥(劉繼興)

 

카멜레온은 도마뱀류의 4지 파충류이다. 사방에 있는 물체의 색깔에 따라 자신의 피부색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변신이 잦은 소인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성두변환대왕기(城頭變幻大王旗)"의 민국시대에 각 군벌들이 창을 거꾸로 들거나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적지 않은 군벌들이 카멜레온과도 같았다. 오늘은 이쪽 파, 내일은 저쪽 계열에 있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만, 그중 한 군벌은 일찌기 풍옥상에 투신했다가 다시 세번씩이나 풍옥상을 배신하고, 다시 염석산에게 투신했다가 염석산을 배신하고, 장개석에게 투신했다가 장개석을 배신하고, 장학량에게 투신했다가 장학량을 배신하고, 공산당과 연합하였다가 공산당을 배신하고, 일본에 항거하다가 일본에 투항한 사람이 있다. 군인의 절개라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으니, 후안무치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것이다.

 

이 민국시대 군벌중에서 최고의 카멜레온이 바로 "석우삼"이다.

 

석우삼은 자가 한장(漢章)으로 길림 장춘 사람이다. 1891년생이며, 어려서는 필가양방(畢家糧坊)에서 일꾼으로 일한 적이 있다. 이때 작은 주인 필광원(畢廣垣)을 만나서, 다행히 소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다. 소학교에서는 교사인 상진(商震)과 사제의 연을 맺는다. 1908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군대에 들어간다. 청나라의 신군(新軍) 제3진(第三鎭) 오패부(吳佩孚)의 부하가 되어 하북 랑방에 주둔한다. 오래지 않아 신군 제3진은 반란이 일어나고, 석우삼은 북경으로 흘러들어와서 하루종일 할 일없이 지내게 된다.

 

1912년, 석우삼은 다시 군대에 들어간다. 풍옥상의 부하가 된 것이다. 1912년 풍옥상의 군대에 편제되어 마부(馬夫)가 된다. 그는 천성이 기민하고 영리하며, 사람들 눈치를 잘 보았다. 오래지 않아 풍옥상의 측근호위가 된다. 이때부터 그의 지위는 풍옥상의 승진과 더불어 계속 올라가게 된다. 1924년, 풍옥상이 서북변방독판으로 나갈 때, 석우삼을 제8혼성여단의 여단장으로 임명하여 빠오터우(包頭)를 지키게 하혀, 빠오터우진수사(鎭守使)가 된다. 이때의 석우삼은 한복거, 유여명, 손련중, 손량성등과 함께 풍옥상의 휘하에 있는 유명한 십삼태보(十三太保)중 하나로 불리운다.

 

1924년, 풍옥상이 북경에서 정변을 일으켜, 국민군을 성립한다. 이때 석우사은 제6군 군단장 겸 제6사단 사단장이 된다.

 

1926년봄, 봉군(奉軍), 직군(直軍), 직로군(直魯軍), 진군(晋軍)이 연합하여 풍옥상의 국민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석우삼은 풍옥상의 명을 받아 진군을 향하여 진격하나, 안문관에서 저지당한다. 부대의 사상자가 비교적 많았다. 석우삼은 진군의 전적총지휘관인 상진과 사제의 관계이므로, 휴전협상을 해서, 서로 전투를 멈추게 된다.

 

나중에 풍옥상은 소련으로 가고, 남구대전에서 국민군은 궤멸한다. 석우삼은 진군과 일찌감치 타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패잔병들을 수습하게 되고, 석우삼의 제6군은 3개사단으로 증편된다. 국민군이 귀수(歸綏), 빠오터우까지 물러난 후, 대리지휘관인 장지강(張之江)등은 감숙으로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석우삼은 서쪽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 한복거와 연락하여, 염석산에게 투항한다.

 

같은 해 9월, 풍옥상이 귀국하고, 옛 잘못은 묻지 않겠다고 한다. 석우삼은 다시 진군을 떠나, 풍옥상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을 참회한다. 그는 즉시 풍옥상에 의하여 제5로사령관에 임명되고, 1928년 국민당의 제2차북벌에 참가한다.

 

1929년 3월, 4월 사이에, 장계전쟁(蔣桂戰爭, 장개석과 桂係군벌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은 바로 모택동이 1929년 가을에 쓴 사에서 말한 것처럼 "풍운이 돌변하고 군벌이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인간세상에 원한만 뿌리고, 헛된 꿈이 다시 나타난다"

 

쌍방은 모두 풍옥상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5월, 풍옥상은 전보를 보내어 반장개석의 입장을 표명하고, 각 부대에 잠시 서쪽으로 철군하라고 명령한다. 6월 1일, 석우삼은 부대를 이끌고 허창으로 간다. 장개석이 개인적으로 보낸 전대균(錢大鈞)도 허창으로 온다. 석우삼에게 500만위안의 돈을 건네주고, 석우삼을 반역군제13로총지휘관에 임명한다.

 

이 카멜레온은 다시 깃발을 바꿔들었다. 다음 날, 석우삼은 풍옥상을 대거 욕하며, 풍옥상의 "10대죄상"을 선포하고, '반역자'인 풍옥상과는 불공대천의 원수라고 성명을 발표한다.

 

이해 가을, 석우삼은 장개석에 의하여 안휘성 주석에 임명된다. 그리고는 바로 명령을 내려 부대를 이끌고 광동으로 가서, 이종인, 진제당을 토벌하라고 지시한다. 석우삼과 그의 부하들은 북방을 떠나 남하하고자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도중에 장개석의 부대에 몰살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때, 양광(광동,광서)과 당생지(唐生智)도 사람을 보내어 석우삼에게 함께 반장개석의 편에 들 것을 제안했다. 석우삼은 바로 동의하고는 반장개석의 기치를 내건다. 12월 1일, 당생지는 각군벌들에게 전보를 보내어 장개석토벌을 명한다. 2일 밤, 일을 시작하면 화끈하게 하는 석우삼은 장강 북안에 세워놓은 수십문의 대포에서 남경을 향하여 포를 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장개석의 적수가 못되었다. 오래지 않아, 당생지등의 부대는 장개석에게 패배한다. 12월 21일, 염석산은 당생지반대, 장개석옹호의 전통을 보낸다. 석우삼은 전통을 보내어 염석산에게 투신하여, 간접적으로 장개석의 진영으로 되돌아갔고, 장개석의 징벌을 피한다.

 

1930년봄, 풍옥산, 염석산은 장개석토벌에 합의하고, 석우삼을 끌어들인다. 석우삼은 다시 한번 풍옥상의 휘하에 들어간다. 5월, 풍옥상, 염석산과 장개석의 중원대전이 발발한다. 석우삼은 중원대전에 참가한다. 명을 받고 10만대군을 이끌고 농해선을 공격한다. 9월 18일, 장학량이 전통을 보내어 장개석을 지지하고, 산해관을 넘어들어와 참전한다. 풍옥상, 염석산군은 패색이 짙었다. 석우삼은 바로 전통을 보내어 장학량에게 투항한다. 그는 세번째로 풍옥상을 배신한 것이다. 그리고 위기의 시기에 장개석의 징벌을 피하게 해준 염석산도 배신한 것이다.

 

1931년 봄, 석우삼은 심양으로 가서 장학량을 만난다.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워 그의 문하에 들어간다. 장학량은 석우삼의 부대를 국민혁명군제13로군으로 편제하고, 군사량부를 형태에 두고, 석우삼을 총지휘관으로 삼는다. 그는 이때 6만4천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매월 군수물자로 60만위안을 받았다. 석우삼을 그래도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화북지역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내게 된다.

 

석우삼은 표면적으로는 장학량에 귀순했지만, 암중으로 다시 북방으로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화북왕"이 되려는 욕심을 가진 것이다. 1931년 5월, 왕정위, 진제당, 이종인이 광주에서 별도의 국민정부를 조직한다. 그리고는 그를 제5집단군총사령관에 임명한다. 7월 18일, 석우삼은 귀덕에서 광주정부가 위임한 제5집단군총사령관의 직위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하고, 장학량을 토벌하는 전통을 보낸다. 각 부대를 이끌고 평한로를 따라서 북진하여 장학량을 토벌하러 나선다.

 

7월 24일, 남경정부는 다시 명령을 내려 석우삼의 각 직위를 박탈한다. 석우삼은 장개석과 장학량의 공동의 적이 된다. 금방 석우삼은 장학량과 장개석으로부터 남북에서 협공을 받게 된다. 7월 31일, 석우삼의 군대는 전멸하고, 그는 부하가 없는 사령관이 된다.

 

이제 여러해동안 쌓아왔던 기반은 모조리 사라졌다. 석우삼은 할 수 없이 산동의 옛친구 한복거를 찾아간다. 다른 사람의 밑에서 지내는 생활이 시작된다. 다음 해, 그는 한복거를 도와서, 또 다른 군벌 장종창을 성공적으로 암살한다.

 

1932년, 석우삼은 비밀리에 산동을 떠난다. 연태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가서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를 찾아가서 그와 결탁한다. 그리고 일본조계로 들어간다. 천진의 일본조계에서 옛날 부하와 매국노, 깡패, 군인들을 끌어모아서 친일무장세력을 구축한다. 그리고는 여러번 국민당군의 항일활동을 군사적으로 저지한다. 이리하여 국민당의 화북지역통치에서 커다란 골치거리로 등장한다. 장개석은 일찌감치 석우삼을 뼛속까지 미워했다. 기회를 틈타서 군통국에 그를 처치하라고 지시한다. 군통 북경참의 참장인 진공주(陳公澍)는 특무 왕문을 보내어 석우삼의 측근시종부관 선홍하를 매수한다.

 

선홍하는 군통으로부터 극약을 건네받고, 돈으로 요리사를 매수하여 요리에 독약을 탄다. 그날 저녁 9시경, 석우삼과 셋째 첩은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그 요리사는 독약을 탄 샤부샤부요리를 내놓게 된다. 너무 긴장한 탓에, 육수조차 제대로 끓이지 못했다. 석우삼은 바로 경계심을 느꼈고, 권총으로 요리사를 협박하여 자백을 얻어낸다. 요리사는 독을 탔다는 내용을 실토하고 만다. 선홍하는 요리사가 자신을 지적하는 것을 보고는 일이 들통났다고 보고, 손으로 권총을 더듬어 찾았다. 이때 그의 동태를 관찰하고 있던 하참모가 선홍하의 권총을 발로 차서 떨어뜨린다.

 

분노한 석우삼은 참모에게 선홍하를 묶어서 일본조계의 헌병대로 보내게 한다. 그리고 그를 남경에서 보낸 항일분자이니, 일본군에서 처리하라고 한다. 군통이 석우삼을 암살하려던 계획은 이렇게 실패한다. 석우삼은 계속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게 된다.

 

1933년 5월, 중국과 일본이 당고협정을 체결하고, 남경국민정부는 화북에 기찰정무위원회를 만든다. 그리고 석우삼을 기북보안사령관에 임명한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석우삼은 부대를 재편하여 명장 송철원(宋哲元)의 휘하에서 181사단 사단장이 된다. 같은 해말, 석우삼은 제69군의 군장이 되고, 나중에 제10군단총사령관이 된다.

 

1938년, 산동이 일본에 점령된 후, 석우삼은 명을 받고, 적의 후방에서 유격전을 진행한다. 석우삼은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과 협력하기 시작한다. 그는 공산당의 협조하에 산동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등소평, 양수봉은 일찌감치 석우삼의 부대로 가서 일한 적이 있다. 석우삼은 공산당원인 장극위(張克威), 장우어(張友漁)를 불러 정치부주임을 맡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진보청년들을 끌어모아서 그의 부대에서 정치공작업무를 하도록 한다.

 

1939년 4월, 장개석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를 발휘하여, 측근 장백풍으로 하여금 구두로 "공산당, 팔로군을 제거하면 화북은 석우삼이 주재하게 하겠다"고 전하게 한다.

 

배신을 주특기로 삼는 석우삼은 다시 한번 변신한다. 그는 연공에서 반공으로 철저히 돌아선다. 그의 부대장병들에게 모두 국민당에 가입하라고 지시하고, 팔로군과는 충돌을 일으킨다. 그리고 계속 병력을 파견하여 공산당의 항일근거지를 파괴하고, 항일군민을 살해한다. 그리하여 "석염왕(石閻王)"이라는 칭호를 듣는다. 1939년 공산당의 간부들은 석우삼의 부대에서 빠져나온다. 오래지 않아 석우삼은 찰합이성 주석에 임명된다.

 

1940년봄, 석우삼은 부대를 이끌고 기남팔로군을 공격하지만, 팔로군에게 패퇴당한다. 손실이 아주 참중했다. 그는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는 일본과 결탁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후 석우삼은 일본에 적극 협조하며, 여러번 팔로군근거지를 공격한다. 그는 개봉에서 일본주둔군사령관인 사사키(佐佐木)와 상호불가침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팔로군을 소탕한 후 일본군에 투항하고자 준비한다.

 

석우삼이 일본군과 결탁하는데 대하여 부하들은 불만이 많았다.

 

석우삼의 지휘를 받던 신8군 군장 고수훈(高樹勳)은 팔로군을 공격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석우삼은 일본군을 동원하여 고수훈의 부대를 공격한다. 석우삼과 고수훈의 갈등이 첨예화된다. 석우삼의 제69군 정치부주임인 장백풍과 총참의 필광원은 고수훈과 협의하여 석우삼을 제거하기로 계획한다.

 

1940년 11월, 석우삼은 일본측과 투항조건을 협상하기 시작한다. 장백풍, 필광원, 고수훈등은 형세가 시급하다고 보고, 하루빨리 손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서북군장군이며 당시 노서행서주임 겸 유격주임인 손양성에게 나서도록 부탁한다. 그리하여 그가 나서서 석우삼을 고수훈의 부대로 와서 직접 면담하도록 요청한다. 이유는 두 사람의 소원한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석우삼은 옛 상사의 말을 듣자 그 자리에서 동의한다.

 

12월 1일, 석우삼은 1연대기병을 이끌고 손양성을 따라 고수훈의 주둔지인 하남 복양의 유하둔에 도착한다. 고수훈은 여단장 이상의 장교들을 이끌고 그들을 맞이하여 회의실로 들어간다. 모두 담소하면서 지난 일을 얘기하였다. 어느 순간, 한 근무병이 안으로 들어와서 고수훈에게 보고하였다: "부인께서 얘기하실 것이 있다고 합니다." 고수훈은 바로 회의실에서 나갔다. 돌연 4명의 호위병이 회의실로 들어오더니 석우삼을 끌고 나가버렸다.

 

고수훈은 석우삼을 남채(南寨)에 가두어두었다.  석우삼을 죽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는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나중에 측근들이 종용하자 비로소 결심을 내리고, 호위대장 고금란, 군부참의 이석유등을 보내어 석우삼을 산채로 황하강변에 매장토록 한다.